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글 조원태목사의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 안개, 사라지는 것들 사이에 남는 지혜 (뉴스앤조이) 6-4-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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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사라지는 것들 사이에 남는 지혜
조원태목사의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
이번에는 성서 66권 각 책의 서문(Threshold, 문지방 텍스트)을 따라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새로운 연재『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로 다시 시작합니다.
이 시리즈는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라는 주제로 출발합니다. 특정 책의 프롤로그 분석을 넘어, 성경 전체의 첫 문장을 따라 걸어가는 실험적 글쓰기로서 목회와 문학, 신학을 잇는 연재가 될 것입니다.
연재의 서막을 여는 글은 프롤로그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소개되며, 이후 매주 성경의 서로 다른 현관을 열어갈 예정입니다.
이 연재가 독자들의 시야를 넓히고 성서를 다시 ‘시작의 자리’에서 읽게 하는 영적 초대가 되리라 믿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성경의 전체적인 가르침이 다시금 생생하게 느껴지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 편집자 주 -
전도서 1:1–11
1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2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3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4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8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 9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 11 이전 세대들이 기억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들과 함께 기억됨이 없으리라

새벽의 유리창이 희미해진다. 밤새 따뜻했던 방 안의 숨과 차가운 바깥 공기가 만나면, 창에는 얇은 안개가 내려앉는다. 손가락으로 이름 하나를 쓰면 잠시 선명해진다. 그러나 곧 흐려진다. 글자는 사라지고, 손끝에는 축축한 감각만 남는다. 붙잡았다고 생각했는데, 붙잡힌 것은 없다.
전도서는 그 흐려진 창문 앞에서 시작된다. 우리가 밤새 붙들고 살았던 이름들, 성공과 평판, 자리와 기억, 계획과 사랑과 수고가 아침빛 속에서 조금씩 희미해진다. 분명히 남아 있을 것 같던 것들이 어느새 윤곽을 잃는다. 도시는 다시 환하게 켜지고, 사람들은 커피를 들고 지하철 계단을 내려간다. 화면 속 숫자와 소식은 또 하루를 새것처럼 포장한다.
그러나 마음 한쪽에서는 오래된 질문이 김처럼 올라온다. 이렇게 멀리 움직였는데, 나는 어디에 이르렀는가? 이렇게 많이 보았는데, 왜 눈은 아직 차지 않는가? 이렇게 많이 들었는데, 왜 귀는 여전히 비어 있는가?
우리는 전도서를 고대인의 우울한 독백으로만 읽을 수 없다. 이 책은 과잉의 시대에 더 날카롭게 들린다. 새 물건과 새 소식, 새 목표가 어제의 삶을 밀어내는데도 마음은 자주 허기지다. 이 책은 오래되었으나 가장 현대적인 질문을 꺼낸다. 이렇게 많이 보고, 이렇게 많이 듣고, 이렇게 많이 수고하는데, 무엇이 우리 안에 정말 남는가?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이 책은 가장 높은 자리에서 시작된다. 왕의 자리, 예루살렘의 이름, 다윗의 계보가 첫머리에 함께 놓인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들려오는 첫 고백은 승리의 선언이 아니다. 성공의 비결도 아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2)
이 말은 삶을 포기한 사람의 한숨처럼 들리기 쉽다. 그러나 그의 말은 단순한 염세가 아니다. 그는 세상을 미워한 사람이 아니라, 끝까지 들여다본 사람이다. 웃음과 수고, 사랑과 늙음과 죽음을 지나 마침내 말한다.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전도자가 반복하는 말은 히브리어로 ‘헤벨’이다. ‘헤벨’은 “헛되다”로 옮겨지는 말이지만, 그 깊은 곳에는 숨, 김, 안개처럼 눈앞에 있으나 붙잡히지 않고, 잠시 보이다가 이내 사라지는 삶의 감각이 놓여 있다.
눈앞에 있으나 움켜쥘 수 없고, 잠시 보이다가 이내 사라지는 것. 전도서는 인생이 아무 가치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이 인생을 자기 손 안에 완전히 넣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 첫 장면에는 ‘안개’가 놓여 있다. 안개는 공허의 표지가 아니라 한계의 표지다. 이 지혜서는 인생을 깎아내리지 않는다. 도리어 붙잡는 손을 펴게 하고, 성취의 언어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삶의 깊이 앞에 우리를 세운다.
이 첫 문지방에는 전도서 전체의 숲이 이미 접혀 있다. ‘헤벨’이라는 안개, ‘해 아래’라는 자리, ‘수고’라는 현실, ‘무엇이 유익한가’라는 질문, ‘피로’라는 시대의 증상이 여기서 처음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 물음들은 끝까지 이어져, 마침내 하나님 앞에서 하루를 선물로 받는 지혜에 닿는다.
잠언이 지혜의 저울을 놓았다면, 전도서는 그 저울 위에 올린 것들마저 안개처럼 빠져나가는 순간을 보게 한다. 잠언은 질서의 지혜를 말하고, 전도서는 질서만으로 다 설명되지 않는 세계의 틈을 말한다. 둘은 서로를 무너뜨리지 않는다. 함께 있어야 더 깊어진다.
이 문지방을 넘어서면 길은 넓게 펼쳐진다. “무엇이 유익한가”라는 질문은 지혜와 쾌락, 부와 정의, 시간과 죽음 앞에서 되돌아올 것이다. “해 아래”라는 말은 인간이 살아가는 현실의 자리를 가리킨다. 그리고 그 자리마다 먹고 마시며 수고 중에 낙을 누리라는 작고 반복적인 초대가 놓인다.
그러나 그 초대는 쾌락주의가 아니다. 안개 같은 삶을 붙잡으려는 손을 내려놓고, 하나님이 주시는 하루를 선물로 받으라는 낮고 깊은 지혜다.
해 아래의 첫 문장
전도자는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이라는 이름으로 말한다. 솔로몬의 그림자가 문 앞에 드리워져 있다. 성전의 흰 돌은 햇빛에 빛났고, 왕궁에는 먼 나라의 향료와 백향목 냄새가 배어 있었을 것이다. 항구에는 젖은 밧줄 소리가 들리고, 은과 금과 상아가 예루살렘의 문턱으로 밀려들었다. 솔로몬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능성의 꼭대기에 선 이름이었다.
그런데 이 책은 바로 그 꼭대기에서 인생을 묻는다. 손에는 금의 차가움이 닿고, 귀에는 찬사가 울리며, 눈앞에는 궁전의 빛이 가득한 자리에서 “모든 것이 헛되다”는 말이 들려온다. 아무것도 가져 보지 못한 사람의 말이라면 패배자의 한숨으로 밀어낼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을 가져 본 자리에서 같은 말이 흘러나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전도서는 결핍의 탄식이 아니라, 과잉의 한복판에서 문득 손바닥의 빈 감각을 알아차린 사람의 질문이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인생이 더 선명해질 것 같지만, 때로는 더 짙은 안개가 보인다. 더 멀리 보이기 때문이다. 성공의 바깥, 소유가 채우지 못한 빈자리, 이름마저 언젠가 먼지처럼 흐려진다는 사실이 그곳에서 보인다.
그는 바로 그 높은 자리에서 낮은 말을 한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전 1:3). 여기서 “유익”은 단순한 이익이 아니다. 손에 쥔 것이 식고, 귀에 남은 박수가 사라지고, 시간과 죽음이 모든 이름 위를 지나간 뒤에도 끝까지 남는 것을 묻는 말이다. 그는 묻는다. 이렇게 많이 애쓰는데, 무엇이 정말 남는가?
이 질문은 고대의 질문이지만 낡지 않았다. 오늘의 세계는 수고를 눈부시게 포장한다. 새벽마다 알람이 울리고, 화면에는 일정이 촘촘히 켜지며, 손끝은 끝없이 무엇인가를 저장하고 전송한다. 자기계발, 성과, 생산성, 영향력, 브랜딩, 성장이라는 말들이 도시의 전광판처럼 우리 눈앞을 지나간다. 경력과 기록, 관계와 데이터가 층층이 쌓인다. 심지어 쉼마저 더 나은 성과를 위한 기술이 된다.
그러나 이 낮은 목소리는 그 분주한 발소리 한가운데서 묻는다. 무엇이 남는가? 이 물음은 게으름의 초대도, 냉소의 허락도 아니다. 땀의 냄새와 손바닥의 굳은살, 하루 끝 어깨에 내려앉는 무게를 아는 질문이다. 수고가 삶을 지탱한다는 것을 알기에, 그 수고가 우리를 살리는지, 아니면 더 깊이 피곤하게 만드는지 묻는다.
코헬렛은 “해 아래”라는 말을 즐겨 쓴다. 그것은 하나님의 하늘이 사라진 무신론의 공간이 아니다. 햇빛 아래 땀을 훔치며, 계산서와 진단서와 판결문을 받아드는 현실의 자리다. 해 아래에는 밥벌이의 냄새, 갓난아이의 울음, 장례식장의 침묵, 억울한 판결 앞에서 마른입술을 깨무는 사람들이 있다. 이 책은 그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다. 신앙의 이름으로 땅을 건너뛰지 않고, 먼지 묻은 자리에서 끝까지 묻는다. 여기서, 지금, 이 수고 속에서, 무엇이 사람을 살리는가?
이 점에서 이 지혜서는 제국의 언어와 충돌한다. 제국은 늘 더 많은 것을 약속한다. 더 넓은 땅, 더 큰 시장, 더 빠른 기술, 더 안전한 권력, 더 오래 남을 이름. 깃발은 바람에 펄럭이고, 광장에는 승리의 함성이 번진다. 헬라의 도시와 체육관과 극장이 인간의 가능성을 찬양하던 시대에도, 오늘의 플랫폼과 알고리즘과 금융시장이 손끝의 욕망을 부풀리는 시대에도, 제국은 같은 목소리로 속삭인다. 더 가지면 산다고. 코헬렛은 그 말의 한가운데를 조용히 가른다. 안개라고.
이 말은 약한 사람을 주저앉히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강한 것처럼 보이는 것들의 껍질을 벗기는 말이다. 번쩍이는 금박을 손톱으로 긁어내면 그 아래의 낡은 나무결이 드러나듯, 그의 “헛되다”는 우상의 포장을 찢어 그 속의 빈 공간을 보게 한다. 그래서 이 책은 무력하지 않다. 오히려 위험하다. 돈과 권력과 성과가 쇠문처럼 단단해 보이는 세계에서, 그것들이 인간의 마지막 현실이 아니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세상을 미워하지 않는다. 다만 세상의 과장을 믿지 않는다. 삶을 사랑하지만, 삶을 소유하려는 교만은 신뢰하지 않는다. 그 첫 문장은 우리를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데려간다. 왕의 자리에서 안개의 자리로, 예루살렘의 이름에서 해 아래의 피로로, 지혜의 명성에서 손에 잡히지 않는 삶의 감각으로. 그 문지방을 넘는 사람은 더 이상 쉽게 말할 수 없다. 성공했다고 다 얻은 것도 아니고, 실패했다고 다 잃은 것도 아니다.
돌고 도는 것들의 피로
이 서문의 가장 선명한 장면은 멈추지 않는 세계다. 세대는 왔다가 사라지고, 해는 지평선 위로 떠올랐다가 저물녘 붉은 등을 보이며 다시 떠오를 자리로 서둘러 간다. 바람은 남쪽 들판을 스치다 북쪽 골짜기로 몸을 틀고, 강물은 밤낮없이 바다로 흘러가지만 바다는 끝내 차오르지 않는다. 모든 것이 움직이는데, 이상하게도 아무것도 끝나지 않는다.
전진처럼 보이던 움직임은 어느새 피곤한 순환이 된다. 그는 자연의 리듬을 바라보다가 인간의 영혼을 읽는다. 많이 움직였는데 어디에 이르렀는가? 쉬지 않고 흘러왔는데 무엇이 채워졌는가?
이 장면은 눈부신데, 이상하게 서늘하다. 해와 바람과 강물은 모두 생명의 움직임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의 눈에는 그 풍경 안에 지친 숨이 보인다.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전 1:8). 자연만 지친 것이 아니다.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도 지쳐 있다. 눈은 보아도 차지 않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않는다.
그가 본 비어 있음은 오늘의 우리와 놀라울 만큼 닮아 있다. 손가락 하나로 세계의 거의 모든 장면을 볼 수 있지만, 마음은 더 허기질 때가 많다. 정보는 넘치는데 지혜는 더디고, 자극은 많아졌는데 감각은 무뎌진다. 더 많이 본다고 더 깊어지지 않고, 더 빨리 듣는다고 더 잘 듣는 것도 아니다. 차지 않는 눈과 비어 있는 귀는 인간 안의 빈 공간을 드러낸다.
이 빈 공간을 채우려 사람은 계속 다른 것을 찾는다. 물건과 장소, 사람과 생각을 바꾸면 삶도 달라질 것이라 믿는다. 그러나 이 질문자는 다시 묻는다.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전 1:9). 이 말은 창조성과 변화를 부정하는 말이 아니다. 우리가 새것이라 부르는 것의 밑바닥에 오래된 욕망이 반복되고 있음을 보라는 말이다.
기술은 달라져도 욕망은 낡을 수 있고, 정치는 새 이름으로 오래된 권력욕을 반복하며, 종교의 언어마저 새 옷으로 자기 의를 감출 수 있다. 전도자는 새것의 표면을 걷어 내고, 그 아래 되풀이되는 인간의 마음을 본다.
그래서 이 책은 역사 앞에서도 냉정하다. “이전 세대들이 기억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들과 함께 기억됨이 없으리라”(전 1:11). 이 말은 잔인하지만 거짓은 아니다. 한때 세상을 흔든 이름도 시간이 지나면 각주가 되고, 어느 집안의 자랑이던 얼굴도 사진첩 속 낯선 사람이 된다. 오늘의 평판도 다음 세대의 무심함 앞에서는 쉽게 흐려진다.
그렇다고 기억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을 우상으로 만들지 말라는 뜻이다. 흔적을 남기려는 마음은 때로 죽음에 맞서는 작은 반란이다. 그러나 그는 묻는다. 그 이름도 안개라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여기서 이 책은 우리를 불편하게 한다. 우리는 대개 인생의 의미를 남긴 것에서 찾는다. 업적, 성취, 유산, 평가. 그러나 이 지혜서는 그것들을 하나씩 올려놓고, 안개처럼 흩어지는 모습을 보게 한다. 이것은 허무로 밀어 넣으려는 말이 아니다. 더 깊은 질문으로 이끄는 문이다. 만일 손에 남아야만 의미 있다면, 인생은 너무 가혹해진다. 사랑도 끝나고, 자녀도 내 소유가 아니며, 몸도 늙고, 공동체도 흔들린다. 우리가 만든 가장 좋은 일조차 언젠가 다른 사람의 손에 맡겨진다.
그러면 아무 의미가 없는가. 이 책은 쉽게 대답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를 더 깊은 자리로 데려간다. 의미는 소유와 같지 않다. 붙잡을 수 없다고 해서 무가치한 것은 아니다. 해가 지기 때문에 아침이 무의미한 것이 아니고, 꽃이 지기 때문에 꽃이 거짓인 것도 아니다. 음악은 끝나기 때문에 아름답고, 밥은 사라지기 때문에 나누어 먹는다.
안개는 바로 이 지점을 열어 준다. 인생은 소유물이 아니라 선물이다. 움켜쥘 때 망가지고, 받을 때 살아난다.
그 자연 이미지는 단순한 허무의 풍경이 아니다. 해와 바람과 강물은 인간보다 오래된 리듬을 보여 준다. 인간은 그 리듬을 지배하지 못한다. 다만 그 안에서 산다. 세대는 가고 오지만 땅은 남는다. 이 문장은 오늘 우리에게도 묻는다. 끊임없이 새것을 만드는 인간의 경제를 땅은 얼마나 견딜 수 있는가? 우리의 수고는 생명을 살리는가, 아니면 바다를 채우지 못하는 강물처럼 더 큰 허기를 만들고 있는가?
이 책은 사람을 해 아래에 세운다. 낮지만 필요한 자리다. 해 아래 서야 우리는 그늘을 알고, 흙 위에 서야 한계를 배운다. 그 한계를 아는 지혜만이 폭력적이지 않다. 그 한계를 아는 사랑만이 사람을 소유하지 않는다. 그 한계를 아는 신앙만이 하나님을 이용하지 않는다.
빈손에 남은 선물
오래전 사람들은 일식을 보려고 그을음 묻힌 유리 조각을 눈에 대었다. 맨눈으로 보면 눈을 다치지만, 검은 그을음을 통과하면 태양의 윤곽이 보였다. 전도서의 “헛되다”도 그런 그을음 같다. 어둡게 들리지만, 오히려 우리의 눈을 보호한다. 세상의 빛을 너무 직접 보면 우리는 쉽게 속는다. 빛나는 것을 영원한 것으로, 큰 것을 참된 것으로 착각한다. 전도자의 어두운 말은 우리로 하여금 눈부신 것들의 윤곽을 다시 보게 한다.
책의 마지막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전 12:13)라는 말로 닫힌다. 이것은 갑자기 붙은 경건한 표어가 아니다. 1장의 안개에서 시작된 길의 도착점이다. 모든 것이 빠져나간다는 사실 앞에서 인간은 비로소 하나님 앞에 선다. 경외는 내가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맑은 정신, 내 소유가 나를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 지혜다.
오늘 우리는 수많은 약속 속에 산다. 더 빠르게, 더 편리하게, 더 오래, 더 촘촘히 연결될 것이라는 약속이다. 그러나 이 책은 묻는다. 연결되어도 외롭고, 오래 살아도 두렵고, 많이 가져도 차지 않는다면, 무엇을 잃은 것인가?
이 질문은 한 개인에게만 머물지 않는다. 사회도 이 지혜서 앞에 서야 한다. 성장을 말하는 경제가 영혼을 닳게 하고, 안보를 말하는 정치가 이웃을 적으로 만들며, 발전을 말하는 기술이 땅과 가난한 이들의 숨을 빼앗는다면, 우리는 무엇을 새롭다 부를 수 있는가? "해 아래 새것이 없다"는 말은 시도를 멈추라는 뜻이 아니다. 새것이라는 이름으로 반복되는 오래된 탐욕을 보라는 뜻이다.
전도서는 우리를 가을의 자리로 데려간다. 가을은 풍성하지만, 동시에 내려놓는 계절이다. 열매가 익는다는 것은 나무가 무엇인가를 내려놓는다는 뜻이다. 잎은 아름답게 물들지만 곧 바닥에 눕는다. 그래서 이 책의 안개는 가을과 닮았다. 다 사라진다는 사실 때문에 허무한 것이 아니라, 사라지기 전에 무엇을 사랑해야 하는지를 묻게 한다.
젊은 날에는 이 책이 너무 어둡게 느껴질 수 있다. 아직 붙잡고 싶은 것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우리는 안다. 붙잡은 것들이 끝까지 나를 붙들어 주지는 못한다는 것을. 성공도, 인정도, 계획도, 관계도, 기억도 나를 다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을. 그때 이 책은 낡은 문헌이 아니라 이상하게도 가장 정직한 친구가 된다.
그 친구는 섣불리 위로하지 않고, 모든 것이 잘될 것이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다만 속도를 늦추게 한다. 사랑하는 것이 사라질 수 있기에 오늘 더 깊이 사랑하게 하고, 수고가 영원을 만들 수 없기에 그 수고를 감사의 자리로 돌려놓게 한다.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인생을 싫어하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인생을 다시 사랑하기 위한 거리를 얻는 일이다. 너무 가까이 붙잡으면 두려움에 가려 제대로 보지 못하고, 너무 멀리 밀어내면 상처받지 않을 수는 있어도 사랑할 수 없다. 이 지혜서는 우리를 그 사이에 세운다. 소유하지 않으면서도 누리고, 다 알지 못하면서도 경외하는 자리. 그 자리가 지혜다.
이 첫 장면에는 인간의 수고, 자연의 순환, 감각의 피로, 새것의 환상, 기억의 소멸, 그리고 하나님 앞에 서는 낮은 지혜가 접혀 있다. 이 문지방은 어둡지만 닫혀 있지 않다. 안개가 자욱해도 길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안개 때문에 우리는 더 조심스럽게 걷는다. 함부로 단정하지 않고, 쉽게 정죄하지 않으며, 지나치게 과장하지 않는다.
코헬렛은 인생의 결론을 빨리 주지 않는다. 대신 오래 남는 질문을 건넨다. 네가 붙잡고 있는 것은 정말 너를 살리는가. 너의 수고는 무엇을 남기는가. 그리고 마침내 묻는다. 너는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사람으로 살 것인가.
이 질문들 앞에서 우리는 성경을 다시 펼치게 된다. 전도서는 삶을 닫는 책이 아니라 다시 읽게 하는 책이다. 하나님을 쉽게 말하게 하는 책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쉽게 말하지 못하게 하는 책이다.
안개는 손에 잡히지 않는다. 그러나 안개 속에 선 사람은 길을 함부로 단정하지 않는다. 그 첫 문장 앞에서 우리는 멈춘다. 왕의 이름도 지나가고, 세대도 흘러가며, 해와 바람과 강물은 제 길을 간다. 그리고 한 사람이 묻는다. 무엇이 남는가?
그 질문이 불편하다면, 이미 문지방에 선 것이다. 이제 전도서를 다시 펼칠 차례다. 내가 붙잡고 있는 안개는 무엇인지, 그 안개 사이로 하나님이 오늘 내게 허락하신 작고 선한 몫은 무엇인지 천천히 물어볼 차례다.
※ 전도서는 오래도록 허무와 염세의 책으로 읽혀 왔다. 초대교회와 중세는 이 책을 세상 욕망을 비우고 하나님께 돌아서는 영적 훈련의 책으로 읽었고, 근대 이후에는 전도자의 목소리 안에서 회의와 신앙, 지혜와 한계가 부딪히는 긴장을 더 주목했다. 최근 연구는 전도서를 단순한 비관주의로 좁히지 않는다. 마이클 V. 폭스는 ‘헤벨’을 무의미가 아니라 인간 이성으로 다 붙잡을 수 없는 부조리와 불가해성의 언어로 읽게 했고, C. L. 시우와 스튜어트 위크스는 이 책의 언어와 역사, 문학과 신학이 정교하게 얽혀 있음을 드러냈다. 또한 여성주의·생태학적 읽기는 “땅은 영원히 있도다”라는 고백을 오늘의 몸, 권력, 노동, 땅의 문제와 다시 만나게 한다. 그렇게 보면 전도서 1장은 허무의 문이 아니라, 안개 같은 삶 앞에서 인간의 손을 낮추고, 해 아래의 수고와 하루의 몫을 하나님 앞에서 다시 배우게 하는 지혜의 문지방이다.
조원태 목사 / <뉴욕우리교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