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글 왜 변화되어야 하는가? (요나 3:1-10)
페이지 정보

본문
요나서로 묻는 17개의 질문
왜 변화되어야 하는가? (요나 3:1-10)

요나서는 마치 데칼코마니 같다. 종이에 물감을 떨어뜨리고 접었다 펴면, 예상치 못한 무늬가 거울처럼 마주 보며 펼쳐진다. 요나서의 구조도 그렇다. 1-2장과 3-4장은 서로를 비추며 반복된다.[1]
첫 번째 요나는 다시스로 도망쳤다(욘 1:3). 두 번째 요나는 니느웨로 향했다(욘 3:3). 처음 말씀을 들었을 때 그는 뒷걸음쳤지만(욘 1:1-3), 세 번째는 그 말씀을 따라 앞으로 걸었다(욘 3:1-3). 처음의 요나는 폭풍과 바다의 위협 속에 있었지만(욘 1:4-16), 두 번째의 요나는 도시 한복판에 섰다(욘 3:4).
이 두 풍경은 단지 비슷한 모습으로 끝나지 않는다. 거울처럼 서로를 비추는 그 사이, 가장 또렷하게 떠오르는 것은 ‘변화’였다.
그러나 그 변화는 결코 단순하지 않았다. 제비뽑기, 폭풍, 깊은 바다, 물고기 뱃속의 어둠—요나는 그 모든 과정을 지나서야 겨우 한 걸음을 내디뎠다. 멀고 험한 길, 무너진 마음, 그리고 다시 걷는 다리.
변화란 본래 그러하다. 쉽고 편한 길로 오지 않는다. 익숙한 것을 내려놓고, 낯선 어둠을 지나야 한다. 하지만 가장 깊은 어둠 속에서도, 아주 작지만 꺼지지 않는 등불이 켜진다. 그 빛을 따라가면, 우리는 마침내 잊고 있던 자신을 다시 만난다. 그리고 또 한 걸음을 내딛는다.
변화는 단지 개인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 앞에 공동체가 응답하는 사건이다. 요나의 말은 단지 입술의 고백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공동체의 행위로 옮겨졌고(욘 3:10), 그때 하나님은 그 돌이킴에 응답하셨다.
그러니 변화는 단순한 눈물이나 죄책감이 아니다. 그것은 구조적인 악을 멈추고, 더 이상 누군가의 목을 밟고 서지 않겠다는 결단이다.[2] 회개란 삶의 방향을 바꾸는 일이고, 그 방향은 언제나 사랑을 향해 있어야 한다.
이제 우리도 요나의 이야기 앞에 서 있다. 어둠을 지나온 한 사람의 걸음을 따라, 우리도 1장에서 3장으로 건너가야 한다. 왜 변화되어야 하는가? 이 물음을 품고, 나의 니느웨를 향해 다시 걸어야 한다. 멈춰 서 있던 발을 옮기고, 주저앉았던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 그것이 변화의 첫 걸음이다.
두 번째 부르심, 그 절박한 재촉
처음 부르심은 두려움이었다. 요나는 하나님의 얼굴을 피해 바다로 몸을 던졌다. 그러나 그 두려움의 끝자락에서, 하나님의 음성은 다시 불어왔다.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욘 1:17)—그를 삼키셨던 그분이 다시금 그의 심장을 두드리셨다.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로 요나에게 임하니라”(욘 3:1). 이번 부르심은 달랐다. 더는 외면할 수 없음을 그는 직감했다.
이전의 부름이 마치 삶의 변두리에서 울리던 먼 종소리 같았다면, 이번 부름은 심장을 울리는 북소리 같았다. 말씀이 다시 그의 곁을 비추었고, 꺼진 듯했던 삶이 서서히 온기를 되찾았다. 그의 어깨 위로 어둠이 걷히고, 그 한 문장이 다시 그의 걸음을 일으켰다.
그것은 명령이 아니라 재촉이었다. 단호한 강요가 아니라, 기다림에서 우러나는 절박한 호소였다.
요나는 마침내, 그 말씀 앞에 일어섰다. 두려움이 물러가고, 심장의 문이 다시 열렸다. 이 부름은 외면할 수 없는 사랑의 울림이었다.
나는 자신 안에서 싸우는 두 존재를 느꼈다. 순종하려는 나와 도망치고픈 나. 거듭난 듯 보였지만, 발목을 잡는 옛 자아의 그림자가 여전히 살아 있었다.[3] 두 그림자가 그의 마음을 잡아당기며 서로를 찢었다. 그는 더는 버틸 수 없었다. 그 갈등의 끝에서, 그는 자신 안에 끝나지 않은 싸움을 마주했고, 그 싸움은 하나님의 음성 앞에서만 멈출 수 있었다.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욘 3:2). 그 말씀이 그의 폐부를 찔렀다. 요나는 마침내, 주저앉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건 단순한 복종이 아니었다. 자기 자신과의 싸움 끝에 얻은, 파편 같은 결단이었다.
죽음을 지나 다시 들려온 동일한 명령—“일어나라. 니느웨로 가라.” 그러나 이제 그는 예전의 요나가 아니었다. 물고기 뱃속의 사흘. 그 안에서 그는 완전히 무너졌고, 다시 태어났다.
길 위로 돌아온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단 한 줄,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욘 3:4) 회개의 촉구는 없었다. 다만 멸망의 선포뿐이었다. 그 한 문장이 도시에 불을 질렀다. 왕에서 짐승까지, 모두가 굵은 베옷을 입고 엎드렸다.
요나는 여전히 껍데기처럼 보였지만, 말씀은 그 껍데기를 타고 흘렀다.[4] 말씀은 언제나 도달한다. 설득이 아니라, 침투다. 하나님은 그 말에 생명을 실으셨다. 그 생명이 사람의 가슴을 뒤흔들었다.
우리도 언젠가 같은 말씀을 다시 듣는다. 오래된 구절이지만, 전혀 다른 울림으로 다가온다. 변화는 그렇게 시작된다. 명령이 아니라, 응답으로부터.
왜 변화되어야 하는가?
그 물음은 결국, 나 자신에게 되묻는 질문이다. 나는 누구인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 그 대답을 찾기 위해 우리는 도망치던 걸음을 멈추고, 다시 하나님을 향해 돌아선다. 변화란 거창한 결심이 아니라, 작지만 진실한 방향 전환이다.
그 순간,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눈을 마주한다. 그 눈빛은 우리를 심판하지 않고 기다린다. 우리 안에 숨은 이름을 불러낸다. 변화란 결국, 우리가 다시 그 이름으로 살아가기 시작하는 일이다.
말은 여전히 짧고, 걸음은 여전히 불안하다. 그러나 말씀은 그 모든 것을 지나 우리의 중심에 닿는다. 그것이 변화의 비밀이다. 우리가 바뀌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내시는 것이다. 다시 살아가게 하시는 것이다.
2022년 봄, 나는 대장암 수술을 받았다. 대장의 절반을 잘라내야 했다. 수술대 위에 누운 채, 내 위를 에워싼 21개의 수술칼이 둥그렇게 나를 에워쌌다. 그 순간, 나는 요나처럼 모든 것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물고기 뱃속으로 들어가기 직전의 숨 멎는 고요였다.
수면 주사가 스며드는 찰나,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마치 태초부터 이어진 우주의 맥박 속으로 내가 들어간 듯했다. 눈은 감겼지만 마음은 또렷했고, 귓가에 하나님의 부르심이 아득히 울렸다.
그 속삭임은 내가 16년을 살아온 뉴욕의 거리에서, 무뎌진 정의를 다시 외치라는 다급한 울림이었다. 그 말씀에 대한 화답은 추방위기에 처한 서류미비자들을 위한 사역이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나를 ‘이민자보호교회’로 다시 부르셨다.[5]
깨어났을 때, 온몸은 무너져 내렸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다시 청명한 숨결이 피어올랐다. 나는 살아 있었다. 요나처럼 육지에 내던져져, 멎었던 숨결 위에 다시 깃든 그 음성을 들었다. 그 음성은 다그침이 아닌 기다림이었고, 두려움이 아닌 "살아 있으라"는 속삭임이었다. 무너진 삶의 끝에서, 다시 들리는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대장을 절반으로 줄인 육체의 변화 속에서, 나는 다시 물었다. 이 모든 것이 단지 수술이었을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나를 다시 불러내시는, 더 깊은 생명의 자리로 이끄시는 부르심이었을까?
그 물음은 단지 육체의 회복을 넘어, 존재의 방향을 다시 묻는 질문이었다. 그리고 나는 알 수 있었다. 이것은 회복이 아니라 다시 살아가는 부르심이었다. 나의 니느웨를 향해, 다시.
울음이 시작된 도시
니느웨는 폭력과 잔인함으로 점철된 도시였다. 그 강포함은 세상을 떨게 했고, 도시는 무너질 줄 몰랐다.
요나의 말은 너무 작았고, 너무 짧았다. 그러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욘 3:4)—그 다섯 단어가 도시에 울림을 일으켰다.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를 조롱하지도, 위협하지도 않았다. 뜻밖에도, 그들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돌이 날아올 상황에서, 뉘우침이 흐르고, 낯선 예언자의 말에 귀가 열렸다.
요나는 이미 1장에서 이방 선원들을 통해 이와 비슷한 놀라움을 경험했다. 바다의 폭풍 속에서, 그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요나를 바다에 던진 후에도 여호와께 경외심을 드러냈다(욘 1:16). 바깥에서 오는 신비로운 순종, 그것은 요나에게 반복된 놀라움이었다.
사람들은 그의 입보다 그의 걸음을 보았다. 떨리는 다리로 걷는 예언자의 길은 두려움과 순종이 뒤섞인 긴 여정이었다. 니느웨 사람들은 그 흔들리는 걸음 안에서, 익숙한 권력과 낯선 회개의 사이에서 비추는 하나님의 거울을 보았다.
왕에서 가장 낮은 사람까지, 모두가 “굵은 베옷을 입고”(욘 3:5) 금식하며 엎드렸다. 도시 전체가 무릎을 꿇었다. 말보다 걸음이, 소리보다 침묵이 더 깊게 파고들었다.
니느웨의 변화는 도시 전체의 질서를 뒤흔드는 구조적 전환이었다.[6]
착취의 사슬이 풀어지고, 폭력의 기세가 꺾였다. 권력은 언덕 아래로 내려와, 도시는 깊은 숨을 토해냈다. 마틴 루터 킹 목사에게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일은 곧 세상의 불의 앞에 일어서는 일이었다. 권력이 내려왔고, 사람들은 울었다.
그 울음은 멸망이 아니라 회개의 시작이었다. 말씀이 도시의 골목마다 스며들었다. 숨겨졌던 비명이 깨어났고, 잊힌 양심이 다시 눈을 떴다. 그곳에서 새로운 숨이 시작되었다.
도시가 변한다는 것은 기득권이 무너지고, 질서가 전복되며, 침묵하던 존재들이 목소리를 갖는 일이다. 사람은 밥을 멈추고, 짐승은 짖음을 그쳤다. 왕은 왕좌를 벗고, 죄를 입었다.
이것이 성서가 말하는 ‘전인적 회개’였다(욘 3:7-8). 한 사람의 심장이 흔들릴 때, 그 떨림이 구조를 건드렸다. 가장 높은 자리에서 가장 낮은 자리에까지 변화가 스며들었다.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해체는 단절이 아니라 귀 기울임”이라 말했다.[7] 니느웨는 해체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파괴가 목적이 아니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무장 해제했고, 하나님의 목소리에 더 가까이 다가가려 했다. 악을 외면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했다. 낡은 권력과 오래된 악습이 무너지는 틈새로, 하나님의 숨결이 스며들었다. 그것이 회개였고, 변화였다. 자기 자리에서 내려와 듣는 일. 울 수 있다는 것, 그게 변화였다.
지금 우리는 니느웨보다 나은가? 권력은 여전히 죄를 숨기고, 언론은 회개의 말을 조롱한다. 그러나 그때, 가장 폭력적인 도시조차 무너져 울었다. 그 울음이 지금 우리에게도 필요하다.
변화의 고통, 새로운 시작의 문턱
변화는 언제나 통증을 동반한다. 고치 속에서 몸을 뒤틀며 나비가 되듯, 요나는 바다와 물고기 뱃속에서 깨어지고 다시 만들어졌다. 자신을 잃고 되찾는 그 과정을 반복하며, 그는 마침내 하나님께 돌아왔다.
우리도 변화 앞에서 멈칫거린다. 익숙한 삶의 껍질을 벗어내는 일, 알 수 없는 내일로 나아가는 일은 언제나 두렵다. 그러나 진짜 변화는, 바로 그 어둠 속을 지나는 길 위에 있다.
그 길을 걷다 보면, 익숙한 것들이 하나씩 떨어져 나가고, 오래된 슬픔들이 말없이 등을 돌린다. 그때 우리는 처음 보는 빛 아래서, 진짜 나를 만나게 된다. 요나처럼.
그러나 가장 중요한 건, 변화가 내 안의 결심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루신다. 우리는 그저 그분의 음성 앞에 자신을 내려놓고, 걸음을 내딛는 것이다.
그 길의 끝에는, 나 하나의 회심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향한 문이 열린다. 나의 변화가 끝이 아니라, 세상을 향한 회복의 시작이 된다.
그런 흐름 속에서, 우리는 한 사람의 삶에 찾아온 급진적인 변화를 떠올릴 수 있다.
도스토옙스키가 총살 직전 겪은 오분은 하나의 복음이었다. 머리에 자루가 씌워진 채, 그는 곧 죽을 운명이었다. 그 순간, 황제의 사면장이 도착했다. 살아난 것이었다.
자비의 연극일지라도 그는 그것을 진짜 죽음이라 믿었다. 그리고 썼다. “인생은 다섯 개의 1분이다. 나는 살아보고 싶다.”
그날 이후, 그는 세상의 모든 것에게 감사했다. 스쳐가는 사람, 한 줄기 햇살, 겨울 바람조차. 시베리아 유형지로 끌려가는 수갑 찬 걸음 안에서, 그는 복음을 새겼다. 베갯머리 아래 둔 신약성경을 펼치며 매일 예수의 얼굴을 떠올렸고, "오, 그리스도의 빛나는 인격이여"라며 울먹였다.
그 변화는 부서진 심장 위에 다시 일어서는 일이었다. 완전히 부서졌고, 그 파편 위에 다시 세워졌다. 변화란 그런 것이다. 꺼진 시간을 다시 걷는 일. 멎었던 숨을 다시 들이마시는 일. 불가능했던 숨결이 다시 흐르기 시작하는 일.
돌아서고 싶을 때, 요나를 떠올리자.
그의 흔들리는 발걸음 너머에서, 흔들림 없는 하나님의 은혜가 니느웨를 움직였던 것을 기억하자. 우리도 그 은혜 안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다.
“하나님이 그들의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욘 3:10)
여기서 ‘돌이키다’는 히브리어로 두 단어가 사용된다. 인간의 회개는 ‘슈브(שׁוּב)’—가던 길을 멈추고, 반대편을 향해 방향을 바꾸는 결단이다. 반면, 하나님의 돌이킴은 ‘나함(נָחַם)’—고통 속에서 태어나는 연민의 떨림이다.
슈브는 발걸음을 바꾸는 일이지만, 나함은 그 발걸음을 바라보며 가슴 깊이 아파하는 하나님의 마음이다. 심판을 향해 들었던 손을 거두는 일, 그 떨림은 사랑이다.
한쪽은 발을 돌리고, 다른 한쪽은 눈을 돌린다. 두 개의 ‘돌이킴’이 마주하는 자리에, 심판은 멈칫거림이 되고, 그 멈칫거림 안에서 사랑은 숨을 쉰다. 그것이 구원의 시작이다.
철학자 레비나스는 “진정한 타자와의 만남은 나의 윤리를 다시 쓴다”고 말했다.[8] 하나님은 니느웨의 고통 속에서 그들을 다시 보셨다. 타인의 고통이 숫자로 계산되거나 통계로 처리되지 않고, 하나하나의 얼굴로 다가올 때, 사랑은 윤리를 다시 쓰기 시작한다.
하나님은 심판을 취소하신 것이 아니라, 그 심판을 자기 안에 끌어안으셨다. 무너져야 할 도시를 앞에 두고, 무너지는 심장은 하나님의 쪽이었다. 그분은 피하지 않으셨다. 두 눈을 감지 않으셨다. 대신, 울었다. 심판을 내려야 마땅한 자리에서, 그분은 자신을 낮추고 기다리셨다. 그 기다림은 형벌을 미루는 유예가 아니라, 사랑이 머무는 자리였다. 하나님은 니느웨를 다시 보셨고, 그들의 고통을 다시 들으셨다.
아브라함 헤셀이 말한 하나님의 ‘파토스’—사랑과 고통이 포개진 그 심장은 여기서 절정을 이룬다.[9] 요나는 얼음처럼 언어를 던졌고, 하나님은 불꽃처럼 가슴을 내어주셨다.
십자가의 중심에도 이 ‘머뭇거림’이 있다. 돌이킴은 사랑이었다. 형벌을 유예한 것이 아니라, 자신 안으로 끌어안은 사랑이었다. 요나는 그 사랑을 감당하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그 사랑 없이는 결코 움직이지 않으셨다.
그 사랑은 폭력의 심연을 가로지르는 길이었다. 복수를 유보하는 침묵이었고, 심판을 넘는 기다림이었다. 하나님은 마땅히 쏟아야 할 진노를 멈추셨고, 멈춘 그 자리에서 다시 품으셨다. 사랑은 그렇게, 뿌리 깊은 상처 위에 피어났다.
그분의 손이 들리지 않은 이유는, 칼을 꺼내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분의 발이 다가오지 않은 까닭은, 죄의 무게를 짓밟지 않기 위해서였다. 하나님은 그저, 머뭇거리며 계셨다.
이제, 우리의 차례다. 내 안에 숨은 니느웨는 어디에 있을까. 도망치던 걸음을 멈추고, 하나님을 다시 마주해야 할 시간이다. 회개의 말은 익숙하지만, 그 말을 따라 살아내는 일은 언제나 낯설다. 그러나 바로 그 낯선 길에서, 하나님은 여전히 머뭇거리며 나를 기다리고 계신다.
익숙한 죄의 리듬에서 한 걸음 비켜서는 것—그것이 시작이다. 정당화의 언어를 내려놓고, 회피의 눈빛을 거두고, 내 안의 니느웨를 마주하는 일. 그 만남이 변화의 문을 연다.
멈추었던 발을 다시 떼자. 주저앉았던 마음을 다시 세우자. 도망의 끝자락에서 비로소 열리는, 사랑을 감당하는 새로운 길이 있다. 하나님은 다시 우리를 부르신다.
다시, 우리가 사랑할 차례다.
걷는 자의 입술
조원태
나는 많은 말을 준비하지 않았다
그저 걸었다
사십 일의 거리를
그 말 한 줄과 함께
“니느웨는 무너질 것이다”
짧은 말이었다
그러나 내 안의 두려움이
그 말에 무게를 더했다
사람들은
내 말보다 걸음을 들었고
내 입술보다
내 얼굴을 읽었다
변화는 설득이 아니라
진심에서 시작되었고
말보다 먼저
순종이 도시를 흔들었다
그분이 말씀하셨기에
나는 말했고
그 말은 내 것이 아닌
그분의 길이었다
각주) 1. 요나서 1–2장과 3–4장은 구조적으로 서로를 비추는 평행 구도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문학적 반복은 히브리 성서에 흔한 '거울 구조'(mirror structure)이며, 독자가 요나의 내면 변화와 하나님의 일관된 자비를 더 깊이 인식하도록 돕는다. (Jack M. Sasson, Jonah, Anchor Bible 24B, New York: Doubleday, 1990, pp. 16-18)
2. 하나님은 요나의 설교를 통해 단지 개인의 감정만을 자극하신 것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가 구조적 악과 삶의 방향을 다시 돌아보도록 이끄셨다. 회개는 눈물로 끝나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향해 걷는 공동체적 결단이다. 착취를 멈추고, 타인의 고통 위에 서지 않겠다는 실천적 변화—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회개의 본질이다. (Tim Keller, The Prodigal Prophet: Jonah and the Mystery of God's Mercy, New York: Viking, 2018, pp. 87–90)
3. 자기 안에서 두 사람이 싸우는 것을 요나는 느꼈다. 순종하려는 자신과 저항하려는 자신이 서로 얼굴을 마주했다. 완전히 거듭난 사람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살아있는 옛사람의 흔적이 그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자신 안의 끊이지 않는 내적 분열이 그의 고통을 더했다. 그는 이 긴장 속에서 절박하게 부르시는 하나님을 외면할 수 없었다. (Jacques Ellul, The Judgment and Salvation of Jonah, p. 71-73)
4. Jack M. Sasson, Jonah, Anchor Bible 24B, New York: Doubleday, 1990, p. 231
5. 이민자보호교회 네트워크(이보교)는 2017년, 트럼프 행정부의 반이민 행정명령에 대응하여 미국 내 한국계 교회들이 시작한 신앙적 시민연대이다. “교회는 피난처가 되어야 한다”는 신념 아래, 이보교는 서류미비 이민자들에게 법률적 보호와 영적 돌봄을 동시에 제공해 왔다. 법률 전문가, 목회자, 시민단체가 함께하는 이 사역은 뉴욕과 뉴저지를 시작으로 미국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지금도 여전히 가장 약한 이들의 피난처가 되기 위해 현장에 머물고 있다.
6. 요나가 사역하던 시기의 앗수르는 기근, 역병, 반란, 일식 등 연이은 재난을 겪고 있었고, 사람들은 그것을 더 큰 재앙의 전조로 여겼다. 하나님께서 이런 위기를 통해 니느웨가 요나의 메시지에 귀 기울일 수 있도록 길을 여신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이러한 사건들로 인해 통치자들과 백성들이 이방 선지자의 말에 유달리 주목했을 것이다.” (Daniel C. Timmer, A Gracious and Compassionate God: Mission, Salvation, and Spirituality in the Book of Jonah (Phillipsburg, NJ: P&R Publishing, 2011), p. 94; Tim Keller, The Prodigal Prophet: Jonah and the Mystery of God's Mercy, p. 85에서 재인용) 단, 이런 사회학적 요인만으로는 니느웨의 깊은 회개를 다 설명할 수 없다. 그 깊은 변화는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심연을 꿰뚫는 은총의 역사였다.
7. Jacques Derrida, Paper Machine, trans. Rachel Bowlby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5), p. 100.
8. Emmanuel Levinas, Totality and Infinity: An Essay on Exteriority, trans. Alphonso Lingis (Pittsburgh, PA: Duquesne University Press, 1969), p. 79. 레비나스는 타자와의 만남이 기존의 자기 중심적 윤리를 해체하고, 새로운 책임의 윤리를 요구한다고 본다. 요나서의 변화도 바로 이러한 윤리적 요청과 맞닿아 있다.
9. Abraham Joshua Heschel, The Prophets, vol. 1 (New York: Harper & Row, 1962), pp. 3–5. 헤셀은 하나님의 '파토스'를 단순한 감정이 아닌, 인간의 고통에 대한 하나님의 깊은 연루와 응답으로 설명한다. 하나님은 냉담한 관찰자가 아니라, 인간의 역사에 함께 고통하시는 분이며, 이 감정의 깊이야말로 예언자 정신의 중심이라고 말한다.
- 이전글왜 나는 정당해야만 하나? (요나 4:2-3) 25.08.23
- 다음글왜 사는가? (요나 2:10) 25.08.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