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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재글 왜 은혜인가? (요나 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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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54회   작성일Date 25-08-23 16:49

    본문

    요나서로 묻는 17개의 질문

    왜 은혜인가? (요나 2:2-9) 

     

    어떤 말은 들려오기 전에 먼저 다가온다. 은혜라는 말이 그렇다. 손 내민 적 없는데 먼저 와 닿고, 구하지 않았는데 스며드는 따뜻함. 요즘 나는 그 말 하나에 기댄다.

     

    지난 글에서 언급했듯, 간 이식이 난관에 부딪힌 다음날이었다. 하나님 앞에 무릎 꿇은 나를, 더 깊은 바닥이 기다리고 있었다. 동생이 의식을 잃고 쓰러졌고, 사이렌 소리와 함께 밤을 깨우며 우리는 국립암센터로 달려갔다.

    불과 하루 전, 간 이식을 주려던 희망이 무너진 그 벽은 그날 새벽엔 바닥 축에도 끼지 못했다. 아직도 중환자실 안에 있다. 빛 없는 물고기 뱃속처럼, 오늘을 견디며 내일을 알 수 없다. 하루 사이에 바닥이 바뀌었다. 어제의 절망은 오늘의 절망보다 덜 절망 같았다.

    내 인생에 하나님은 끊임없이 더 깊은 바닥의 교체로 이끄시는 것일까. 그때마다 나는,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줄 알았는데, 그 아래에 또 하나의 바닥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간 이식은 이제 말로 꺼낼 수 없는 이야기가 되었다. 기도밖에 할 수 없었다. 아무 응답도 없었다. 하지만 그 침묵조차, 어쩌면 하나님의 대답이었다. 

    이 바닥은 나만의 것이 아니었다. 오래전 요나도 그 깊이를 알았다. 말씀이 들리자 그는 도망쳤고, 발에는 고집이 묻어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는 물고기 뱃속에서 신음한다. 빛 하나 스며들지 않는 그 어둠. 숨이 막히는 비린내. 손을 뻗어도 닿는 것이 없는 그 안에서, 요나는 기도했다(욘 2:2).

    그것은 가라앉는 무게였다. 아직 바뀐 건 없다. 여전히 바닥, 여전히 어둠. 그런데 요나는 구원을 말한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욘 2:9)

    그 구원은 눈앞의 탈출이 아니라, 깊은 어둠 속에서 건져 올린 단어 하나였다. 가장 낮은 곳에서 떠오른 한 단어. 헤세드(욘 2:8)—은혜였다.¹ 헤세드는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조건 없이, 포기하지 않고 끝내 품으시는 사랑이다. 우리는 그 다정한 끈기를 '은혜'라 부른다. 

    고통이 끝나지 않았지만, 그 안에서 피어오른 그 이름 하나. 가장 깊은 데서 건져 올린 기도. 그 단어 하나로 요나의 바닥은 문턱이 되었다. 끝이 은혜가 건너온 문턱이 되었다.

     

    은혜는 '내 잘못이야'에서 시작된다 

     

    요나는 안다. 자기를 그곳까지 밀어 넣은 것이 하나님의 심판임을(욘 2:3). 그리고 그 심판 속에도 자기를 향한 다정한 마음이 숨어 있었다는 것을. 그는 더 이상 변명하지 않는다.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외면했고, 물속 깊이 내려간 것이 자업자득임을 안다(욘 2:4).

    물은 그의 영혼을 감싸고, 바다풀이 머리를 휘감고, 산의 뿌리 아래 땅이 그를 가두었다(욘 2:5–6). 그 모든 절대적인 무능 앞에서 요나는 마침내 자신의 죄를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는 그 상황에서 구해 달라고 울부짖지 않는다. 탈출을 요구하지도 않고, 용서를 애원하지도 않는다. 요나는 이미 구원받은 자처럼 하나님을 찬양한다. 무너진 자리 위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다정한 손길이 있었다.

    타락 이후, 사람은 이렇게 말해왔다. "내 잘못이 아니야. 너 때문이야. 하나님 탓이야." 아담과 하와 이후 반복된 문장이다. 그러나 요나는 다르게 말했다. "내 잘못이야." 그 말은 문이었다. 죄가 고백된 그 자리, 심판의 그림자가 드리운 곳에서 은혜의 빛이 스며들었다.

    거짓된 우상을 내려놓자, 바닥에서 진주처럼 은혜가 떠올랐다. 하나님은 그 고백 위에 수술대를 펴셨고, 심판의 감옥은 은혜의 치료실로 바뀌었다. 은혜의 메스는 오래된 고집과 숨은 종기를 꿰뚫었다. 

    요나는 안다. 은혜는 스스로 빠져나올 수 없는 무능의 자리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그 바닥에서, 들리지 않는 응답이 들려왔다. 그래서 그는 아직 어둠에 있지만 감사한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지만 찬미한다. 더 이상 아래는 없다는 그 절망의 끝에서 하나님은 은혜로 드러내신다. 그곳이 끝이 아니라, 문턱임을 알게 하신다.  

     

    은혜는 늘 기다리고 있었다

    은혜는 늘 늦게 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한 번도 늦은 적이 없다. 가장 깊은 바닥에서야 비로소 들리는 응답이 있기 때문이다. 요나는 고백했다. “나는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욘 2:4) 그 말엔 체념이 아니라, 끝내 놓지 않겠다는 갈망이 담겨 있었다. 우리가 이미 지나쳤다고 여긴 그 자리에, 은혜는 먼저 도착해 있었다.

    은혜는 요나가 태어나기 전부터, 말문을 열기 전부터, 이미 흐르고 있었다. 하나님의 부르심보다 먼저, 요나의 도망보다 앞서 걸었다. 그가 니느웨를 향해 나아가는 길목에서 결국 마주하게 될 진실—하나님은 파괴보다 구원을 택하신다는 것—그 모든 깨달음조차 은혜의 일부였다.

    요나가 죄를 고백하기도 전, 은혜는 바닥보다 더 깊은 곳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림이란 이름으로, 포기하지 않는 사랑으로, 그를 향해 손을 내밀고 있었다.

    탕자가 돌아오기 전, 아버지는 이미 문 앞에 서 있었다. 요나가 입도 열기 전, 하나님의 귀는 열려 있었다. 우리가 등을 돌리기 전부터, 하나님은 돌아올 길을 펴고 기다리셨다. 은혜는 늘 먼저 도착해 있었다. 눈치채지 못한 사이, 벌써 우리 안에 와 있었다. 지치지 않는 기다림으로, 들리지 않는 속삭임으로, 우리가 부르기도 전에.

    은혜는 요나의 회개를 조건으로 거래하지 않는다. 오히려 회개하도록 이끄는 힘, 변화를 가능하게 한 다정한 손길이었다. 요나는 그 품에 완전히 침몰되었을 때에야, 하나님 앞에 “내가 잘못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다.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이미 건져 올리신 것처럼. 바닥인데도, 거기가 응답이 되면 그곳은 은혜의 문턱이다.  
     

    유독 이번 글은 물고기 뱃속 같던 시간을 가로질러 쓰고 있다. 중환자실. 빛도 없고, 소리도 닿지 않던 그곳에서, 하루 만에 동생이 눈을 떴다는 연락이 왔다. 숨결이 돌아온다. 먼저 찾은 이름이 ‘형’이었다. 지금 국립암센터 앞, 이 물고기 뱃속 같은 중환자실의 문을 바라보며 면회 시간을 기다린다. 아직 그 문을 열지 못한 채, 저 안에서 동생이 어떤 모습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물고기 뱃속과도 같은 그곳에서 은혜는 이미 도착해 있을지도.

    그 기다림은 절망이 아니라, 은혜의 예고편이다. 헤세드는 무너진 존재를 다시 빚는 창조의 행위이며, 다시 태어나게 하는 손길이었다. 요나는 그 어둠 속에서 다시 태어났다. 심판을 통과한 잿더미에서 헤세드에 붙들린 존재로.

     

    미완료의 사랑

    히브리어 시제는 두 가지 뿐이다. 완료와 미완료. 완료는 끝난 일이고, 미완료는 계속되는 일이다. 바다가 요나를 삼킨 것은 완료, 하나님이 요나를 붙드시는 일은 미완료. 

    바다의 일은 모두 완료다. “큰 물이 나를 둘렀고”(욘 2:5), “파도와 큰 물결이 내 위에 넘쳤고”(욘 2:3), “바다풀이 내 머리를 감쌌다”(욘 2:5). 모두 끝난 일, 되돌릴 수 없는 심판의 언어다. 반면에 하나님의 일은 미완료다.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욘 2:2),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다”(욘 2:6). 이는 히브리어로 와야아네니(וַיַּעֲנֵנִי), 왈타알(וַתַּעַל)—둘 다 미완료형이다.² 아직 끝나지 않은 일. 과거에 시작되었지만 지금도 이어지고, 미래까지 계속될 손길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멈춘 적이 없다. 한순간에 불붙었다 꺼지는 불씨가 아니다. 어제도 시작되었고, 오늘도 흐르고 있으며, 내일도 이어질 물길이다. 심판은 닫혔지만, 은혜는 열려 있다. 물결처럼 밀려와 우리를 적시는 그 사랑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단테는 『신곡』에서 말했다. “하나님의 사자가 지나가도록 지옥의 가장 강한 성의 가장 비밀스러운 벽이 무너졌다. 그때부터 지옥의 터진 틈은 열려 있다.”3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그분은 그 지옥의 벽을 깨셨다. 심판은 더 이상 봉인된 결말이 아니었다. 틈이 생겼고, 그 틈으로 은혜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물고기 뱃속은 바로 그 틈이었다. 

    은혜는 그 틈을 따라 내려왔다. 요나가 고백하기도 전에, 하나님은 미완료형의 손길로 다가오셨다. 심판은 완료되었지만, 은혜는 아직도 열려 있다.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날도.

    우리는 종종 지옥 같은 현실을 마주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일은 아직 마침표를 찍지 않았다. 바다는 완결되었지만, 은혜는 미완성이다. 미완료의 사랑은 중단 없이 내일로 걷는다. 그리고 지금, 이 문장을 읽는 당신에게로 향하고 있다. 하나님은 아직 말하지 않은 당신의 기도를, 이미 듣고 계신다.

     

    이 글은 요나의 물고기 뱃속 삼일처럼 쓰였다. 동생이 쓰러진 첫날, 중환자실에서 깨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셋째 날, 그리고 그날 바로 면회가 허락되었다. 

    중환자실 안, 동생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보며 웃었다. 나는 울었다. 살아 있다는 사실 하나로도 목이 메었다. 동생은 손을 내밀었고, 나는 그 손에 입을 맞췄다. 바닥이라 여겼던 그 자리, 끝이라 믿었던 그곳이 문이었다.

    단테가 그린 ‘지옥의 금 간 성벽’처럼, 심판의 벽은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무너졌다. 요나의 바닥은 끝이 아니라, 은혜의 입구였다.

    예수님은 요나보다 더 깊은 심연으로 내려가셨다. 요나가 예고자로서 상징만을 보여주었다면, 예수는 그 길을 실제로 걸으셨다. 그분은 단 한 사람도 포기하지 않으시기에, 가장 어두운 심판의 자리까지 발을 옮기셨다. 요나가 도달한 바닥, 기도조차 시작되지 않은 그 순간에, 예수는 먼저 거기 계셨다. 심판의 절정이었던 그 자리는, 예수가 지나가며 은혜의 문으로 바뀌었다.

    요나는 몰랐다. 토해질 거라고는, 다시 시작될 거라고는. 그가 죽음이라 믿었던 자리가, 생명의 시작이 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은혜는 과거의 기억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 움직이는 생명의 힘이다. 아직도 계속되는 하나님의 이야기. 멈추지 않는 손길. 은혜는 언제나 미완료다. 그리고 그 미완료의 심장 안에 우리가 살아 있다.

     

    은혜는

    기억보다 먼저 왔다

    기도가 닿기도 전에

    눈물이 흐르기도 전에

    내 안에 살고 있었다

     

    각주)¹ 헤세드는 본래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으로 자주 번역되지만, 문맥에 따라 “자비,” “충성,” “신실함,” “친절,” “헌신” 등 다양한 의미로 확장된다. Jack M. Sasson은 요나서 2:8(히 2:9)에서 이 단어를 “다시 받을 수 없는 은총(gratification)”으로 해석하며, “우상 숭배자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지 못한다”는 경고로 읽는다. Phyllis Trible는 응답 없는 침묵의 자리를 하나님의 언어가 시작되는 지점으로 해석하며, 요나가 다시 붙든 '은혜'란 단어 역시 그 절망 한복판에 놓여 있던 것이라고 덧붙인다. Jack M. Sasson, Jonah (Anchor Bible; Doubleday, 1990), p. 198; Phyllis Trible, Texts of Terror (Fortress Press, 1984), p. 15. 

    ² Jacques Ellul, The Judgment and Salvation of Jonah, trans. Geoffrey W. Bromiley (Grand Rapids: Eerdmans, 1971), p. 52.

    ³ Dante Alighieri, The Divine Comedy: Inferno, trans. Allen Mandelbaum (New York: Bantam Books, 1982), Canto VIII, ll. 85–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