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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재글 조원태목사의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 저울, 가벼운 시대의 무거운 말 (뉴스앤조이) 5-30-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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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media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10회   작성일Date 26-06-04 15:07

    본문

    저울, 가벼운 시대의 무거운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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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원태목사의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

    조원태 목사의 연재『요나서로 묻는 17개 질문』을 통해 독자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은 바 있습니다. 독자층에 깊은 질문을 던지며 신학적·목회적 통찰을 나누어 온 그의 글은 특히 삶의 언어로 성서를 풀어낸 점에서 많은 공감과 지지를 받았습니다.

    이번에는 성서 66권 각 책의 서문(Threshold, 문지방 텍스트)을 따라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새로운 연재『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로 다시 시작합니다.

    이 시리즈는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라는 주제로 출발합니다. 특정 책의 프롤로그 분석을 넘어, 성경 전체의 첫 문장을 따라 걸어가는 실험적 글쓰기로서 목회와 문학, 신학을 잇는 연재가 될 것입니다.

    연재의 서막을 여는 글은 프롤로그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소개되며, 이후 매주 성경의 서로 다른 현관을 열어갈 예정입니다.

    이 연재가 독자들의 시야를 넓히고 성서를 다시 ‘시작의 자리’에서 읽게 하는 영적 초대가 되리라 믿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성경의 전체적인 가르침이 다시금 생생하게 느껴지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 편집자 주 -

    1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의 잠언이라 2 이는 지혜와 훈계를 알게 하며 명철의 말씀을 깨닫게 하며 3 지혜롭게, 공의롭게, 정의롭게, 정직하게 행할 일에 대하여 훈계를 받게 하며 4 어리석은 자를 슬기롭게 하며 젊은 자에게 지식과 근신함을 주기 위한 것이니 5 지혜 있는 자는 듣고 학식이 더할 것이요 명철한 자는 지략을 얻을 것이라 6 잠언과 비유와 지혜 있는 자의 말과 그 오묘한 말을 깨달으리라 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아침이 오기도 전, 부엌의 작은 불이 켜진다. 식탁 위에는 휴대전화 하나, 접어 둔 영수증 한 장, 반쯤 식은 물컵 하나가 놓여 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하루의 가장 오래된 싸움은 이미 그곳에서 시작된다.

    답장을 보낼 것인가, 참을 것인가. 모른 척할 것인가, 다가갈 것인가. 더 가질 것인가, 멈출 것인가.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번 보이지 않는 저울 앞에 선다. 그 저울 위에 말과 침묵, 이익과 양심, 속도와 사람, 욕망과 책임을 올려놓는다.

    잠언은 바로 그 저울의 책이다.

    잠언은 부엌과 시장, 침실과 골목, 법정과 왕궁, 부모의 훈계와 젊은이의 충동 사이를 오가며 하루의 살갗에 닿는 말들이다. 성전의 향 냄새보다 생활의 먼지가 더 많이 묻어 있는 책이다. 그래서 잠언은 읽는 책이기보다 살아야 할 책이다. 

    히브리어로 잠언은 마샬이다. 비유이고 격언이며, 삶의 한 장면을 다른 장면에 견주어 보게 하는 말이다. 마샬은 짧은 말 안에 긴 삶을 눌러 담는다. 손안에 들어오는 조약돌처럼 작고 단단하고, 귀에 오래 남는 낮은 종소리처럼 조용히 울린다. 짧은 비유 하나, 짧은 격언 하나가 밥상과 시장과 골목을 지나, 어느 날 우리의 마음 앞에 거울처럼 놓인다.

    좋은 잠언은 답을 대신 내려 주지 않고, 저울을 건네준다. 무엇이 더 무거운지, 무엇이 사람을 살리는지, 무엇이 겉으로는 편리해 보여도 결국 공동체를 무너뜨리는지 다시 달아 보게 한다.

    그러므로 잠언은 우리를 지혜의 기술보다 먼저 경외의 자리로 데려간다. 지혜는 열매처럼 길 위에서 드러나지만, 경외는 뿌리처럼 그 길이 처음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 정한다. 잠언이 찾는 사람은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삶의 저울이 누구 앞에서 맞춰지고 있는지 아는 사람이다.

     

    저울 앞에 선 사람

    이 일곱 절은 잠언 전체의 작은 문패다. 여기에는 잠언이 하려는 일이 거의 다 들어 있다. 지혜와 훈계, 공의와 정직, 듣는 귀와 배우는 마음, 비유와 오묘한 말까지. 단어들은 작은 못처럼 촘촘히 박혀 있다. 한 아이를 어른으로 길러 내기 위해 마을 전체가 작업대 위에 연장을 꺼내 놓은 듯하다.

    이 문패는 잠언 전체의 숲을 미리 보여 준다. 처음 아홉 장에서는 지혜가 길목과 광장에서 사람을 부르고, 열 장 이후에는 말과 돈, 게으름과 분노, 친구와 가난한 이웃, 왕과 재판의 문제가 짧은 문장들 속에서 하나씩 저울 위에 오른다. 아굴과 르무엘의 말을 지나 마지막의 ‘현숙한 여인’에 이르면, 지혜는 한 사람의 머리에 머무는 생각이 아니라 집과 거리와 공동체를 세우는 품격으로 드러난다. 

    이 짧은 서문 안에는 잠언이 빚어 내려는 사람의 윤곽이 이미 희미한 빛처럼 비쳐 있다. 어떤 귀를 열고, 어떤 저울을 들고, 어떤 삶을 세워야 하는지, 그 첫 물음이 여기서 시작된다.

    그 도구들은 모두 한 방향을 향한다. 더 영리한 사람이 아니라 더 바른 사람을 빚는 방향이다. 잠언의 지혜는 빠른 계산이나 민첩한 눈치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위기 속에서도 사람을 해치지 않는 힘이고, 손해 앞에서도 정직을 놓지 않는 마음이며, 이익 앞에서도 공의를 잃지 않는 무게다.

    지혜가 윤리와 떨어지면 영리함이 된다. 영리함은 약한 사람의 빈틈을 찾아내는 것을 능력이라 부르고, 법의 틈새를 지혜라 착각한다. 그러나 잠언의 지혜는 나만 사는 길이 아니라 함께 무너지지 않는 길을 찾는 힘이다.

    잠언의 지혜는 삶의 저울을 다시 맞추는 일이다. 편리함만 달아 보는 저울은 금세 기울고, 이익만 재는 저울은 오래 버티지 못한다. 잠언은 그 위에 다른 무게추 하나를 올려놓는다. 여호와 경외다.

    그 무게추가 없으면 세상은 금세 가벼워진다. 말은 빨라지고, 판단은 얇아지며, 정보는 많아져도 책임은 줄어든다. 알고리즘은 우리가 좋아할 것을 먼저 보여 주지만, 우리가 사랑해야 할 사람을 가르쳐 주지는 못한다. 화면은 지식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지만, 그 지식이 누구를 살리고 누구를 짓밟는지 묻는 일은 여전히 사람의 몫이다.

    지식이 넘치는 시대에도 지혜는 저절로 자라지 않는다. 검색은 빠르고 요약은 정교하지만, 많이 아는 사람이 반드시 깊이 사는 것은 아니다. 잠언은 그 틈에서 묻는다. 너의 앎은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너의 판단은 누구 앞에서 떨리는가?

    경외는 겁에 질려 몸을 낮추는 일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 삶의 크기를 다시 재는 일이다. 내가 중심이 아니며, 내 욕망이 법이 될 수 없고, 내 성공이 선의 기준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경외는 사람을 작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제자리에 세운다. 제자리를 아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의 자리를 함부로 밟지 않는다.

    그러므로 잠언의 문지방에는 아직 다 빚어지지 않은 한 사람이 서 있다. 어리석은 사람도, 젊은 사람도, 이미 지혜롭다고 여기는 사람도 이 문 앞에서는 다시 배우는 사람이 된다. 지혜의 반대말은 무지가 아니라, 더 배울 것이 없다고 믿는 마음이다.

    경외는 듣는 귀를 만든다. 경외하는 사람은 낯선 말 앞에서도 잠시 멈춘다. 잠언은 첫 장부터 우리에게 묻는다. 너는 아직 들을 수 있는가?

     

    귀가 열리는 자리

    잠언은 학교 같은 책이다. 그러나 교실에만 머무는 학교는 아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들려주고, 스승이 제자를 다시 불러 세우며, 한 세대가 다음 세대의 손에 오래된 말을 쥐여 주는 길 위의 학교다. 그래서 잠언에는 반복이 많다. 사람은 한 번 듣고 쉽게 바뀌지 않는다. 지혜는 번쩍이는 깨달음보다 오래 몸에 배는 훈련에 가깝다.

    사람은 자주 같은 자리에서 넘어진다. 말과 욕심, 게으름과 분노가 번번이 발목을 건다. 오늘 깨달은 것을 내일 잊고, 어제 후회한 일을 다시 반복한다. 잠언은 그 연약함을 알기에 짧은 말을 우리 곁에 둔다. 하루의 리듬 속에서 문득 다시 들리게 하기 위해서다.

    “어리석은 자를 슬기롭게 하며 젊은 자에게 지식과 근신함을 주기 위한 것.” 잠언은 아직 닫히지 않은 사람을 향해 말한다. 어리석음이 깊어도 끝은 아니다. 들을 귀가 열리면, 사람은 다시 자기 길을 고쳐 잡을 수 있다.

    젊은 자에게 필요한 것은 지식만이 아니다. 근신함이다. 속도를 늦출 줄 아는 힘이다. 말이 목까지 차오를 때 잠시 삼키는 일, 손에 잡힌 이익 앞에서 한 걸음 물러서는 일, 내 선택이 누군가의 마음에 어떤 자국을 남길지 헤아리는 일. 잠언은 그 작은 멈춤에서 젊은 지혜가 시작된다고 말한다.

    우리는 매일 너무 많은 선택 앞에 선다. 무엇을 사고, 무엇을 믿고, 누구의 말을 들으며, 어떤 얼굴을 외면할 것인가. 기술은 선택지를 늘려 주지만, 선택의 무게를 대신 져 주지는 못한다.

    잠언은 작은 선택의 무게를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혀를 붙드는 사람은 관계를 지키고, 게으름을 경계하는 사람은 내일을 준비하며, 가난한 이를 멸시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영혼을 지킨다. 그렇게 하루의 작은 선택들이 모여 한 사람의 얼굴이 된다.

    그래서 잠언의 지혜는 개인주의적 성공학이 아니다. 저울추를 속이지 않는 상인, 가난한 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 지도자, 거짓 증언 앞에서 입술을 지키는 이웃, 폭력의 길로 들어서지 않는 젊은이. 이런 사람들이 공동체의 보이지 않는 성벽이다.

    성벽만 무너져야 공동체가 폐허가 되는 것은 아니다. 말의 신뢰가 사라지고, 거래의 정직이 흐려지고, 젊은 세대가 배울 만한 어른을 잃을 때, 도시는 그대로 서 있어도 삶은 속에서부터 허물어진다. 권력이 공의를 잃고, 부가 부끄러움을 잃고, 말이 책임을 잃는 순간, 공동체는 돌이 아니라 마음에서 먼저 무너진다.

    잠언은 그 무너짐을 막기 위해 쓰인 작은 성문들 같다. 한 문장 한 문장이 우리 안의 욕망과 충동 앞에 놓인 문이다. 무조건 막아서는 문이 아니라, 통과하기 전에 생각하게 하는 문이다. 이 말은 누군가를 살리는가? 이 선택은 하나님 앞에서 견딜 수 있는가?

     

    작은 땅의 무거운 지혜

    잠언은 솔로몬의 이름으로 문을 열지만, 한 사람의 천재성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이 책은 오래 축적된 공동체의 지혜다. 왕궁의 기록과 집 안의 훈계, 시장의 경험과 오래된 격언들이 함께 흐른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작은 땅에서 오래 살아남은 공동체답게, 모든 지혜를 한 문장 아래 다시 달았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는 문장이다.

    고대 세계도 지혜를 길렀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서기관들은 말과 권력, 재산과 가문을 지키는 법을 오래 다듬었다. 잠언도 그 세계와 대화하지만, 지혜를 생존의 기술에만 묶어 두지 않는다. 하나님 앞에서 다시 달아 본다. 살아남는 것이 전부인가? 잘 사는 것이란 무엇인가? 공동체의 상처 위에 세운 성공도 지혜인가?

    이스라엘의 지혜는 평탄한 땅에서 나온 낭만적 사색만이 아니다. 작고 불안한 땅, 제국의 말발굽 소리가 지나가던 길, 전쟁과 가난과 포로의 기억 속에서 길어 올린 생존의 언어다. 그러나 그 생존은 비겁한 적응이 아니었다.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제국의 저울을 빌리지 않았다. 모든 삶을 하나님 앞에 다시 달아 보았다. 그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길이었다.

    가나안의 좁은 길에서, 예루살렘의 골목에서, 포로 이후의 흔들리는 공동체 안에서 사람들은 배웠다. 힘이 곧 지혜는 아니며, 부가 곧 복은 아니고, 빠른 길이 곧 생명의 길도 아니라는 것을. 속여 얻은 이익은 집의 기초를 흔들고, 약자를 밟고 얻은 평안은 오래가지 못하며, 혀로 세운 거짓은 끝내 자기 몸을 찌른다는 것을.

    잠언은 그래서 낙관적이면서도 순진하지 않다. 부지런함이 열매를 맺고, 정직함이 신뢰를 낳으며, 지혜로운 사람이 생명의 길에 선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말을 성공의 공식으로 바꾸는 순간, 잠언은 얇아진다. 잠언은 인생을 마음대로 움직이는 주문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세계를 분별하도록 우리를 가르치는 훈련서다. 

    그러므로 잠언은 지혜문학 한가운데서 삶의 길을 묻고, 다시 걷게 하는 책이다. 잠언 앞의 욥기는 그 길이 무너지는 자리에서 설명되지 않는 고통을 묻고, 잠언 뒤의 전도서는 그 길 끝에서 인간 수고의 한계를 성찰한다.

    그래도 잠언은 말한다. 세계가 복잡하고 고난이 설명되지 않아도, 정직과 공의와 근신과 경외의 길을 버릴 수는 없다고. 잠언은 인생의 예외를 지우지 않는다. 다만 예외 때문에 길을 포기하지 않게 한다.

    이 점에서 잠언은 오늘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무엇을 지혜라 부르고 있는가? 더 빨리 이기고, 더 적게 책임지고, 더 많은 정보를 먼저 차지하는 능력인가? 아니면 하나님 앞에서 사람을 살리는 길을 분별하는 힘인가?

    한 사회는 자기가 무겁게 여기는 것을 닮아 간다. 돈만 무겁게 여기면 사회는 돈의 얼굴을 닮고, 힘센 말만 쫓으면 공동체의 언어는 거칠어진다. 이긴 사람에게만 박수를 보내면 아이들은 이기기 위해 무엇을 잃어도 되는지부터 배운다.

    잠언은 그런 사회의 문 앞에 오래된 무게추 하나를 놓는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다. 이 문장은 개인의 경건에만 머물지 않는다. 공동체의 바닥을 받치는 무게추가 된다. 하나님 앞에서 떨 줄 아는 사람은 사람을 함부로 다루지 않고, 자기 욕망을 낮춰 본 사람은 약한 이의 삶을 쉽게 숫자로 만들지 않는다. 자신의 한계를 아는 사람은 훈계를 모욕으로만 듣지 않는다. 그렇게 경외는 겸손을 낳고, 겸손은 배움을 열며, 배움은 사람을 살리는 지혜로 자란다.

    잠언의 문지방에 선다는 것은 성경의 한 장르를 공부하기 시작한다는 뜻만이 아니다. 내 삶의 서문을 다시 묻는 일이다. 나는 무엇을 근본으로 삼고 살아왔는가? 내 말과 소비와 분노와 관계의 저울에는 어떤 무게추가 놓여 있었는가?

    잠언을 덮고 나면, 문장보다 먼저 하루의 무게가 남는다. 말 한마디의 무게, 지갑을 여닫는 손의 망설임, 누군가를 외면하고 돌아선 뒤에 남는 마음의 소리, 그런 것들이 남는다. 작은 저울 하나가 우리 안에 놓인 것 같다.

    그 저울은 크게 울지 않는다. 다만 하루가 끝나는 자리에서 묻는다. 오늘 네 말은 누구를 살렸는가? 네 침묵은 누구를 지나쳤는가? 네가 가볍게 여긴 것은 무엇이고, 끝까지 무겁게 붙든 것은 무엇인가?

    잠언을 다시 읽는다는 것은 좋은 문장을 모으는 일이 아니다. 내 삶을 하나님 앞에 다시 올려놓는 일이다. 너무 쉽게 가벼워진 하루를, 너무 빨리 지나쳐 버린 얼굴들을, 너무 오래 내 편으로만 기울어 있던 마음을 다시 달아 보는 일이다.

    그때 비로소 한 문장이 낮게 들려온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많이 아는 삶보다 먼저, 바로 서는 삶이 있다고. 경외. 그 두 글자 앞에서 사람은 조금 작아지고, 그래서 비로소 깊어진다.

     

    ※ 잠언은 오랫동안 경건한 훈계이자 고대 근동 지혜 전통과 대화하는 현실의 언어로 읽혀 왔다. 근대 비평학은 편집 과정과 여러 지혜 모음의 층위를 주목했지만, 최근 연구는 잠언을 단순한 처세 격언이 아니라 성품과 공동체 윤리를 빚는 지혜 교육의 장으로 읽는다. 마이클 V. 폭스는 잠언의 교육 구조를, 크리스틴 로이 요더는 반복과 긴장이 독자를 훈련하는 방식을, 캐서린 델은 잠언·욥기·전도서가 함께 지혜의 가능성과 한계, 하나님 앞의 질문을 형성한다는 점을 보여 주었다. 이런 흐름에서 잠언 1장 1–7절은 이 책이 어떤 사람과 공동체를 빚으려 하는지 보여 주는 첫 교실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는 문장을 통과할 때, 말과 돈과 권력과 관계를 다루는 잠언의 모든 말은 제 무게를 얻는다. 잠언의 문지방에 선 독자는 결국 한 질문 앞에 멈춘다. 내 삶의 저울은 지금 무엇으로 맞춰져 있는가?

    조원태 목사 / <뉴욕우리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