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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재글 조원태 목사의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 기억, 기억을 들고 건너야 할 사람들에게 (뉴스앤조이) 2026-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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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media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5회   작성일Date 26-02-21 21:30

    본문

    기억, 기억을 들고 건너야 할 사람들에게

    •  

    조원태목사의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

    신명기 1:1-8
    “이는 모세가 요단 저쪽 숩 맞은편의 아라바 광야….에서 이스라엘 무리에게 선포한 말씀이니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호렙 산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여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 산에 거주한 지 오래니 방향을 돌려 행진하여… 내가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들과 그들의 후손에게 주리라 한 땅이 너희 앞에 있으니 들어가서 그 땅을 차지할지니라” 

     

    건너기 전, 돌아봄

    강을 건너기 직전, 사람은 본능적으로 속도를 높인다. 그러나 신명기는 그 긴박한 순간에 발을 붙잡는다. 앞으로가 아니라, 뒤를 보라고 말한다. 승리의 열기와 기대가 가득한 순간에 오래된 말을 꺼내 들며 묻는다. 무엇을 기억한 채 건너려 하는가. 이 책은 돌진으로 시작하지 않는다. 멈춤, 그리고 기억으로 시작한다.

    그래서 신명기는 ‘다시 말해지는’ 책이다. 한 번 지나간 말과, 한 번 넘어졌던 자리와, 이미 건너온 시간이 다시 불려 나온다. 흘려 보냈다고 여겼던 시간이 새로운 의미를 입고 돌아온다. 이 서문은 출발을 재촉하지 않는다. 걸음을 늦추며 묻는다. 우리는 무엇을 기억한 채 여기까지 왔는가. 무엇을 쉽게 잊은 채 오늘의 자리에 서 있는가.

    이 책의 결은 첫 문장부터 또렷하다. “이는 모세가 … 선포한 말씀이니라”(1:1). 신명기는 장대한 사건이나 극적인 전투로 막을 올리지 않는다. 말, 곧 설교로 시작한다. 그것도 젊은 지도자의 선언이 아니라, 생의 끝자락에 선 노인이 시간을 되짚어 건네는 마지막 증언이다. 새로운 정보가 아니라 이미 들었던 이야기들. 그러나 그 반복이야말로 이 책의 의도다.

    이 설교가 울려 퍼진 때를 보라. 광야 사십 년째, 열한째 달 첫째 날(1:3). 시혼과 옥을 꺾은 직후(1:4). 공동체는 드디어 해냈다는 감각에 젖어 있었다. 보통이라면 업적을 기념하고 다음 전투를 준비할 순간이다. 하지만 모세는 자신의 공을 열거하지 않는다. 승전보 대신 하나님의 말씀을 꺼낸다. 승리의 열기 한복판에서 그는 기억부터 바로 세운다. 

    그래서 이 설교는 삶의 좌표를 다시 찍는다. “너희가 이 산에 거주한 지 오래니… 방향을 돌려 길을 떠나라”(1:6–7). 이 말은 익숙함이라는 안개를 걷어내는 선언이다. 오래 머문 자리는 편안해 보이지만, 그 편안함 속에서 길은 서서히 감각을 잃는다. 신명기는 발을 떼기 전에, 먼저 시선을 돌리게 한다. 어디로 갈 것인가, 무엇을 붙든 채 갈 것인가.

    요단 저편, 모압 광야. 강 하나만 건너면 약속의 땅이다. 긴장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책은 전열을 가다듬는 군사 전략을 보여주지 않는다. 함성도, 진군도 없다. 모세는 그 자리에서 율법을 풀어 말한다(1:5). 건너기 직전, 그는 서두르지 않는다. 앞으로 나아가기 전에, 그는 지난 시간을 해석하게 한다. 

    이 설정은 우연이 아니다. 신명기는 도착 직전의 순간에 행동보다 의미를 앞세운다. 들어가기 전에 묻는다. 무엇을 품은 채 들어갈 것인가. 무엇을 놓친 채 서둘러 가려 하는가. 이 책은 속도를 재촉하지 않는다. 방향을 다시 가늠하게 한다. 

    이 장면은 낯설지 않다. 우리는 늘 다음 단계, 다음 기회를 말한다. 더 멀리, 더 높이를 향해 시선을 던지지만, 정작 지금 서 있는 자리를 깊이 들여다보는 데에는 서툴다. 어디에서 시작했는지, 무엇이 우리를 여기까지 이끌었는지는 쉽게 흐릿해진다. 신명기는 그 희미해진 자리에 빛을 비춘다. 멈추게 하고, 다시 묻게 한다. 지금의 나는 무엇을 기억한 채 서 있는가.

     

    기억은 선택을 만든다

    신명기의 히브리어 이름은 ‘데바림’(말씀들)이다. 이 책은 사건이 아니라 말로 문을 연다. 그래서 신명기는 신약에서 가장 자주 인용되는 구약이 되었고, 예수 역시 광야에서 이 책의 말씀으로 유혹을 물리쳤다(마 4:1–11). 신명기는 흩어진 말씀을 모아 흘려보내는 수원지와 같다. 말씀의 물길이 마를 때마다, 공동체는 이 책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여기의 말씀은 ‘새로움’보다 ‘다시 말함’에 가깝다. 신명기는 집요하게 요청한다. “기억하라”(5:15; 7:18; 8:2). 그리고 경고한다. “잊지 말라”(6:12; 8:11). 이 책이 경계하는 것은 단순한 불순종이 아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상태다. 기억이 흐려지면 분별은 무뎌지고, 방향은 서서히 틀어진다.

    성경에서 기억은 과거를 보관하는 창고가 아니다. 현재를 빚는 힘이다. 신명기는 기억을 머리에만 두지 말라고 한다. 마음에 새기고(6:6), 몸에 매며(6:8), 일상의 리듬 속에서 되뇌라고 한다(6:7). 그렇게 반복된 기억이 태도를 만들고, 태도가 선택을 낳는다. 윤리는 외부의 규칙이 아니라, 기억이 길러낸 삶의 결이다. 

    광야의 실패도 같은 자리로 모인다. 길을 몰라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잊었기 때문이다(8:14). 은혜의 기억이 옅어질 때 힘은 공로로 둔갑하고, 인간은 자신을 구원자의 자리에 올려 놓는다(8:17). 

    그때 가장 먼저 사라지는 것은 약자의 얼굴이다. 그래서 신명기는 거듭 상기시킨다. “너희도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5:15). 기억은 개인의 경건을 넘어 공동체의 기준이 된다. 출애굽의 기억이 흐려질수록 타인의 고통은 ‘남의 일’로 밀려난다. 그러므로 신명기의 기억은 사회적 감수성을 지탱하는 뿌리다. 

    오늘도 다르지 않다. 우리는 성취는 부풀리고 상처는 지운다. 신명기는 그 삭제된 기억을 다시 불러낸다. 그리고 묻는다. 그 망각의 값을 이미 한 세대가 치르지 않았는가.

    바로 그 질문의 자리에서 신명기는 한 장면을 더 떠올리게 한다. 모세는 꾸짖되 끊어내지 않는다. 금송아지 사건 앞에서 고발자가 아니라 백성의 대변인으로 선다. 죄를 직면하게 하면서도 사람을 포기하지 않는다. 책망이 파괴가 되지 않으려면, 그 바닥에는 함께 걸어온 시간의 기억이 놓여 있어야 한다. 신명기의 기억은 그래서 감상도 기록도 아니다. 공동체를 다시 묶어 살리는 윤리의 기술이 된다.

     

    강보다 깊은 것

    신명기의 서문은 하나의 질문으로 우리를 붙든다. 우리는 무엇을 기억한 채 강을 건너려 하는가. 기억은 고정된 기록이 아니라 매번 다시 엮이는 이야기다. 우리는 그 이야기를 통해 자신을 해석하고, 앞으로의 선택에 의미를 부여한다. 결국 무엇을 기억하느냐는 어떤 사람이 되기를 선택하느냐의 문제다. 

    그러나 우리는 앞을 향해 달릴 때 과거를 단순화한다. 성취는 부각하고 실패는 축소한다.  신명기는 그 가속을 멈춘다. 잘해낸 장면만이 아니라 주저앉았던 자리와 그때의 배움까지 함께 품고 가라고 권한다. 지워버렸다고 믿는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른 얼굴로 되돌아와 다시 길목에 선다. 

    그래서 신명기는 멈춤을 요청한다. 건너기 전에 돌아보라고 한다. 그 기억은 감상이 아니라 검증이다. 우리는 누구였는가. 어디에서 흔들렸는가. 무엇을 놓친 채 여기까지 왔는가.  이 질문을 거치지 않은 결단은 오래 버티지 못한다. 신명기의 긴 설교는 바로 이 검증을 돕기 위해 반복된다.

    이 요청은 삶의 자리에서 구체적이 된다. 기억은 회고에 머물지 않고 실천으로 이어진다. 다시 말하고, 다시 기록하고, 다시 해석하는 일. 고통을 언어로 붙드는 순간 우리는 사건에 휘둘리는 존재가 아니라 그 의미를 가늠하는 주체가 된다. 그때 기억은 상처에 머물지 않고 방향이 된다.

    그러므로 신명기의 반복은 장황함이 아니다. 공동체의 기억을 단련하는 방식이다. 같은 이야기를 거듭 말하는 까닭은 잊지 않기 위해서이며, 왜곡되지 않게 위해서다. 그 과정을 통과할 때 기억은 운명이 아니라 선택이 된다.

    우리는 더 빠르게, 더 강하게를 외치며 앞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신명기는 속도 대신 질문을 남긴다. 우리는 누구였는가. 어디에서 종이었는가. 무엇이 우리를 여기까지 이끌었는가. 이 물음을 통과할 때에야 선택은 무게를 얻고, 결단은 책임을 품는다.

    신명기는 쉽게 답을 주지 않는다. 다만, 질문 앞에 우리를 세워 둔다. 

    그리고 마침내 선택을 말한다. 그러나 그 선택은 허공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생명과 복… 사망과 화”(30:15)는 오랜 기억 위에 놓인 갈림길이다. 그래서 신명기는 끝에 덧붙은 율법이 아니라, 언제나 다시 펼쳐야 할 첫 책이다. 강을 건너기 전마다 다시 펼치게 되는 책이다. 

    마지막으로 남는 물음은 이것이다. 지금의 나를 만든 기억은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지운 채 앞으로 가려 하는가. 

    ※ 최근 신명기 연구는 이 책을 단순한 ‘율법 요약’이나 ‘두 번째 율법’으로만 보지 않는다. 모셰 바인펠드와 에카르트 오토로 대표되는 연구는 신명기를 법전이라기보다 설교 형식을 띤 언약 문서, 곧 공동체의 정체성을 재구성하는 텍스트로 이해해 왔다. 고대 근동 조약 문서와의 비교 역시 신명기를 규범의 나열이 아니라 관계를 갱신하는 언약 구조 속에서 읽게 했다. 또한 다수의 학자들은 이 책이 포로기 전후의 역사적 격변 속에서 편집·재구성되었을 가능성에 주목하며, 그것을 공동체 기억의 신학적 재배열로 해석한다.  이러한 연구 흐름 속에서 버나드 레빈슨과 토마스 뢰머는 신명기를 윤리적 상상력을 형성하는 텍스트로 읽는다. 반복되는 설교와 회상은 장황함이 아니라, 각 세대가 자신을 다시 규정하도록 요구하는 장치다. 이런 연구 지형에서 볼 때, 신명기의 서문은 단순한 도입이 아니라 공동체가 스스로에게 던지는 첫 질문으로 이해될 수 있다.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며 여기까지 왔는가. 그리고 무엇을 기억한 채, 이제 어디로 건너가려 하는가.

    조원태 목사 / <뉴욕우리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