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글 왜 성내는가 (요나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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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원태 목사의 '요나서로 묻는 17개 질문'
왜 성내는가? (요나 4:4)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하시니라"(욘 4:4)
의분과 분노 사이
분노는 천천히 다가오다, 한순간 번개처럼 번진다. 사랑이 무너지고, 믿음이 꺾이며, 정의가 외면당한 자리를 파고든다. 잿빛 폐허 위, 꺼진 줄 알았던 불씨가 다시 살아난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물으셨다.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꾸짖음이 아닌 멈춤이었다. 감정의 뿌리를 묻는 질문이었다.[1] 이 물음은 오늘 우리에게도 온다. 무심히 쌓인 분노를 헤집으며, 오래 덮어둔 기억과 상처, 이름 없는 감정을 끌어올린다. 그 질문은 비난이 아니라 초대다. 감정의 결을 살피게 하는 부드러운 거울이다. 옳은 분노인지, 꼭 필요한 분노인지 묻는다.[2] 그리고 그 물음은 잔물결처럼, 잠든 생각과 감정을 흔든다. 그 울림 속에서 우리는 숨겨둔 이야기와 마주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 말했다. “올바른 사람에게, 올바른 이유로, 올바른 방식으로, 올바른 때에 분노하는 사람은 칭찬받는다.” 그러나 잘못된 분노는 파괴를 부른다.[3]
불의 앞에서 분노하지 않는다면 무지이거나 비겁함이다. 의분을 잃은 사회는 감각이 마비되고, 정의는 사라진다. 모든 위대한 변화는, 불의 앞에서 용기있는 의분에서 시작되었다.
한국의 3·1 운동(1919년), 인도의 소금 행진(1930년), 미국 앨라배마주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1955년), 미국의 셀마에서 몽고메리로 향한 행진(1965년), 전태일 분신 이후 노동자 대투쟁(1970년), 한국의 부마민주항쟁(1979년), 5·18 광주민주화운동(1980년), 폴란드 솔리다르노시치 노동운동(1980년), 칠레와 아르헨티나의 기억 행진(1983년), 필리핀 마닐라 반독재 집회(1986년), 한국 6월 민주항쟁의 거리(1987년), 체코 프라하 바츨라프 광장에서 울려 퍼진 '벨벳 혁명'의 종소리(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전 동베를린의 촛불 시위(1989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진실과 화해위원회(1996년), 네팔 카트만두 민주화 시위(2006년), 튀니지 자스민 혁명(2010년), 이집트 타흐리르 광장 시위(2011년), 시리아 다마스쿠스의 자유 행진(2011년), 일본 후쿠시마 원전 반대 시위(2012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교육 시위(2013년), 터키 게지 공원 시위(2013년), 우크라이나의 마이단 광장 시위(2014년), 케냐 나이로비 부패척결 시위(2015년), 멕시코 여성살해 반대 시위(2016년), 콜롬비아 평화협정 지지 시위(2016년), 모로코 리프 지역 시위(2017년), 스페인 바르셀로나 카탈루냐 독립 시위(2017년), 파키스탄 여성행진(2018년), 페루 리마 반부패 시위(2018년), 프랑스 노란 조끼 시위(2018년), 수단 하르툼 민주화 시위(2019년), 홍콩의 도심에서 울려 퍼진 'Glory to Hong Kong'의 합창(2019년), 칠레 지하철 요금 인상 반대 시위(2019년), 인도네시아 반부패 시위(2019년), 인도 농민 시위(2020년), 미국 조지 플로이드 추모 시위(2020년), 태국 민주화 청년 시위(2020년), 벨라루스 민스크 민주화 시위(2020년), 러시아 나발니 석방 촉구 시위(2021년), 미얀마의 골목에서 불린 노래(2021년), 캐나다 오타와 트럭 시위(2022년), 이란 여성들의 머리 위로 날아간 히잡(2022년),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에서 울린 양심의 외침(지속).[4]
이 모든 것의 시작은, 뜨거운 의분이었다.
그러나 모든 분노가 의로운 것은 아니다.
역사는 잘못된 증오가 불러온 참혹한 장면도 빼곡하다.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된 마녀사냥(15세기), 미국 내 중국인 배척법 제정(1882년), 일제강점기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1923년),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 홀로코스트(1940년대),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계 미국인 강제수용(1942년), 인도-파키스탄 종교 폭동(1947년, 1992년), 문화대혁명 시기 중국의 정치 숙청(1966년), 빈센트 친(Vincent Chin) 살해 사건(1982년), 발칸반도의 인종청소(1990년대), 르완다의 투치족 집단학살(1994년), 인도 구자라트 폭동(2002년), 수단 다르푸르 분쟁(2003년~), 케냐 선거 후 폭력사태(2007년), 시리아 내전의 종파 학살(2010년대), 미얀마 로힝야 학살(2010년대), 노르웨이 브레이빅 총격 테러(2011년), 인도 여성 성폭행 후 집단 폭동(2012년), 이라크와 시리아의 IS 학살(2014년), 프랑스 니스·파리 테러(2015년), 예멘 내전 종파 분쟁(2015~), 스리랑카 종교 폭력(2018년),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 이슬람 사원 테러(2019년), 미국 국회의사당 폭동(2021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2022년~), 팔레스타인 민간인 학살(지속), 미국 내 코로나19 관련 아시아계 증오범죄 급증(2020년대 이후), 애틀랜타 스파 총격 사건(2021)— 모두 사랑 없이 폭주한 분노가 남긴 상흔들이다.[5]
신학자 미로슬라브 볼프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의 진노는 사랑의 반대가 아니라, 사랑이 악과 불의에 반응하는 방식이다.”[6] 사랑이 빠진 분노는 복수로 흐르지만, 사랑에서 흘러나온 분노만이 의분이 된다.
참된 의분은 부수기보다 붙드는 힘이다. 그것은 누군가를 품고 울어본 마음에서 싹튼다. 하나님의 분노는 끊어내는 칼이 아니라 다시 이어 붙이려는 손길이다. 인간은 자존을 지키기 위해 성을 내지만, 하나님은 사랑을 되살리기 위해 묻는다.
“그 분노는 정말 옳으냐?”
그 물음 앞에서 우리는 멈춰야 한다.
실패 – 드러난 이유
요나는 하나님이 시키신 대로 했다. 순종했고, 외쳤다.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욘 3:4) 그러나 니느웨는 무너지지 않았다. 오히려 회개했고, 살아났다. 하나님의 뜻은 뜻대로 이루어졌지만, 요나는 화가 났다.
그는 자신이 전한 말이 바람에 흩날린 것처럼 느꼈다. 예언자로서의 체면이 구겨지고, 모범생처럼 살아온 인생이 헛된 것처럼 느껴졌다. 하나님을 위해 옳다고 믿었던 일이, 정작 하나님 앞에서는 무게를 잃었을 때—속이 뒤집혔다.
큰아들도 그랬다. 아버지를 떠난 동생과 달리 곁을 지켰다. 땀과 인내를 쌓아왔으나, 동생을 받아들이는 아버지의 품 앞에서 그 모든 세월이 무시된 듯 느껴졌다(눅 15:28-30).[7]
그 장면 속에서 우리는 요나의 그림자를 본다. 곁에 있었으나 마음은 멀어진 자. 순종은 했으나 기쁨은 없던 자. 진리를 외쳤으나 사랑은 없었던 자.
오늘의 교회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다. 수년간 기도와 봉사를 이어왔는데, 예상과 다른 결과가 나오면 표정이 굳는다. 성경공부와 예배, 선교와 구제까지 ‘정답’대로 걸어왔는데, 세상이 내 방식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속이 서서히 비틀린다.
그 안에는 단순한 실망만이 아니라, 수년간 쌓아온 수고와 헌신이 한순간 빛을 잃는 듯한 깊은 허탈함이 스민다. 오랜 시간과 마음을 기울인 내가 회의나 예배 자리에서 환영받지 못하거나 인정받지 못할 때, 서운함은 눈물로 번지고 곧 분노와 억울함으로 치닫는다.
마치 집 안에 늘 함께 있었지만 이름조차 불리지 않은 사람처럼, 혹은 오랜 세월 한 길을 걸어왔는데 갑자기 길이 꺾여버린 사람처럼 느껴진다. 거대한 파괴의 씨앗도 실은 이런 평범한 인간 감정에서 자라나는 경우가 많다.
새로운 변화나 결정이 내가 기대한 방향과 다를 때 그 감정은 더욱 깊어진다. 내 안의 기대와 현실의 틈이 벌어질수록, 그 틈에는 상처와 서운함이 고이고, 그 고인 감정은 때로 하나님을 향한 서운함과도 맞닿는다.
요나의 분노는 단순한 성깔이 아니었다. 실패 앞에 선 인간의 분노였다. 수고가 보상받지 못할 때의 상실감, 예측이 어긋날 때의 당혹감.
하나님은 그에게 묻는다. “그 분노, 정말 옳으냐.” 사랑보다 앞선 자존심은 결코 정의가 될 수 없다고.
생각차이 – 내면의 이유
요나는 설교했고, 사람들은 회개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지만, 요나는 화를 삼키지 못했다. 속마음이 터져 나왔다.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않았습니까.”(욘 4:2)
그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하나님이 자비로우신 분임을. 그래서 도망쳤다. 하나님이 피해자 편이어야 한다고 믿었고, 가해자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은 불의라 여겼다. 그 신념은 오래된 상처 위에 세워진 요나만의 굳은 정의감이었다.
생각이 엇갈린 순간, 화가 치밀었다. 피해자를 향한 사랑은 가해자를 심판할 때 정의에 닿는다고 믿었다. 권선징악, 사필귀정 — 그 믿음은 거친 현실을 버티게 한 마지막 끈이었다.
그 믿음이 무너지는 순간, 분노는 더 짙어졌다. 마치 오래 쌓아올린 둑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듯, 마음속 질서가 와르르 흩어졌다. 눈앞의 장면이 견딜 수 없는 무게로 내려앉았다.
요나는 하나님과 생각이 어긋나는 순간을 맞았다. 잔인한 가해자가 과거의 잘못에 대한 책임 하나 없이 살아남는 모습을, 그는 사십 일 동안 지켜봐야 했다. 그 시간은 길고 무거웠다. 모범생처럼 살아온 이들이라면 분노가 치밀고 억울함이 번지는 장면이었다.
실패나 의견 차이로 일어나는 분노, 그 감정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플로리다의 여름, 한 미국 교회의 성찬상 앞에 섰다. 백인 목사, 흑인 여성, 아시아계 남성—서로 다른 얼굴이 하나의 떡과 잔을 둘러싸고 있었다. 우리는 약속했다. 가장 용서하기 어려운 기억을 꺼내기로. 누군가는 가정폭력의 그림자를, 누군가는 인종차별의 흉터를 꺼냈다. 내 차례가 다가왔을 때, 숨이 멎는 듯 멈칫했다.
마침내 입을 열었다. 삼십육 년 동안 내 조국을 지배하며 고통을 남긴 일본인을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 순간, 내 이야기는 요나의 이야기와 겹쳤다. 사랑보다 정의가 먼저여야 한다 믿었기에, 자비가 정의를 넘어서는 광경을 견딜 수 없었던 그와 같았다.
말이 흘러나오는 동안 손끝이 떨렸다. 끌어올린 것은 과거만이 아니었다. 그 과거에 묶여 있던 자존과 슬픔, 분노까지 터져 나왔다. 성찬상 위의 떡은 평화를 말했지만, 내 가슴 속에는 전쟁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 순간 깨달았다. 나는 용서를 말했지만, 용서를 끝까지 배운 적이 없었다는 것을. 하나님의 사랑이 가해자에게도 흐른다는 사실이, 내 안의 오래된 정의를 뒤흔들고 있었다.
이 이야기는 한국 사회가 여전히 품고 있는 미완의 상처와 맞닿아 있었다. 회개한 니느웨와 달리, 일본은 오랜 세월이 지나도 사과와 회복의 길로 나아가지 않았다. 그 미완의 현실은 내 분노를 더 짙게 만들었고, 요나가 느꼈을 억울함과 무력감이 내 안에서 되살아났다.
그러나 그 감정은 단지 민족의 역사에만 갇힌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과 생각이 어긋나는 순간 찾아오는 혼란과 저항, 그리고 그 속에서 드러나는 내 안의 자존과 정의의 경직됨을 마주하는 일이었다.
요나도 그랬다. 그의 눈에 비친 십자가는 사랑보다 정의가 앞서야 했다. 그가 외친 심판은,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이 드러내듯, 정의가 실현되지 않은 채 다가오는 화해를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8] 그 장면 앞에서 나 또한, 요나처럼 속이 뒤집혔다.
그는 하나님을 향해 서슴없이 외쳤다. 자신은 옳고, 하나님은 틀렸다고. 그 분노는 단순한 격정이 아니었다. 오래 믿어온 세계가 무너지고, 정당하다고 여긴 신념이 한순간에 뒤집히는 경험이었다. 피해자를 향한 사랑이 가해자에 대한 단죄로 완성되어야 한다고 믿었기에—마치 정의는 반드시 처벌이라는 열매로 맺혀야 한다는 듯— 자비가 그 질서를 흔드는 순간, 그는 무너졌다. 그는 그 낯선 평화 앞에 서지 못했다.
우리는 그 자리에 선다. 정의가 필요했던 우리에게, 하나님은 사랑을 말씀하신다. 우리는 무너짐을 기대하는데, 하나님은 살림을 택하신다. 우리는 정답을 요구하는데, 하나님은 용서를 펼치신다.
요나처럼, 우리도 억울하다 말하고 싶어진다. 우리의 울분은 그 억울함 위에 쌓인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억울함조차 껴안고 묻는다. “그 성냄이 옳으냐.” 그 질문은 꾸짖음이 아니다. 회복을 향한 초대다.
그 질문은, 마음 깊은 곳 우리가 꺼내지 못한 슬픔과 오해를 향해 건네는, 하나님의 속삭임이다.
우상상실 - 본질적 이유
요나의 분노는 실패의 쓴맛에서 시작해, 하나님과의 깊은 관점 차이로 짙어졌으며, 마침내 그의 믿음 속 가장 은밀한 곳에 숨겨진 우상이 드러났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한 무언가—그 분노의 불씨가 된 것이다.
니느웨가 살아남는 순간, 조국 이스라엘은 위태로워진다. 요나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적국의 회복은 곧 내 나라의 위협이었다. 하나님의 뜻이 내 공동체를 위협하는 듯 보인다면—그 하나님을 끝까지 따를 수 있을까?
요나와 동시대의 예언자들,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는 이스라엘 왕을 향해 거침없이 비판했다. 그들의 언어는 날카로웠고, 기록은 성경 속에서 묵직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러나 요나는 달랐다.
그는 여로보암 2세(주전 786~746년)의 군사 확장 정책을 지지했다(왕하 14:25).[9] 적국을 제압하고 국경을 넓히는 일을 긍정적으로 여겼다. 자국의 안보와 국익이 최우선이었다. 어떤 이에게 그는 애국자였지만, 그 마음은 노골적인 국수주의로 물들어 있었다.[10]
그의 입술은 예언자였으나, 가슴엔 민족주의자의 심장이 뛰고 있었다. 하나님보다 조국을 더 사랑했던 사람. 이스라엘 국익은 요나 마음 깊이 뿌리내린 우상이었다. 그 우상에 반하는 니느웨의 흥황은, 그에게 분노를 촉발시켰다.
하나님의 자비가 이스라엘의 원수에게 흐르자, 그는 등을 돌렸다. 정의를 기다렸으나 자비가 왔을 때, 그는 정의가 배신당했다고 느꼈다.
그 분노는 이별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요나는 동쪽 언덕에 홀로 앉았다. 누가복음의 큰아들처럼, 집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하나님의 뜻이 자신의 기준과 다르다면, 그 하나님마저도 포기할 수 있다는 결심이었다. 우상을 얻지 못할 바엔, 하나님까지 등질 수 있다는—슬픈 단절의 선언이었다.
요나의 우상은 조국이었다.
그의 인종적 자부심은 깊게 뿌리내려, 언제든 인종차별이라는 독버섯으로 번질 위험을 품고 있었다. 하나님은 국가적 자부심이 제국주의로 비틀릴 때, 그것을 악이라 선언하신다(시 33:16-17).
하나님의 첫 관심은 니느웨의 심판이 아니었다. 오히려 요나 마음속 깊이 숨은 우상이 어떻게 악으로 자라나는지를 드러내는 데 있었다. 누가복음 15장에서 예수가 큰아들을 비유로 들어 바리새인의 완고함을 폭로하신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내 안에도 요나가 있지 않은가.
은밀히 뿌리내려 하나님보다 먼저 심장을 뛰게 하는 우상은 없는가.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 이 질문은 화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그 분노의 뿌리를 직시하게 하는 초대였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 자리에 무엇이든 들어설 수 있다. 돈, 자존심, 명예, 성공, 가족, 교회, 이념—하나님보다 먼저 심장을 뛰게 하고, 가장 빠르게 반응하게 만드는 모든 것이 우리 마음 깊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11]
하나님은 요나에게 “왜 화내느냐?”가 아니라,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고 물으셨다. 그 물음은 꾸짖음보다 멈춤에 가까웠다. 판단이나 정죄가 아니라, 감정의 뿌리를 비추어 보게 하는 부드러운 빛이었다. 요나에게는 숨을 멎게 하는 질문이었고, 하나님에게는 마지막 기다림이었다.
그 질문은 오늘도 바람결처럼 다가온다. “그 분노는 누구를 위한 것이냐?”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다면, 그 사랑은 언젠가 우리를 분노로 데려간다.
그 뿌리를 직면하지 않는 한, 우리는 은혜의 강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우리가 등을 돌린 채 멀리 앉아 있는 동쪽 언덕 어딘가에서, 하나님은 여전히 속삭이신다.
“얘야, 그 분노는 정말 옳으냐?”
자비의 추적기
요나서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자비의 추적기다. 하나님의 헤세드는 한 번 맺은 관계를 놓지 않는 사랑이며, 조건 없는 은총이고, 무너진 자리를 붙드는 손길이다.
요나는 은혜를 목말라했으나 곧 잊었다. 자격이 있다고 믿을 때는 기꺼이 받았지만, 원수의 어깨 위에도 그 은혜가 내려앉는 순간 마음이 무너졌다. 그때 은혜는 그의 눈앞에서 더 이상 은혜로 보이지 않았다.
하나님의 은혜는 스치듯 지나가지 않는다. 그것은 마음 표면의 먼지만 털어내는 것이 아니라, 오래 잠겨 있던 서랍을 열어 가장 깊은 곳까지 스며든다. 때로 그 깊이는 숨이 막히고, 그 손길은 감당하기 버겁다. 그러나 바로 그 불편함 속에 하나님의 진심이 깃든다.
우리는 실패 속에서도, 오해 속에서도, 잃을까 두려운 불안 속에서도 분노한다. 그러나 그 분노를 품은 채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 — 그것이 믿음이다.
요나는 분노 속에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의 입술이 아니라 그 속에 숨은 마음을 보셨다. 그리고 물으셨다. “얘야, 그 분노는 정말 옳으냐.”
그 물음 앞에서 우리는 마음속 깊은 무게를 그대로 품은 채 걸어가야 한다. 그 무게를 건너는 다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다.
십자가는 요나 같은 나를 하나님께 잇는 다리이자, 은혜가 멈추지 않도록 끝없이 열려 있는 길이다. 내가 주저앉을 때에도, 그 길 위로 하나님의 사랑은 쉼 없이 흘러온다.
요나는 순종했으나 사랑이 없었다. 외형은 따랐으나 마음은 멀리 있었다. 영혼이 빠진 순종이었다. 우리도 요나처럼 의무는 지키면서도 은혜를 흘려보내지 않을 때가 있다. 기도는 하지만 사랑은 없다. 그 안에 숨어 있던 우상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자.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던 것을 비운 자리에,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가 차오른다.
바람이 묻는다
조원태
그 분노는
누구를 향한 것이냐
나는 대답하지 못한 채,
언덕 끝에 앉아 있었다
하늘은 낮게 드리우고,
은혜는 먼 바다처럼 밀려왔다
손끝에 남은 뜨거움이
사랑인지, 상처인지
가늠할 수 없을 때
그분의 정적이 나를 감쌌다
그 정적 속에서
나는 깊이 묻어두었던
이름 하나를 불렀다
각주) [1] Phyllis Trible, Jonah: A Commentary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96), pp. 257-258. 트리블은 하나님의 질문이 비난이나 처벌이 아닌, 요나로 하여금 자신의 분노의 근원을 성찰하도록 이끄는 부드러운 초대임을 강조한다. 또한 이를 '관계 회복의 문턱'으로 보며, 하나님이 요나의 감정을 존중하면서도 파괴로 흐르지 않게 새로운 관계의 자리로 초대하신다고 설명한다.
[2] Jack M. Sasson, Jonah: A New Translation with Introduction, Commentary, and Interpretation, The Anchor Bible, vol. 24B (New York: Doubleday, 1990), pp. 306-307. 사슨은 하나님의 질문이 요나를 몰아붙이거나 논쟁에서 이기려는 목적이 아니라, 요나로 하여금 자신의 감정을 성찰하고 그 근원을 보게 하는 대화의 장치임을 강조한다.
[3] Aristotle, Nicomachean Ethics, trans. Terence Irwin, 2nd ed. (Indianapolis: Hackett Publishing, 1999), Book IV, chap. 5, 1125b–1126a.
[4] Charles Tilly, From Mobilization to Revolution; James M. Jasper, The Art of Moral Protest — 도덕적 분노와 항의 운동의 심리를 다룬 고전 연구; Sidney Tarrow, Power in Movement — 사회운동의 조직과 확산을 분석한 대표 저작.
[5] 사랑 없는 분노가 폭주한 사건들을 다룬 연구로는 마사 누스바움(Martha C. Nussbaum)의 Anger and Forgiveness — 복수심과 증오가 사회 갈등을 심화시키는 과정을 분석, 버나드 윌리엄스(Bernard Williams)의 Shame and Necessity — 부정적 감정이 정치적 폭력으로 번지는 경로를 탐구한 저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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