연재글 조원태목사의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 주권, 제국의 밤에도 사라지지 않는 보좌 (뉴스앤조이) 2026-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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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권, 제국의 밤에도 사라지지 않는 보좌
조원태목사의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
이번에는 성서 66권 각 책의 서문(Threshold, 문지방 텍스트)을 따라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새로운 연재『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로 다시 시작합니다.
이 시리즈는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라는 주제로 출발합니다. 특정 책의 프롤로그 분석을 넘어, 성경 전체의 첫 문장을 따라 걸어가는 실험적 글쓰기로서 목회와 문학, 신학을 잇는 연재가 될 것입니다.
연재의 서막을 여는 글은 프롤로그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소개되며, 이후 매주 성경의 서로 다른 현관을 열어갈 예정입니다.
이 연재가 독자들의 시야를 넓히고 성서를 다시 ‘시작의 자리’에서 읽게 하는 영적 초대가 되리라 믿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성경의 전체적인 가르침이 다시금 생생하게 느껴지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 편집자 주 -
다니엘 1:1-9
1 유다 왕 여호야김이 다스린 지 삼 년이 되는 해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을 에워쌌더니 2 주께서 유다 왕 여호야김과 하나님의 전 그릇 얼마를 그의 손에 넘기시매 그가 그것을 가지고 시날 땅 자기 신들의 신전에 가져다가 그 신들의 보물 창고에 두었더라 8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 9 하나님이 다니엘로 하여금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신지라.

밤의 사막을 건너는 행렬이 있었다.
말들은 지쳐 있었다. 고개를 낮춘 채 모래 위에 발을 얹었다가 떼었다. 수레바퀴는 식은 모래를 천천히 밀고 지나갔다. 그 위에서 성전의 금속 기물들이 서로 부딪쳤다. 맑지도, 크지도 않은 소리였다. 오래 울음을 참아 온 것들이 더는 견디지 못하고 아주 낮게 몸을 떠는 소리 같았다.
그릇들의 금빛 표면에는 아직 예루살렘의 그을음이 남아 있었을 것이다. 향의 냄새가 배어 있던 가장자리마다 사막의 먼지가 달라붙고, 제단 곁에서 빛나던 것들은 이제 낯선 신전의 어두운 창고를 향해 실려 갔다. 시온의 기억이 바벨론 신들의 보물 사이에 놓이는 밤이었다. 거룩했던 것들이 전리품이 되는 밤이었다.
그 행렬 뒤로 어린 포로들이 걸었다.
불탄 집의 냄새가 그들의 옷자락에 배어 있었다. 무너진 돌의 가루가 신발 밑창에 묻어 있었다. 급히 떠나오느라 미처 울지도 못한 얼굴들이 서로의 곁을 지나갔다. 그들은 뒤돌아보지 못했다. 뒤돌아보아도 보이는 것은 연기뿐이었을 것이다. 성은 멀어졌다. 성전은 작아졌다. 마침내 고향은 눈으로 볼 수 없는 곳이 되었다.
예루살렘이 무너졌을 때, 사람들은 성벽만 무너졌다고 생각했을까?
그날 끝난 것은 한 도시의 역사만이 아니었다. 한 민족의 자존심만도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해 오래 붙들고 있던 신뢰까지 함께 흔들렸다. 다니엘서는 바로 그 무너짐의 한가운데서 열린다.
승전가가 울리는 바벨론의 거리도 아니고, 검게 탄 예루살렘의 성벽 아래도 아니다. 다니엘서는 그 사이의 시간에 선다. 고향의 먼지가 아직 옷자락에 남아 있고, 제국의 말이 아직 혀에 익지 않은 시간. 울음은 끝나지 않았고, 새 이름은 아직 몸에 붙지 않은 시간이다.
바벨론은 이상할 만큼 능숙했다. 사람을 죽이는 힘만 가진 제국이 아니었다. 살려 두고, 먹이고, 가르치고, 왕궁 안으로 들이는 힘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친절한 손길 안에는 더 깊은 폭력이 숨어 있었다. 언어를 바꾸고, 생각의 결을 바꾸고, 마침내 한 사람이 자기 자신을 누구의 사람으로 기억하는지까지 바꾸려는 폭력.
포로의 삶은 쇠사슬에서만 시작되지 않는다. 때로는 잘 차려진 식탁에서 시작된다. 사람은 따뜻한 음식과 새 이름과 더 나은 내일이라는 약속 앞에서, 빼앗기고도 빼앗긴 줄 모를 수 있다.
그래서 다니엘서의 첫 질문은 종말의 날짜가 아니다. 제국의 끝이 언제 오는가도 아니다. 다니엘서는 더 가까운 것을 묻는다. 모든 것이 바뀌는 곳에서, 사람은 무엇을 끝까지 바꾸지 말아야 하는가? 다른 나라의 말로 배우고, 다른 왕의 식탁 앞에 앉고, 다른 이름으로 불려야 할 때에도 인간은 어떻게 자기 영혼의 중심을 잃지 않을 수 있는가?
다니엘서의 문지방에는 거대한 사건보다 작은 장면이 먼저 놓인다. 전쟁보다 한 끼의 식사. 왕좌보다 한 사람의 마음. 제국의 명령보다 한 사람의 결단.
다니엘은 왕의 음식을 앞에 두고 뜻을 정한다. 아무도 크게 흔들리지 않는 자리에서, 한 사람이 자기 안의 중심을 붙든다. 그리고 그 작은 자리에서 다니엘서 전체를 관통하는 한 단어가 모습을 드러낸다.
주권.
누가 인간의 이름을 끝내 규정하는가? 누가 제국의 왕좌보다 높은 곳에서 시간을 다스리는가? 누가 빼앗긴 사람의 마음을 끝까지 붙드시는가?
다니엘서는 이 질문을 먼저 왕의 식탁 앞에 앉은 한 사람의 마음으로 묻는다.
역사의 주어가 바뀌는 자리
처음에는 느부갓네살의 이름이 보인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을 에워쌌더니”(단 1:1).
그가 왔다. 그의 군대가 예루살렘을 둘러섰고, 그의 명령 아래 문들이 무너졌으며, 그의 병사들이 성전 안으로 들어갔다. 눈에 보이는 역사는 대개 이런 방식으로 기록된다. 누가 이겼는가. 누가 빼앗았는가. 누가 패자의 운명을 정했는가. 첫 문장만 읽으면 느부갓네살이 주어다. 예루살렘은 목적어이고, 하나님의 성전은 전리품이다.
그러나 다니엘서는 둘째 절에서 슬며시 문장의 방향을 바꾼다.
“주께서 유다 왕 여호야김과 하나님의 전 그릇 얼마를 그의 손에 넘기시매”(단 1:2).
짧은 말이었다. 그러나 그 말 앞에서 역사의 표면이 갈라진다. 바벨론 왕이 빼앗은 것처럼 보였던 일을 다니엘서는 하나님이 넘기신 일로 읽는다.
히브리어 본문은 기본적으로 ‘주다’를 뜻하는 동사 나탄을 사용하지만, 여기서는 하나님이 역사를 바벨론의 손에 ‘넘겨주셨다’는 뜻이다. 바벨론은 빼앗는 제국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빼앗김의 한복판에서도 역사의 주어로 남아 계신다.
이 말이 패배를 아름답게 만들지는 않는다. 성전은 실제로 무너졌고, 사람들은 실제로 끌려갔다. 하나님이 지키신다고 믿었던 도시는 함락되었고, 그분의 이름으로 구별되었던 그릇들은 이방 신전의 어두운 창고에 놓였다.
믿음은 바로 그 자리에서 가장 견디기 어려운 질문을 만난다.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는가.
다니엘서는 그 질문을 피하거나 덮지 않는다. 첫 장의 문지방에 그대로 세워 둔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 회복된 뒤에야 나타나시는 분이 아니다. 무너짐이 아직 끝나지 않았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설명 없이 남아 있을 때에도 역사를 놓지 않으신다. 성전의 그릇이 바벨론의 창고에 들어갔다고 해서 하나님마저 그 안에 갇힌 것은 아니다.
그릇들이 옮겨진 곳은 시날이었다. 성경에서 시날은 바벨탑이 세워진 땅이다(창 11:2). 사람들이 하늘에 닿고 자기 이름을 남기려 벽돌을 쌓아 올린 욕망의 자리다. 다니엘서는 그 오래된 욕망을 다시 불러낸다. 느부갓네살의 금 신상과 벨사살의 술잔은 바벨탑의 또 다른 얼굴이다.
1장에서 창고에 들어간 성전 그릇은 5장에서 다시 나온다. 벨사살은 그 그릇에 술을 부어 마시며, 거룩한 것을 제국의 잔치 한가운데 올려놓는다(단 5:2–4). 그러나 바로 그 밤, 왕궁 벽에 글자가 나타난다.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 바벨론은 이미 하나님의 저울에 달려 있었다. 무겁다고 믿었던 제국은 가벼웠다(단 5:5, 27).
첫 장의 그릇은 이미 다섯째 장의 심판을 품고 있었다. 바벨론은 거룩한 그릇을 차지했지만, 그 주인까지 바꾸지는 못했다.
이 복선은 다니엘서 전체로 이어진다. 신상은 발끝에서 부서지고(단 2:34–35), 하늘에 닿은 나무는 베이며(단 4:10–14),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들은 사라진다(단 7:3–12). 왕들은 나라가 자기 손에 있다고 믿지만,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는 이는 지극히 높으신 분이다(단 4:17).
주권은 모든 일이 뜻대로 이루어진다는 말이 아니다. 제국이 역사의 한 문장을 쓸 수는 있어도, 끝까지 결정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빼앗김의 한복판에서도 역사의 주어는 빼앗기지 않는다.
그러나 제국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성전의 그릇을 빼앗은 뒤에는 사람의 이름까지 바꾸려 한다.
빼앗긴 이름 위에 놓인 마음
바벨론은 무너뜨리는 법만 아는 나라가 아니었다. 더 무서운 것은 무너진 사람들의 내일까지 자기 손에 넣는 능력이었다. 그들은 유다의 왕족과 귀족 가운데 총명한 소년들을 골라 죽이지 않고 먹이고 가르쳐 왕궁으로 들였다. 갈대아의 언어와 학문을 익히게 하고, 왕의 음식과 포도주를 주며, 마침내 왕 앞에 세우려 했다(단 1:3–5).
폭력은 언제나 칼의 얼굴로 오지 않는다. 때로는 기회와 호의와 더 나은 미래의 약속으로 온다. 왕의 말로 생각하고, 왕의 식탁에서 먹고, 왕이 붙인 이름으로 불리다가 마침내 왕의 사람이 되는 것. 이름을 바꾸는 일은 마지막 절차가 아니라 가장 깊은 점령이었다.
다니엘,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
그 이름들에는 하나님을 향한 기억과 그들이 누구에게 속했는지를 말해 주는 신앙의 고백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바벨론은 그 위에 벨드사살,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라는 이름을 덮었다. 제국의 신들과 질서 안에 다시 놓인 이름들이었다(단 1:6–7).
이름을 바꾸는 일은 기억의 자리를 바꾸는 일이다. 이제 너희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바벨론의 사람이라는 선언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들을 새 이름 안에 가두지 않는다. 왕궁에서는 벨드사살이라 불렸지만, 이야기의 중심에는 여전히 다니엘이 서 있다. 제국은 그의 이름을 바꾸었지만, 성경은 그의 본래 이름을 끝까지 놓지 않는다. 그것이 다니엘서가 보여 주는 저항이다.
사람은 자신을 부르는 이름보다, 자신을 기억하는 이야기 속에서 더 깊이 살아간다.
다니엘서는 제국의 언어로 제국의 한계를 말한다. 그 말을 배운다고 반드시 그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다니엘과 친구들은 갈대아의 학문을 익혔지만, 왕궁이 세계의 전부라고 믿지는 않았다. 제국 안에서 탁월했으나, 제국에 속하지는 않았다.
그들의 첫 경계는 식탁에서 드러난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단 1:8).
히브리어 표현을 곧게 옮기면, 다니엘은 자기 마음 위에 뜻을 올려놓은 사람이다. 바벨론이 그의 이름 위에 새 이름을 덮을 때, 그는 그보다 더 깊은 마음 위에 하나님 앞에서 정한 뜻을 올려놓았다.
그 결심은 요란하지 않았다. 다니엘은 식탁을 뒤엎지 않고 정중히 대안을 제시하며 시험할 시간을 구했다(단 1:8–14). 그는 단호했지만 거칠지 않았고, 유연했지만 흐려지지 않았다.
모든 것을 거절하는 것이 믿음은 아니며,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도 지혜는 아니다. 다니엘은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거절할지, 어디까지 들어가고 어디에서 멈출지를 알았다.
그는 언어를 배웠지만 예배의 대상을 바꾸지 않았고, 왕궁에 들어갔지만 마음의 왕좌를 내주지 않았다. 새 이름으로 불렸지만, 그 이름이 자기 영혼의 전부가 되게 하지는 않았다.
우리도 많은 시간을 왕궁 안에서 산다. 요구받은 언어를 말하고, 주어진 규칙에 따라 하루를 보낸다. 문제는 제국의 언어를 배우는 데 있지 않다. 그 언어만으로 자신을 이해할 때, 우리는 조금씩 이름을 잃는다.
당신의 마음 위에는 지금 무엇이 놓여 있는가? 이름을 빼앗기지 않은 사람만이 짐승의 시대에도 사람의 자리를 지킬 수 있다.
짐승의 시대에 사람으로 남는 법
다니엘서의 앞부분에는 왕궁의 낮이 있고, 뒤편에는 밤의 환상이 있다. 한쪽에는 음식과 이름과 교육이, 다른 한쪽에는 거대한 신상과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들이 있다.
그러나 다니엘서는 그 둘을 갈라놓지 않는다. 왕궁의 식탁에서 시작된 질문은 밤의 환상 속에서 시대의 얼굴로 떠오른다. 제국은 사람을 무엇으로 만드는가?
다니엘 7장에서 제국들은 사람의 얼굴이 아니라 짐승의 형상으로 나타난다. 날개 달린 사자와 곰과 표범, 말로 다 할 수 없이 무서운 짐승이 어두운 바다에서 차례로 올라온다. 권력이 사람의 얼굴을 잃을 때, 제국은 짐승이 된다. 인간의 나라는 힘이 많아서가 아니라 힘을 멈출 줄 모를 때 짐승이 된다. 다른 생명을 삼키고도 만족하지 못하고, 약한 이들의 고통을 숫자로 셀 때다.
그 짐승들 앞에 “인자 같은 이”가 나타나 하늘 구름을 타고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받는다(단 7:13–14). 다니엘서의 묵시는 미래의 날짜를 맞히는 암호가 아니라, 지금의 권력을 다시 보게 하는 눈이다. 땅에서 빛나는 제국이 하늘의 법정에서는 생명을 삼키는 짐승으로 드러날 수 있다.
다니엘과 친구들의 저항은 더 큰 짐승이 되어 맞서는 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불가마와 사자 굴 앞에서도 사람의 얼굴을 잃지 않았다. 다니엘은 자신을 포로로 끌고 온 왕에게도 정의를 행하고 가난한 이들을 긍휼히 여기라고 권했다(단 4:27). 그가 지킨 것은 몇 가지 종교적 규칙이 아니라, 짐승의 시대에 사람으로 남는 일이었다.
1장의 식탁은 그 긴 저항의 첫 연습이었다. 작은 음식 앞에서 내린 결정은 훗날 거대한 신상 앞에서도 절하지 않는 몸으로 이어진다. 아무도 보지 않는 식탁에서 빚어진 사람이 모든 사람이 지켜보는 광장에서 드러난다. 사자 굴 앞에서 갑자기 용감해지는 사람은 없다.
용기는 하루아침에 생기지 않는다.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거절했는지, 누구 앞에서 마음을 낮추었는지가 몸의 기억으로 쌓인다. 그리고 두려움이 모든 것을 흔드는 날, 그 기억이 사람을 붙든다.
다니엘과 친구들은 세상 밖으로 달아나지 않았다. 왕궁에 남아 나라의 일을 맡았지만, 제국이 정한 인간의 기준에 자신을 내주지는 않았다. 왕은 그들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려 했으나, 그들은 오히려 제국이 잃어버린 양심이 되었다.
다니엘서 1장은 짧은 문장으로 끝난다. “다니엘은 고레스 왕 원년까지 있으니라”(단 1:21). 느부갓네살도, 벨사살도, 바벨론도 사라졌지만 다니엘은 남았다. 제국이 붙인 이름보다 그가 지킨 이름이 더 오래 남았다.
다니엘서의 첫 독자들도 이름을 빼앗기고 예배를 위협받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눈앞의 짐승 너머에 있는 보좌를 바라보았다. 역사는 왕의 달력으로 흐르는 듯했지만, 시간의 끝은 왕의 것이 아니었다.
다니엘서는 세상 밖으로 떠나라고 말하지 않는다. 제국의 말을 배우되 제국의 꿈만 꾸지 않고, 왕의 일을 맡되 왕을 하나님처럼 섬기지 않으며, 낯선 땅에서도 하늘을 잊지 말라고 한다. 그것이 다니엘서가 남기는 믿음의 자리다.
책을 다시 펼치면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에워싸고 있다. 모든 것이 그의 손에 넘어간 듯하다. 그러나 바로 다음 절에서 역사의 주어가 바뀐다.
“주께서.”
제국은 성을 무너뜨리고, 이름을 바꾸고, 식탁을 차리며, 짐승의 얼굴로 시대를 뒤덮을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과 역사의 끝까지 차지할 수는 없다.
왕들은 지나가고 제국도 무너진다. 끝내 남아 다스리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 존 J. 콜린스는 다니엘서를 유대 묵시문학의 역사와 장르 안에서 읽고, 캐럴 A. 뉴섬은 궁정 이야기와 묵시 환상을 문학적·신학적으로 함께 해석한다. 아나테아 포르티어영은 이 묵시적 상상력을 제국의 폭력에 맞서는 저항의 신학으로 조명한다. 이들의 연구가 보여 주듯, 다니엘서는 미래의 날짜를 계산하게 하는 책이 아니라 제국이 전부인 듯한 시대에 그 너머의 보좌를 바라보게 하는 책이다.
다니엘서의 문장
제국은 이름을 바꿀 수 있어도, 하나님께 붙들린 마음은 바꾸지 못한다.
조원태 목사 / <뉴욕우리교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