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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재글 조원태목사의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 건넘, 상실의 강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첫발을 내딛는가 (뉴스앤조이)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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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media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6회   작성일Date 26-02-21 21:31

    본문

    건넘, 상실의 강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첫발을 내딛는가

    •  

    조원태목사의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

    여호수아 1:1-9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의 수종자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과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그 땅으로 가라...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여호수아 1:1–2, 5–9)

     

    이름이 멈춘 자리

    여호수아서는 죽음으로 시작한다. 서두에 놓인 소식은 전진 명령이 아니라 부고다.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이 문장은 단순한 세대교체의 신호가 아니다. 한 인물이 사라졌다는 사실보다, 한 시대를 지탱하던 언어와 리듬이 끝났음을 알리는 문장이다. 이 책은 새로운 땅의 지도를 펼치기 전에, 먼저 비어 있는 자리를 우리 앞에 고요히 내놓는다.

    왜 여호수아서는 이렇게 시작할 수밖에 없었을까?

    약속의 땅이 눈앞에 있다면, 기대와 전략, 미래의 설계도로 문을 열어도 충분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의도적으로 상실을 먼저 놓는다. 여호수아의 이야기는 ‘정복의 서사’이기 전에, 계승의 불안과 공백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모세의 죽음은 한 지도자의 퇴장이 아니라, 익숙했던 세계의 방식 전체가 막을 내렸음을 뜻한다. 이제 이스라엘은 더 이상 ‘모세가 있는 세계’로 돌아갈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상실 자체보다, 그 뒤에 이어지는 침묵이다. 누구도 서둘러 그 공백을 메우지 않는 시간. 방향이 정해지지 않은 채, 다만 서 있어야 하는 그 자리 말이다.

    상실을 아는가. 한때 우리를 붙들어 주던 존재가 문득 사라지는 경험 없이, 삶을 온전히 말할 수 있을까. 앞서 죽음으로 들어간 이의 평안은 남겨진 자의 불안을 곧바로 잠재우지 않는다. 오히려 그 고요함 때문에, 살아 있는 자는 더 또렷한 공백과 마주하게 된다.

    모세 이후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즉각적인 지시는 없다.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서둘러 움직이게 하지 않는다. 먼저 이 공백을 견디게 하신다. 지도자가 사라진 자리, 길을 가르던 목소리가 멈춘 자리에서 그는 기다리며 서 있다.

    이 문지방에 선 사람은 아직 아무것도 건너지 못했다. 다만 서서, 건너야 할 강을 마주할 뿐이다.

    강은 앞에 있고, 사람들은 뒤에 있다. 여호수아는 명령을 받기 전에 먼저 서 있어야 했다. 서 있다는 것은 주저함이 아니라 직면이다. 지금까지 의지하던 이름이 더 이상 불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상실을 통과하지 않은 채로는 누구도 강을 건널 수 없다. 그래서 여호수아서의 첫 장면은 이동이 아니라 정지이고, 행동이 아니라 인식이다. 모든 건넘은 이렇게, 먼저 서 있음에서 시작된다. 

     

    함께 있으리라는 말

    여호수아서의 서문은 ‘하라’는 말로 시작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먼저 ‘함께 있겠다’고 말한다.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으리라.” 이 문장은 여호수아에게 주어진 첫 전략이 아니라, 그가 딛고 설 첫 지반이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보다, 누구와 함께 서 있는지가 먼저 분명해진다. 여호수아 1장에서 반복되는 어휘는 용기보다 관계다. 담대함이 요구되지만, 그것은 개인의 결단이나 성격, 리더십의 자질에서 나오지 않는다. 떠나지 않겠다는 동행의 약속이 담대함의 근거가 된다. 약속은 여호수아를 영웅으로 만들어 세우기 위한 수사가 아니다.

    그는 모세의 빈자리를 메우는 대체자가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그러나 같은 이야기를 이어갈 사람이다. 그래서 이 책의 첫 명령은 땅을 차지하라는 지시가 아니라,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라”는 요청으로 주어진다. 여호수아는 정복자가 되기 전에 먼저 독자가 된다. 앞서 이끄는 사람이라기보다, 이미 주어진 말씀 앞에 오래 머무는 사람이다. 그의 리더십은 칼보다 먼저, 성취보다 먼저, 말씀과 맺는 관계에서 시작된다.

    이 지점에서 여호수아서의 서문은 책 전체의 숲을 비로소 드러낸다.

    이후 여호수아가 보여 줄 결정과 행동은 개인적 카리스마의 산물이 아니다. 그것은 이 약속과 이 말씀이 허락한 지평 안에서만 가능해진다. 그는 언제나 ‘함께하심’이라는 반경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의 용기와 선택은 독립된 영웅의 의지가 아니라, 동행의 약속에 뿌리를 둔 응답이다. 

    이 서문은 아직 펼쳐지지 않은 장면들 위로 먼저 빛을 기울인다. 여호수아서 24장에 이르기까지 이어질 이야기의 윤곽이 이미 이 첫 문장 속에서 방향을 잡는다.

    여리고 성보다 먼저 요단강이 등장하고(3–4장), 전투보다 먼저 발을 내딛는 장면이 놓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제사장들의 발이 물에 잠길 때에야 길이 열리고(3:13–17), 백성은 강 한가운데서 열두 돌을 들어 올린다(4:1–7). 이 책의 서사는 언제나 싸움 이전에 건넘을 배치한다. 승리는 돌파의 결과가 아니라, 신뢰의 한 걸음 이후에 주어진다. 

    이 배열은 여호수아서가 무엇을 진짜 문제로 삼는지를 드러낸다. 그의 싸움은 무력의 문제가 아니라 방향의 문제다. 무엇을 이길 것인가보다, 어디를 향해 서 있는가가 먼저 묻힌다. 그는 적과 맞서기 전에 먼저 강 앞에 선다. 그리고 그 강은 길을 가로 막는 장애물이 아니라, 우리가 누구를 믿고 서 있는지를 드러내는 시금석이다.

    그래서 강은 여호수아서에서 단순한 지형이 아니다. 그것은 적보다 먼저 마주해야 할 경계이며, 약속을 신뢰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몸으로 통과하게 하는 자리다. 

     

    건너야 할 강

    여호수아를 요약하는 말로 흔히 ‘사명’이 선택된다. 그러나 그 단어만으로는 이 책의 결을 충분히 담아내지 못한다.

    이 서문이 드러내는 중심은 임무보다 이동이다. 여호수아에게 맡겨진 것은 특정한 역할을 완수하라는 과제가 아니라, 한 경계를 통과하라는 요청이다. 그래서 이 책의 핵심어는 ‘사명’보다 ‘건넘’에 가깝다. 사명이 도달해야 할 목표를 전제하는 언어라면, 건넘은 아직 윤곽이 선명하지 않은 길까지 품는다. 사명은 성취를 향해 달려간다면, 건넘은 먼저 방향을 묻는다.

    여호수아 1장은 아직 요단강을 건너지 않는다. 바로 그 지점에서, 이 책은 이미 우리를 강가에 세워 둔다. 

    그러나 서문의 모든 문장은 이미 강을 향해 서서히 기울어 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구체적인 전술을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한 문장만 남긴다. “일어나 건너라.” 길의 세부는 설명되지 않는다. 이 서문이 던지는 질문은 단순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다. “무엇을 이룰 것인가”가 아니라, “불확실한 경계 앞에서 어디로 몸을 옮길 것인가.”

    이때 건넘은 결단의 구호가 아니라 신뢰의 형식이 된다. 발을 내딛기 전에는 강바닥이 보이지 않는다. 물은 흐르고, 흙탕물은 시야를 가린다. 그럼에도 한 걸음은 내딛어야 한다.

    그러나 여호수아서가 말하는 믿음은 길이 또렷해진 뒤에야 걷는 확신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경계 앞에서도, 함께하겠다는 약속을 근거로 몸을 맡기는 신뢰다. 그래서 이 서문에는 아직 기적도, 승리도 등장하지 않는다. 화려한 돌파 대신, 조용한 약속만이 놓여 있다. 

    그럼에도 이 첫 장의 언어는 이후 반복될 장면들을 미리 불러온다. 여리고 성은 함성보다 순종으로 무너지고(6:15–20), 땅은 약탈의 전리품이 아니라 기업으로 나뉘며(13:1, 21:43–45), 마지막 장에서 여호수아는 다시 선택을 요구한다.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24:15). 

     

    다만 방향만 남겨 둔다.

    오늘 이 책을 펼치는 우리 또한 하나의 문지방에 서 있다. 아직 건너지 않았지만, 이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자리. 우리는 그 경계 위에서 다음 장을 머뭇거린다.

    불안정한 노동의 조건 속에서, 인공지능이 일의 구조를 재편하고 기후 위기가 일상의 계절을 바꾸며, 전쟁과 난민의 이동이 국경의 의미를 흔드는 시대 속에서 우리는 자주 길을 잃는다. 디지털 알고리즘이 여론을 분절시키고, 민주주의의 신뢰가 균열을 드러내며, 다음 세대는 이전 세대의 언어로는 설명되지 않는 세계를 살아간다. 무엇을 더 갖추어야 하는지, 어떤 기술을 익혀야 살아남을 수 있는지, 어디에 속해야 안전한지 묻는다. 

    그러나 여호수아서의 서문은 질문의 방향을 조금 비틀어 놓는다. 무엇을 준비할 것인가가 아니라, 지금 나는 어떤 경계 앞에 서 있는가를 묻게 한다.

    익숙했던 시기가 끝나고, 이전의 언어가 더 이상 충분하지 않은 순간이 있다. 한때 우리를 설명해 주던 문장들이 힘을 잃고, 오래 붙들어 왔던 확신이 낡아 버리는 때. 우리는 그 자리에서 본능처럼 묻는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어떻게 다시 증명해야 하는가.

    그러나 여호수아서는 우리가 익숙하게 던지던 질문 자체를 다시 배열한다. ‘내가 해야 할 일’이 아니라 ‘내가 지나야 할 자리’를 먼저 보게 한다. 무엇을 성취할 것인가보다, 무엇을 건너야 하는가가 삶의 다음 장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성취는 결과이지만, 건넘은 존재의 방향이다. 그리고 그 방향이 정해지는 순간, 이야기는 이미 새 장으로 넘어가기 시작한다.

    여호수아서의 서문은 아직 강을 가르지 않는다. 대신 우리를 그 앞에 세워 둔다. 물은 흐르고, 길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바로 그 정지의 장면 속에 이 책 전체의 숨결이 응축되어 있다. 요단 도하(3–4장), 여리고의 붕괴(6장), 땅의 분배(13–21장), 마지막 선택의 고백(24장)까지—모든 장면이 이미 이 첫 멈춤 안에서 방향을 얻는다.

    이 서문은 우리를 재촉하지 않는다. 오래 서 있게 한다. 성급한 돌파 대신, 서 있는 자리의 의미를 묻게 한다. 어디로 갈 것인가보다,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를 먼저 돌아보게 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더 정교한 계획이 아니라, 첫발을 내딛을 만큼의 신뢰라는 것. 강은 갈라진 뒤에 건너는 곳이 아니라, 건너려는 발 앞에서 비로소 길이 되는 자리라는 것.

    이 책을 다시 펼치는 순간, 우리는 이미 강가에 서 있다.

     

    ※ 최근 여호수아서 연구는 이 책을 단순한 ‘정복 연대기’로 보지 않는다. 고고학적 재검토와 문헌비평, 편집사적 연구를 거치며 학자들은 여호수아서를 전쟁 보고서라기보다, 이스라엘의 기억과 신앙을 조직하는 신학적 역사 서사로 이해해 왔다. 특히 이 책을 신명기적 역사서(신명기–여호수아–사사기–사무엘–열왕기)의 한 고리로 읽을 때, 여호수아서는 약속의 완결을 선포하는 종착점이 아니라, 성취 이후에 드러나는 순종과 불순종의 긴장을 예고하는 문턱으로 자리한다.

    이 관점에서 여호수아 1장은 군사적 출정식이라기보다 공동체 정체성의 재정립에 가깝다. 땅은 ‘주어졌다’고 선언되지만, 그 땅을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는 이후 역사 전체를 관통하는 질문으로 남는다. 그래서 최근 해석은 여호수아서를 성공 서사로 축소하지 않고, 경계 위에 선 공동체가 자신을 어떻게 이해하고 기억할 것인가를 묻는 텍스트로 읽는다. 강을 건넜다는 사실보다, 건넌 이후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가 더 중요하다는 통찰이다.

    이러한 읽기는 이 글이 시도해 온 문지방의 관점과도 맞닿아 있다. 여호수아는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며, 도착이 아니라 통과의 서사다. 고대 이스라엘이 그러했듯, 오늘의 독자 역시 이 책 앞에서 질문하게 된다. 우리는 이미 무엇을 건너왔는가. 그리고 지금, 어떤 경계 앞에 서 있는가.

    조원태 목사 / <뉴욕우리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