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글 조원태목사의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 순환, 왕이 사라진 자리에 무엇이 왕이 되었는가
페이지 정보

본문
순환, 왕이 사라진 자리에 무엇이 왕이 되었는가
조원태목사의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
사사기 1:1-3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우리 가운데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리이까?’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유다가 올라갈지니라. 보라 내가 이 땅을 그의 손에 넘겨주었노라’ 하시니라. 유다가 그의 형제 시므온에게 이르되 ‘내가 제비 뽑아 얻은 땅에 나와 함께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자. 그리하면 나도 네가 제비 뽑아 얻은 땅에 함께 가리라’ 하니 이에 시므온이 그와 함께 가니라.”

왕이 사라진 시간
사사기는 환호로 시작하지 않는다. 성읍의 성문 위에 깃발이 펄럭이고, 새 땅의 흙냄새가 들판을 채우던 그 순간을 장엄하게 그려내지도 않는다. 개선가 대신, 짧은 한 문장을 놓는다. 그 순간 공기의 결이 달라진다. 햇빛은 그대로인데, 계절이 바뀐 듯 온도가 식는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 문장은 단순한 연대기적 정보가 아니다. 한 시대의 심장이 멎었다는 선언이다. 한 사람이 죽은 것이 아니라, 한 중심이 사라졌다. 광야의 모래바람을 온몸으로 기억하던 세대, 만나가 내리던 새벽을 두 손으로 받아 보던 세대, 요단이 갈라지던 날 발바닥으로 강바닥을 디뎠던 세대가 무대 뒤로 물러난다. 기억은 더 이상 체험이 아니라 전언이 되고, 이야기는 살아 있는 증언에서 전해 들은 이야기로 옮겨간다.
그들은 여전히 약속의 땅 위에 서 있다. 지평선은 멀리 열려 있고, 곡식은 바람을 따라 물결친다. 제비는 이미 뽑혔고, 기업은 나뉘었으며, 텐트는 서서히 흙벽을 두른 집으로 바뀌어 간다. 집은 골목을 만들고, 골목은 마을을 이룬다. 모든 것이 자리를 잡아 가는 듯 보인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균열이 땅속에서 천천히 번진다. 발 밑은 단단한데, 중심은 가볍다. 서문은 묻는다. 땅이 주어졌다고 해서 중심도 함께 주어진 것인가.
여호수아의 시대는 광야의 긴장 위에 서 있었다. 생존은 매일의 기적이었고, 하루하루가 의존의 훈련이었다. 만나가 내리지 않으면 굶주렸고, 구름기둥이 멈추지 않으면 발걸음을 옮길 수 없었다. 하나님은 선택이 아니라 조건이었다. 그러나 사사기의 첫 장에는 다른 공기가 흐른다. 기억은 아직 남아 있으나, 더 이상 뜨겁지 않다. 체험은 이야기로, 이야기는 관습으로 옮겨 간다. 기적은 점점 전설이 되고, 전설은 점점 상징이 된다.
그래도 처음에는 묻는다. “우리 가운데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리이까.” 질문은 아직 살아 있다. 하나님께 방향을 묻는 습관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 질문은 오래 머물지 못한다. 장을 넘길수록 묻는 장면은 짧아지고, 결정은 빨라진다. 숙고 대신 속도가, 기도 대신 판단이 앞선다. ‘여호와께 여쭈어’(삿 1:1)라는 문장은 점점 희미해지고, ‘각기 자기 소견에’(삿 21:25)라는 문장이 서사의 중심을 차지한다.
광야에서는 하나님이 생존의 조건이었다. 숨을 쉬듯 의존했고, 걸음을 떼듯 따랐다. 그러나 땅에 들어오자 하나님은 여러 가능성 중 하나가 된다. 밭은 스스로 갈 수 있고, 성읍은 스스로 지킬 수 있다. 우물은 판 만큼 물을 내고, 창고는 쌓은 만큼 곡식을 채운다. 손에 쥔 것이 많아질수록 하늘을 올려다보는 횟수는 줄어든다. 풍요는 자율을 낳고, 자율은 선택을 낳으며, 선택은 서서히 기억을 흐리게 한다.
정착은 안식처럼 보이지만, 다른 이름의 시험이다. 위기는 인간을 하늘로 밀어 올리지만, 안정은 인간을 자기 안으로 가라앉힌다. 배고픔은 기도를 만들고, 배부름은 계산을 만든다. 사사기의 서문은 이 미세한 기울기를 붙든다. 눈에 띄지 않지만 분명한 이동. 중심이 하나님에게서 인간 자신에게로 천천히 옮겨가는 순간.
여호수아가 죽은 후. 그것은 단지 시간의 경계가 아니다. 통치의 경계다. 중심이 비워진 자리에서, 이제 누가 왕인가.
구원의 북소리, 무너지는 중심
사사기의 구조는 놀라울 만큼 일정하다. 오래된 북소리처럼, 낮고 둔탁한 박자가 계속 울린다. 이스라엘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한다. 산당에 제단을 쌓고, 눈에 보이는 힘에 무릎을 꿇는다. 이방의 압제가 시작된다. 성읍의 문이 부서지고, 곡식은 빼앗기며, 아이들의 울음이 저녁 공기 위로 길게 번진다. 견디다 못해 부르짖는다. 먼지와 피가 섞인 기도가 하늘을 향해 올라간다. 하나님이 사사를 세우신다. 이름 없던 한 사람이 시대의 전면으로 불려 나온다. 잠시 평안이 찾아온다. 들판에는 다시 곡식이 자라고, 칼은 벽에 기대 선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악을 행한다. 북소리는 멈추지 않고, 처음의 박자로 되돌아간다.
이것은 단순한 되풀이가 아니다. 나선형 하강이다. 겉으로는 제자리걸음처럼 보이지만, 한 바퀴 돌 때마다 중심에서 조금씩 멀어진다. 기준은 조금씩 더 무너지고, 양심은 조금씩 더 무뎌진다. 후반으로 갈수록 이야기는 어두워진다. 레위인의 첩 사건에 이르면, 우리는 더 이상 영웅담을 읽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체감한다. 한 여인의 몸이 문턱에 버려지고, 한 지파는 분노로 타오르며, 형제는 형제를 도륙한다. 이것은 공동체 해체의 기록이다. 폭력은 예외가 아니라 일상이 되고, 여성은 이름을 잃으며, 지파는 서로를 향해 칼끝을 겨눈다. 약속의 땅은 어느새 피로 젖은 무대가 된다.
사사들은 영웅처럼 호명되지만, 동시에 시대의 균열을 드러내는 표지이기도 하다. 기드온은 밤에 몰래 우상을 찍어내던 청년에서 전장의 지도자로 떠오르지만, 승리 이후 또 다른 우상을 남겨 사람들의 마음을 붙잡아 둔다. 입다는 주변으로 밀려났던 상처를 딛고 중심에 서지만, 성급한 서원 하나로 자기 집의 문턱에 비극을 들인다. 삼손은 사자의 턱뼈를 휘두르며 웃지만, 그의 눈은 점점 빛을 잃는다. 힘은 넘치되 방향은 없다. 그들은 한때의 위기를 건져 올렸으나, 시대의 심장까지 바꾸지는 못했다.
이 길고 어두운 이야기들은 결국 한 문장으로 모인다. 사사기의 마지막에 놓인 그 문장은, 전체 서사의 심장박동이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21:25)
왕이 없었다. 그것은 단지 정치적 공백을 말하는 문장이 아니다. 궁극적 기준의 붕괴를 가리키는 선언이다. 하나님을 왕으로 모신다는 감각이 옅어질 때, 인간은 자신을 중심에 세운다. 판단은 각자의 손에 흩어지고, 욕망은 합리화의 언어를 입는다. 그렇게 공동체는 직선이 아니라 원을 그리기 시작한다. 나아가는 듯 보이지만, 실은 같은 자리 위를 맴돈다.
그래서 이 책의 두 글자는 ‘정착’보다 ‘순환’에 가깝다. 정착은 도착을 전제하지만, 사사기는 도착 이후의 맴돎을 기록한다. 구원은 거듭되지만 변혁은 깊어지지 않고, 승리는 쌓이지만 중심은 단단해지지 않는다. 전진처럼 보이지만 제자리다. 이것이 사사기의 리듬이다.
빈 왕좌 앞에 선 우리
사사기는 끝내 왕을 무대 위로 올리지 않는다. 대신, 페이지를 넘길수록 왕의 자리를 더 또렷하게 비워 둔다. 빈 왕좌가 보인다. 아무도 앉아 있지 않은 자리, 그러나 모두가 의식하는 자리. 이 책은 소리 높여 선언하지 않지만, 한 질문을 집요하게 우리 곁에 세운다. 누가 우리의 왕인가.
“왕이 없었다”는 말은 정치 체제의 공백을 뜻하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통치의 방향이 흐려졌다는 고백이다. 하나님을 왕으로 모신다는 것은 종교적 표어가 아니라, 삶의 무게중심을 어디에 두는가의 문제다.
우리는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무엇을 잃을까 염려하며 밤을 설치는가. 무엇을 위해 양보하고, 무엇 앞에서 무릎을 굽히는가. 예배는 결국 통치에 대한 고백이다. 우리가 가장 자주 생각하는 것이, 이미 우리의 왕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왕이 없는 시대의 사람이라 부르지 않는다. 오히려 너무 많은 왕들 사이에서 살아간다. 성공이 왕이 되고, 여론이 왕이 되고, 내 안의 상처가 왕이 된다. 각자의 확신은 쉽게 법이 되고, 각자의 욕망은 정의의 언어를 빌려 스스로를 정당화한다. 그렇게 작은 왕국들이 난립한다. 한 집 안에서도, 한 공동체 안에서도 서로 다른 왕이 다스린다. 그 풍경은 낯설지 않다. 갈등은 반복되고, 상처는 겹겹이 쌓이며, 분열은 깊어진다. 우리는 그것을 성장통이라 부르며 지나치지만, 사사기는 다른 이름을 붙인다. 순환.
사사기의 문지방에 서면, 오래된 성문 앞에 선 듯한 기분이 든다. 한 시대의 흙먼지가 아직 가라앉지 않았다. 여호수아가 죽은 뒤에도 들판은 넓고 창고는 가득하지만, 중심은 이미 미세하게 기울어 있다. 그 장면이 문득 우리를 향해 돌아선다. 성취 이후에도 우리는 누구를 왕으로 세웠는가. 안정 속에서 무엇을 절대화했는가. 땅은 얻었으되, 중심은 지켜 냈는가.
사사기는 실패 목록을 늘어놓는 책이 아니다. 반복이라는 형식으로 우리를 서서히 피로하게 만드는 책이다. 같은 장면이 되돌아오고, 같은 탄식이 겹쳐 울리며, 같은 구원이 다시 펼쳐진다. 읽는 이는 점점 지친다. 왜 이들은 배우지 못하는가. 왜 이 순환은 멈추지 않는가. 그러다 어느 순간, 그 피로가 거울이 된다. 나의 반복은 무엇인가. 나의 순환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가.
그래서 사사기는 갈망을 남긴다. 다른 통치에 대한 갈망. 제도를 정비하는 왕이 아니라, 무너진 중심을 바로 세울 왕에 대한 갈망. 순환을 끊을 힘은 바깥에서 오지 않는다. 중심이 바로 서는 순간에만, 반복은 멈춘다. 빈 왕좌는 아직 비어 있다. 그리고 질문은 여전히 우리를 향해 서 있다.
※ 전통적으로 사사기는 왕정의 필요성을 드러내는 역사로 읽혀 왔다. “왕이 없으므로”라는 반복은 다윗 왕조를 예비하는 신학적 장치로 이해되었고, 신명기 역사서의 틀 안에서 이 책은 불순종의 결과를 보여주는 교훈적 기록으로 해석되었다. 무질서는 왕의 부재 때문이며, 해결은 제도의 확립이라는 서사였다. 그러나 최근 연구는 이 도식을 넘어선다. 사사기는 왕정을 찬양하기보다 인간 통치의 한계를 드러내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혼란의 근원은 왕의 부재가 아니라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는 감각의 붕괴에 있다는 읽기다. 통치의 문제는 곧 예배의 문제이며, 정치적 공백은 영적 공백의 그림자다. 일부는 사사기를 ‘정체성 위기의 문학’이라 부른다. 포로기 이후 공동체가 붕괴를 성찰하며 다시 쓴 역사라는 해석이다. 그럴 때 이 책은 실패담이 아니라, 기억을 잃은 공동체가 어떻게 방향을 상실하는지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이 흐름 속에서 사사기는 과거형에 머물지 않는다. 순환은 특정 시대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중심에 두지 않을 때 반복되는 인간 조건이다. 빈 왕좌는 여전히 비어 있고, 질문은 여전히 우리를 향한다. 순환을 끊을 왕은 누구인가. 우리는 그 왕을 실제로 왕으로 모시고 있는가.
조원태 목사 / <뉴욕우리교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