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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재글 왜 다시 제자리인가? (요나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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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69회   작성일Date 25-08-23 17:10

    본문

    왜 다시 제자리인가? (요나 4:1)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광장의 끝에서

    회개의 광장 끝에 단 한 사람이 남아 있었다.

    모두가 울고 웃으며 서로를 껴안을 때,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환호가 파도처럼 번졌고, 감격이 사람들의 눈시울을 적셨지만, 그는 굳은 얼굴로 서 있었다.

    모두가 살아남은 거리에서, 그는 외로웠다. 마치 회개의 광장 끝에 남겨진 낡은 조각상처럼, 그의 존재는 그곳에 있었지만, 누구의 시선에도 닿지 않았다.

    광장의 중심에서 환호가 퍼질 때, 그는 그 자리에서 밀려났다.

    사람들이 서로를 부둥켜안고 울며 웃는 순간, 그는 걸음을 옮기지 못한 채, 축제의 뒷모습만 바라보았다. 죄를 고백하는 입술들, 용서를 체험한 눈빛들 사이에서 그는 단 한 사람, 무인도처럼 고립되어 있었다.

    그의 존재는 그곳에 있었지만, 누구의 시선에도 닿지 않았다.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욘 3:4). 다섯 단어뿐인 이 설교는 요나의 전부였다. 말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는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도시는 무너지지 않았다. 무릎 꿇은 제국은 살아났고, 칼은 거두어졌다. 거리마다 죄가 고백되었고, 왕은 겸손해졌으며, 동물마저 금식했다. 하나님은 뜻을 돌이키셨다.

    마침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요나는 성을 냈다.

    모두가 환호하는 기적 앞에서, 단 한 사람 요나만이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재앙을 맞았다. 도시를 살린 자비가 그에게는 재앙이었다.

    찬양이 울리는 광장 끝에서, 그는 다시 어둠 속으로, 도망치던 그 자리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축제는 계속됐고, 사람들은 서로를 껴안았지만, 그는 발끝 하나 움직이지 못한 채 서 있었다.

    마치 환한 빛 아래 드리운 그림자처럼, 환호의 광장에서 요나는 홀로 어울리지 못한 채, 점점 더 멀어지고 있었다.

     

    뒤집힌 단어들, 뒤틀린 마음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욘 4:1)

    이 짧은 문장은 요나의 내면에서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를 안고 있다. 그는 구원의 절정에서 꺾였고, 감격의 물결 한가운데서 홀로 밀려났다.

    변화는 그를 지나쳤다. 회개의 광장에서 울리던 울음은 그에게 닿지 않았고, 찬양의 함성은 메아리로만 들렸다. 요나는 그 자리에 있었지만, 모든 흐름과 어긋나 있었다.

    사람들은 새로운 시간으로 나아갔지만, 그는 정지된 시간 속에 머물렀다. 눈앞의 자비는 축복이 아닌 혼란이었고, 살아난 도시의 기쁨은 그에게 재앙이었다.

    “매우”(히, 갓돌)는 요나서에 반복되는 “큰”이라는 단어다. 큰 도시, 큰 폭풍, 큰 물고기—그 단어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위엄과 개입을 설명하던 말이었다. 그러나 이번엔 다르다. 그 크다는 말이, 하나님이 아니라 요나의 내면을 향해 쓰였다.[1]

    요나의 마음 한가운데, '거대한' 무언가가 일었다. 니느웨처럼 압도적이고, 물고기처럼 숨 막히며, 폭풍처럼 요동치는 감정이 자리를 틀었다. 

    그는 그것을 "매우" 싫어했다.

    “싫어하고”(히, 라)는 요나 1장에서 선원들이 말했던 “재앙”(1:7–8, raʿâ)과 같은 뿌리에서 나온 말이다.[2] 요나에게 닥친 진짜 재앙은 폭풍도, 물고기도 아니었다. 도시를 덮은 자비였다.

    하나님의 용서가 광장에 퍼지는 순간, 요나는 서서히 가라앉았다. 은혜는 억겁의 무게처럼 그의 어깨를 짓눌렀고, 그 무게에 눌려 그는 점점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사람들이 구원을 기뻐할 때, 요나는 어쩌면 다시 그 물고기의 뱃속에 들어간 듯했다. 피하고 싶던 것들이 그의 안에서 다시 밀려왔다.

    그는 한때 외쳤고, 도시는 무릎 꿇었고, 사람들은 살아났다. 그러나 그 자신은 그 자리에 남았다. 구원의 여운이 아니라, 떠나고자 했던 감정의 파편들에 의해 다시 붙잡힌 채로.

    그에게 자비는 큰 "재앙"이었다.

    “성내며”(히, 하라)는 단순한 분노가 아니다. 혼란과 불안, 슬픔과 절망이 뒤엉켜 있다.[3] 요나는 진동했다. 마음의 선이 모두 끊긴 듯, 길을 잃은 사람처럼 휘청였다.

    기억은 남아 있었지만, 감정은 떠났고, 순종은 있었으나 기쁨은 없었다.

    물고기 뱃속의 침묵도, 니느웨의 회개도 그의 마음을 바꾸지 못했다. 도시는 구원받았지만, 요나는 그 자리에 머물렀다. 아직 도달하지 못한 채로. 여전히, 그 자리에.

     

    체면과 은혜 사이

    니느웨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실현되지 않은 심판, 말뿐인 경고. 그날, 구원의 도시 한복판에서 요나는 말이 없었다.

    침묵은 광장의 소음 속에서 더욱 선명해졌고, 사람들은 수군댔다. 조롱처럼 들리는 침묵은 마치 무너진 예언의 파편 같았다.

    하나님의 진노를 말하던 교회는 어떤가. 수많은 경고가 공허하게 울렸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사람들은 믿음을 내려놓았고, 결국 하나님마저 웃음거리가 되었다.

    요나는 알고 있었다. 자기 말이 허풍이 되고, 하나님이 조롱당할 것을. 전한 말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말도 사람도 함께 무너진다는 것을.

    그의 분노는 단순한 자존심의 상처가 아니었다. 하나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는 것을 지켜보는 자의 슬픔. 은혜가 자기 울타리를 넘어 흘러갈 때 찾아오는 혼란.

    그는 사랑받았지만, 다른 이들이 사랑받는 것을 견디지 못했다. 은혜가 흐르자, 그는 오히려 고립되었다.

    자신을 살린 은혜를 잊은 채, 그 은혜가 이방에게 향하자 마음이 요동쳤다. 하나님의 신실함이 자신이 만든 경계를 넘어서자, 그는 그것을 불공평하게 느꼈다.[4]

    그는 믿었다. 말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자신도 무너진다고. 그래서 매달렸다. 말씀의 성취가 곧 자신의 자존심이었기에.

    요나에게는 회개의 생명보다 하나님의 체면이 더 중요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 곧 자기 말이며, 하나님조차 그 말에 묶여야 한다고 믿었다.

    말씀은 자유로울 수 없었다. 뜻이 바뀌는 것은 요나에게 무질서였고, 그 무질서 앞에서 그는 체면을 선택했다. 은혜보다 일관성을, 생명보다 자기 말을 택했다.

     

    의인의 그림자

    요나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다. 고집은 꺾였고, 바다에서 건짐을 받았다. 대가가 컸기에, 그는 이제 의인의 자리에 섰다고 여겼다.

    그의 눈에 세상은 두 개였다. 순종한 자와 불순종한 자. 구원받은 자와 저주받은 자.[5] 그는 희생했고, 니느웨는 아니었다. 그래서 그들이 멸망해야 자신의 수고가 무너지지 않는다고 여겼다.

    요나의 깊은 내면에는 지워지지 않는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이방은 여전히 경계 밖에 있어야 했고, 은혜는 담장 안에서만 흐르는 것이어야 했다. 그는 하나님이 반드시 갚으시는 분이라 믿었다. 악인은 언젠가 심판받을 존재였다.

    그 믿음은 멀지 않다. 오늘의 교회도 그 그림자를 닮아 있다. 하나님의 은혜가 교회 담장 밖으로 흘러갈 때, 교회는 때로 불편해한다. 선을 넘는 자비가 당혹스럽고, 경계를 무너뜨리는 구원이 질서 없게 느껴진다. 

     

    오늘의 교회도, 요나처럼 도망쳤고, 다시 분노했다. 이유는 같았다. 하나님의 자유. 그 자유는 요나에게 감당하기 힘든 무질서였다.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시고, 말씀하신 경고를 거두시는 모습을 본 순간, 요나의 내면에서 신념의 기둥이 흔들렸다. 그는 예언자는 하나님의 말을 전하는 자일 뿐만 아니라, 그 말이 반드시 성취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말에 얽매이지 않으셨고, 요나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예언이 실현되지 않자, 그는 자신의 정체성이 흔들린다고 느꼈다. 말의 실패가 곧 자신의 실패처럼 다가왔고, 그 체면의 상실은 요나에게 재앙이었다.[6]

    자끄 엘륄(Jacques Ellul)은 요나가 자신의 예언이 무산될까 두려워 도망쳤다고 본다. 하나님의 자유보다 자신의 체면과 말의 실현을 더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다.[7]

    그러나 더 깊은 곳에 또 다른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은혜는 자신에겐 살 길이었다. 그러나 그 은혜가 타인에게 흘러갈 때, 그는 어딘가 불편했다. 그 흐름이 넓어질수록, 그는 더 이상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는 진실과 마주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던 요나. 그러나 그 용서가 이방에게도 주어지는 순간, 그는 다시 무너졌다. 자신을 살린 은혜가, 아이러니하게도 그에겐 불편함이 되었다.

    말씀은 남았지만, 마음은 떠났다. 그는 하나님의 뜻보다 자신의 말이 옳기를 바랐다. 예언자가 아닌, '자기 확신의 감옥' 안에서 스스로를 가두었다.[8]

    그는 아직 알지 못했다. 자신을 살린 은혜의 깊이와 그 신비를. 기억하는 것은 자신의 수고와 희생뿐이었다.

    삶은 이미 새로운 길 위에 있었지만, 그는 그 새로움을 환영하지 않았다. 은혜가 담장 없이 흘러넘치는 것을, 그는 끝내 받아들이지 못했다.  

     

    은혜의 위험

    하나님은 사랑에 신실하신 분이다. 그 사랑은 경계 없이 흐르며, 죄인과 이방인에게 스스럼없이 닿는다. 니느웨를 살리기 위해 하나님은 요나를 보내셨고, 그 구원을 위해 조롱받는 이름과 깎인 명예를 기꺼이 감수하셨다.

    하나님은 자신의 체면보다 생명을 선택하셨다. 그 선택은 부끄러움을 안고서라도, 끝내 사람을 살리려는 은혜의 길이었다.

    은혜는 위험을 동반한다. 하나님의 위험은, 사람들의 판단 아래 놓이는 위험이었다. 모욕과 조롱, 침묵과 무시—그분은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이셨다. 

    오직 그 길만이 사람을 구원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위험을 피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스스로 위험 안으로 걸어 들어가셨다. 기꺼이, 자신의 발로.

    예수님은 그 위험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체면이 아니라, 생명을 내어줄 만큼의 사랑이었기에. 조롱이 퍼지는 광장 한가운데서도, 그 사랑은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십자가를 향해 걸어갔다.

    그 사랑은 성루 위에서 울리는 외침이 아니었다. 골짜기 아래로 스며드는 눈물 같았다. 먼저 죄인에게 닿았고, 외면받은 자에게도 주저 없이 손을 내밀었다. 흔들리는 숨결 끝에도, 그 사랑은 멈추지 않았다.

    성직자인 나마저 하나님의 위험보다 체면을 먼저 생각할 때가 많다. 모욕과 조롱보다 인기와 인정을 더 고려할 때도 많다. 그러나 나를 멈추게 하는 한 가지가 있다. 남과 북 사이이의 평화를 위해 비무장지대를 걷는 일이다.

    그 길은 늘 낯설고 조심스럽다. 사람들의 시선은 덫처럼 깔려 있고, 무엇을 하려 해도 의심이 먼저 앞선다. 침묵하는 이들이 많고, 드러내기를 꺼리는 목소리들이 바람 속에 흩어진다.

    그러나 나는 걷는다. 지뢰밭 같은 그 시선을 딛고 한 걸음씩 나아가다 보면, 어느새 뜻밖의 자리에 도착해 있다. 나를 무너뜨리고 다시 세우는 어떤 거룩한 함몰지대. 은혜의 블랙홀.

    70년 전 누구도 닿지 못한 그 길 위에서, 나는 흔들리고 무너진다. 체면도 자존심도 허물어지고, 그 텅 빈 자리에서 은혜는 말없이 스며든다. 소리 없이 울먹이듯, 어둠 속을 흐르며 나를 감싼다.

    남과 북의 경계를 넘나드는 두루미 한 마리가 흰빛 날개를 펼치고 고요히 날아간다. 그 날개짓은 바람의 소리를 머금고, 냉전의 균열 위를 조심스럽게 스친다. 무장과 공포가 여전히 깃든 땅 아래로, 은혜는 물결처럼 스며든다.

    스러진 이념과 갈라진 마음의 틈 사이로 은혜는 천천히 침투하고, 마침내 우리 안 가장 깊은 곳, 무너진 자리의 심장에까지 다다르기를.

    그러나 요나는 달랐다. 그 은혜가 닿는 순간, 그는 무너졌다. 모두가 다시 살아나는 자리에, 그는 홀로 주저앉았다.

    요나는 그것을 견디지 못했다. 하나님의 이름이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는 순간, 자신의 믿음 전체가 조롱당하는 듯 느껴졌다. 예언이 이루어지지 않자, 마치 누군가 자신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등 뒤에서 비웃는 듯했다. 

    그는 믿었다. 하나님은 위엄으로 말해야 했고, 그 이름은 결코 땅에 떨어져서는 안 된다고. 은혜가 체면의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흘러야 한다면, 그는 그 은혜를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다. 타자의 회개가 자신의 예언을 무력화시키는 순간, 더는 그 자리에 머물 수 없었다.

    폴 리쾨르(Paul Ricoeur)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는 타자에 대한 이해를 통해 가능하다"고 말했지만,[9] 요나는 타자에게 흘러간 은혜 속에서 자신을 지키려다 오히려 자신을 무너뜨렸다. 그래서 그는 싫어했고, 성을 냈다.

    우리도 이럴 때가 있다. 어렵게 쌓은 모래성이 밀물에 무너지는 것처럼, 간신히 얻은 변화가 다시 무로 돌아갈 때. 회전목마처럼, 시계 초침처럼, 나는 돌고 있지만 여전히 그 자리다.

    요나도 그랬다. 그는 다시 살아났지만, 완전해지지는 못했다. 여전히 성을 냈고, 다시 좌절했다. 그는 스테인글라스에 갇힌 성인이 아니었다. 살과 피, 흔들리는 감정으로 이루어진 한 사람이었다.

    빛이 스며드는 성소의 창 뒤가 아니라, 흙먼지가 이는 들판 한가운데서 흔들리고 또 쓰러지는, 연약한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제자리 또한, 은혜의 마지막 자리가 아니라 새로운 시작의 첫 자리가 될 수 있었다.

    바울도 고백했다.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롬 7:21) 그는 두 사람을 품고 살았다. 선을 바라는 자와 악에 끌리는 자. 그 고백은 우리 것이기도 하다.

    거룩함은 때로 신기루처럼 멀어진다. 가까이 가면 사라지고, 손을 뻗으면 미끄러진다. 회심의 감격마저 의심되는 날, 구원도, 그 안에 거하던 평안도 한순간의 착각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흔들린다. 하지만 그 흔들림 안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자비는 머문다

     

    부서진 사람의 자리

    브루더호프 공동체의 지도자 요한 하인리히 아놀드(1913–1982). 예수님의 명령을 삶으로 옮길 수 있다고 믿은 사람. 독일 베를린의 익숙한 안락함을 내려놓고, 사랑과 공동체를 선택한 사람.

    그러나 그도 흔들렸다.

    가장 믿었던 이들이 먼저 등을 돌렸다. 공동체가 흔들리자 신뢰는 낙엽처럼 흩어졌고, 사람들은 그를 사기꾼이라 손가락질했다. 누구보다 함께했던 시간이, 오히려 깊은 상처가 되어 되돌아왔다. 심지어, 상담을 받았던 한 남성이 수년 뒤, 그의 가슴께로 총구를 겨누었다. 방아쇠는 당겨지지 않았지만, 그 순간 이미 무너진 것은 총알이 아닌 신뢰였다.  

    믿음의 이상을 품었던 자리엔 텅 빈 공기만이 남았다. 그는 아무도 없는 계단 아래 주저앉았다. 무너진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그는 홀로 울었다.[10] 

    그조차 울 수 있다니. 눈물마저 허락되지 않을 것 같던 사람의 무너짐은, 어쩌면 그것만으로도 우리에게 깊은 위로가 되지 않을까.

    그는 부서진 사람이었다. 모두가 떠난 자리, 무너진 자리에 홀로 무릎을 꿇었다. 무너진 것은 단지 공동체가 아니었고, 상처받은 마음만도 아니었다. 신뢰와 말, 시간과 관계, 삶을 버티던 마지막 기둥까지, 그 자리에서 하나씩 무너져 내렸다.

    그럼에도 그는 그 자리에 주저앉은 사람만은 아니었다. 끝까지 놓지 않은 것이 있었다. 예수를 따르는 삶. 그것 하나였다.

    그는 알았다. 그 자리는 실패의 끝이 아니라, 은혜의 시작이었다. 무너진 그 자리가 곧 문턱이었다는 것을.

    요나처럼. 우리처럼.

    멈춘 그 자리는 끝이 아니었다. 부서진 마음으로 맞이하는 그 제자리가 새로운 시작의 문턱이었다. 제자리를 인정할 때—바로 그곳에서 은혜는 다시 시작된다.

     

    돌아간 자리가 아니라 돌아볼 자리

    왜 다시 제자리인가?

    그곳은 부서진 나를 만나는 자리다. 깨어지고 실패한 나, 다시 넘어지는 나와 마주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자비를 구할 수 없다. 제자리는 하나님의 뜻을 다시 새기고, 잊혔던 그분의 음성을 다시 듣는 공간이다. 성화는 언제나 이 자리에서 시작된다.

    상처 없는 이가 있다면, 그는 아직 삶의 바깥에 서 있는 자일 것이다. 실수투성이의 이 땅에서 사람을 깨우는 이는, 끝내 부서진 자다.

    수레바퀴에 짓눌린 자, 그럼에도 다시 일어선 자. 사랑의 군영은 오직 그런 이들을 받아준다. 상처가 있어야 복무할 수 있는 곳. 흉터가 증표가 되는 자리. 아파본 이만이 설 수 있는 은혜의 전선.

    요나는 그 제자리에 이르러서야 하나님의 깊은 뜻을 마주했다. 오만은 그 자리에서만 무너진다. 그 자리는 회피할 수 없는 신자의 숙명이자, 은혜를 향한 뜀틀이었다.

    나는 변했지만, 완전하진 못했다. 회개의 언덕을 넘었지만, 마음의 벽은 여전히 높았다. 은혜를 입었으나, 그 은혜를 흘려보내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다시 제자리였다.

    바로 그 자리, 뱃머리에 앉아 하나님의 뜻을 등지던 그 자리. 하나님은 거기서 나를 놓지 않으셨다. 처음 불러내신 그 음성으로 다시 다가오셨고, 니느웨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마음은 요나를 버려두지 않으셨다.

    우리도 그렇다. 기적의 광장에 있으면서도, 마음은 여전히 혼란에 잠겨 있다. 사람들은 눈물로 찬양하고 감사하지만, 우리는 어딘가 홀로, 마음의 재앙을 안고 서 있다.

    그러나 바로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