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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재글 왜 바닥인가? (요나1: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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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59회   작성일Date 25-08-23 16:47

    본문

    조원태 목사의 '요나서로 묻는 17개의 질문'

    왜 바닥인가? (요나 1:17–2:1¹)

     

    요나는 바다에 던져졌다. 그의 몸이 가라앉는 그곳에서, 태초의 혼돈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² 빛과 소리가 사라진 그곳에서, 그는 살아 있는 모든 것과 단절되었다. 산의 뿌리 아래, 땅의 빗장이 닫힌 곳. 단순한 침몰이 아니라 버림받는 존재로의 추락이었다.

    예수께서도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로부터의 단절을 절규하셨다. 요나처럼, 철저한 버림의 순간이었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막 15:34). 바닥은 철저한 단절의 자리였다.

    요나는 죽음 안에서야 단절의 진의를 깨달았다. 하나님을 떠났던 자신이 이제 하나님의 부재를 마주했을 때, 그 단절은 이전의 모든 거절보다 깊었다. 버림받는다는 것은 끝이 아니라, 존재의 무게를 사라지게 만드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 바닥에서, 절망의 숨 끝에서 또 다른 숨을 만났다. 죽음과 삶 사이, 물의 경계에서, 하나님의 숨결이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숨겨진 손길

    요나는 살아 있는 무덤에 삼켜졌다. 장례도 고별도 없이, 말없이 묻혔다. 발끝에서 익숙한 육지가 사라지고, 세상이 닫혔다.

    그 순간, 눈앞에 입이 열렸다. 물고기의 입이었다. 뼈처럼 단단한 혀 아래, 차가운 물결이 몸을 감쌌다. 물고기 뱃속은 요나를 눕혔다. 팔도 다리도 접고, 말마저 닫은 채 그는 그저 거기 있었다. 숨죽인 자리였지만, 하나님은 그곳을 흙으로 여기셨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곳에서, 하나님은 시작하셨다. 씨앗이 흙 속에서 깨어나듯, 어둠은 곧 잉태였다.

    요나서에는 유독 '큰'이라는 단어가 반복된다. 하나님은 요나의 길을 '큰 것들'로 막고, 이끌고, 붙들었다. 큰 도시 니느웨는 그가 가야 할 방향이었고(욘 1:2), 큰 바람은 그가 도망치던 길을 막았다(욘 1:4). 그리고 큰 물고기는 포기하려던 순간에 기다리던 구원이었다(욘 1:17). '큰'이라는 단어 안에, 하나님의 멈추지 않는 손길이 담겨 있었다.

    에디슨은 자신의 수많은 실패 앞에서 요나를 떠올렸다고 한다. 그의 책상 서랍에서 발견된 메모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캄캄한 곳에 떨어졌을 때는 요나를 생각하자. 그는 캄캄한 뱃속에 떨어졌지만 끝내 아무 이상 없이 나오고야 말았다.”³ 어쩌면 요나의 큰 물고기는 실패 앞에 있는 우리를 위한 예비일지도 모른다.

    요나서의 구석구석에는 하나님의 숨은 준비가 놓여 있다. 큰 물고기(1:17), 박넝쿨(4:6), 벌레(4:7), 뜨거운 동풍(4:8)—그것들은 모두 하나님이 정성스럽게 배치하신 시간의 징표였고, 그분의 이야기를 따라 하나씩 펼쳐지는 은혜의 장면들이었다.

    '예비'(히. 마나)라는 단어는 오직 하나님만이 주어일 때 사용된다. 인간은 스스로 예비할 수 없다. 사막에 숨겨진 생수, 광야의 구름기둥, 이삭을 대신한 숫양, 이 모든 '여호와 이레'의 예비하심은 우리가 여기 설 수 있게 한 징검다리다. 내가 끝이라 여긴 곳에, 하나님은 시작을 예비하셨다.

     

    바닥, 생각의 뜀틀

    물고기가 요나를 삼켰다. 사흘 밤낮을 그 뱃속에 있었다. 요나는 그곳을 '스올의 뱃속'(욘 2:2)이라 했다. 지옥, 죽음의 장소. 산의 뿌리까지 내려간 해저, 땅의 빗장이 그를 막아섰던 곳.

    팀 켈러는 이 물고기 뱃속을 '잔인한 자비'라 표현했다.⁴ 예수님 또한 요나의 물고기 뱃속을 당신의 무덤에 비유하셨다.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마 12:40).

    요나는 계속해서 '내려갔다'. 욥바로, 배 밑층으로, 해저로, 그리고 마침내 물고기 뱃속으로. 그곳은 완전한 죽음의 바닥이었다.

    시편 18편처럼, 스올의 줄이 그를 둘렀고 사망의 올무가 그를 붙잡았다. 요나는 그 바닥에서 중요했던 모든 것을 잃었다. 의미 있었던 것이 무의미해지고, 단단했던 확신은 모래처럼 무너졌다. 그리고 그 바닥에서 비로소 기도의 문이 열렸다.

    요나는 바닥까지 내려가고서야 자신을 보았다. 단단한 줄 알았던 자신이, 실은 깨지는 진흙이었다. 평온했던 날엔 스쳐 지나가던 결함들이, 그곳에서는 하나씩 이름을 가졌다.

    그리고 그제야, 그는 돌아섰다. 남은 것이라곤 하나님의 이름뿐이었다. 예수님만 남을 때까지는, 예수님만 있어도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목숨을 내려놓아야 비로소 새 숨이 시작된다. 요나가 물에서든 믿음에서든 다시 올라가려면, 먼저 그의 바닥에 닿아야 했다. 올라가는 길은, 언제나 내려가는 쪽에 있었다. 하나님 은혜의 가장 큰 신비는, 자주 가장 낮은 곳에서 시작된다.

    요나의 이야기는 누가복음의 탕자와 겹친다.⁵ 1~2장의 요나는 둘째 아들 같다. 아버지를 떠나 풍랑을 맞고, 물고기 뱃속이라는 돼지우리 바닥에 떨어진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눅 15:17). 돌아섬은 언제나 바닥에서 시작된다. 생각의 높이가 땅보다 낮아질 때, 마음은 비로소 하늘을 향한다. 바닥은 수렁이 아니라 생각의 뜀틀이었다.

    우리는 바닥에 닿고 나서야 하나님을 생각한다. 탕자가 처음 아버지를 떠올린 것도, 요나가 처음 기도한 것도, 모두 바닥이었다. 그리고 나 역시, 인생의 깊은 밤들 속에서, 바닥 끝에서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바닥은 물고기 뱃속이 아니었다. 바닥은 결국, 나였다.

    바닥은 ‘내가 죄인이다’라는 사실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자리였다. 우리는 예수를 죽인 것이 나라는 사실을 교리적으로는 고백하면서도, 누군가 ‘너 때문이야’라는 말 한마디 앞에서는 단 1초도 그것을 참아내지 못한다. 내가 바닥임을 끝내 거부하기 때문이다.

    바닥의 은총은, 그 바닥이 내가 맞다고 인정하는 순간에 시작된다. 바닥은 받아들여지는 입구다. 그 입구는 낮을수록 넓어지고, 낮을수록 더 많은 것을 품는다. 바닥에서 만난 하나님은, 하늘이 내려온 자리였다. 바닥은 곧 하늘이었다.

    중학교 2학년 겨울밤이었다. 어머니가 섬기시던 시골 오지 교회로 가는 길, 막차는 떠나 있었고, 남은 길은 공동묘지 세 구비를 넘는 산길뿐이었다. 돌아갈 수는 없었다. 도움을 청할 사람도 없었다. 그 자리가 내게 바닥이었다. 등 뒤는 어둡고, 앞은 막막했다. 눅눅하고 차가운 두려움이 폐를 조여왔다. 어린 마음은 이미 얼어 있었고, 숨은 얕았다.

    운동화 끈을 조여 맸다. 나무에 걸린 비닐이 울부짖고, 바람은 귀를 스치며 흩날렸다. 무덤의 기척이 등을 밀고, 발밑의 낙엽은 자꾸만 멈추려는 몸을 나무랐다.

    찬송이 시작된 건, 두려움을 숨 쉬듯 삼킬 때였다. 기억나는 모든 찬양을 부르며, 나는 그 밤을 뚫었다. 한 음 한 음이 발자국이 되었고, 숨이 떨어질 즈음, 눈앞에 희미한 불빛이 열렸다. 목적지에 다다랐을 때, 옷은 젖어 있었고, 두려움은 이상하리만큼 사라져 있었다.

    돌아갈 수 없었던 그 자리가, 내게는 바닥이었다. 앞도 뒤도 막힌 그 자리에서, 나는 물고기 뱃속처럼 숨 막히는 밤을 지나고 있었다. 그날 밤, 하나님은 겁 많던 소년의 가슴에 길을 내셨다. 바닥 끝에 열리는 길, 그 길의 이름은 용기였다.

    누구에게나 지나야 할 한밤의 고개가 있다. 그 고개를 넘는 찬송 하나가, 기도 하나가, 다시 살아가게 한다. 그 바닥은 장애가 아니라, 뜀틀이었다.

     

    기도, 하나님밖에 남지 않은 자리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욘 2:1). 물고기 뱃속에서 요나는 모든 것을 잃었다. 바다도, 선원도, 이름도, 방향도 사라졌다. 오직 하나님만 남았다. 그것이 바닥이다. 하나님밖에 남지 않아, 기도 외에 할 수 없는 곳.

    우리가 바닥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그곳에서는 더 이상 핑계도, 위장도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곳에서 말씀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다시 부르게 하신다.

    나는 3년 전, 대장암 판정을 받고 대장의 절반을 잘라내는 수술을 받았다. 이어 2년 전, 동생은 간암 말기 진단을 받았다. 의사는 최대 생존을 두 달로 내다봤다. 그 소식을 듣는 순간, 나도 함께 무너졌다. 그렇게 절박하게 하나님을 부른 적이 있었던가.

    간보다 더 컸던 18cm의 암은 28번의 항암 치료 끝에 사라졌고, 동생은 기적처럼 살아났다. 그러나 남겨진 간은 거의 망가져 있었다. 이제는 생존을 위해 간 이식 외에 다른 길은 없었다.

    나는 내 간을 주겠다고 결심했지만, 3년 전 대장암 수술 경력으로 인해 이식 기증 대상에서 제외됐다. 다시 벽이었다. 다시 바닥이었다.

    기도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 자리. 하나님만 남은 그 자리. 그곳은 내 인생의 물고기 뱃속이었다. 끝이라 여겼던 그곳에서, 나는 하나님이 다시 시작하실 것을 믿는다.

    바닥은 우리의 약함을 드러낸다. 감추어 두었던 흠결들이 스스로 말문을 연다. 나는 강하지도 선하지도 않다는 것을, 뼈처럼 자명하게 드러낸다. 그래서 바닥은 부끄럽지만, 동시에 투명하다.

    그 약함을 직시하고서야, 우리는 하나님만이 필요함을 깨닫는다.⁶ 올라가기 위해선, 내려가야 한다. 은혜는 항상 아래에서 배운다. 바닥은 수치가 아니라 입구다. 하나님께 항복할 수밖에 없는 문.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야 자신 안에 니느웨가 있음을 보았다. 가장 자비가 필요한 이는, 자기가 되어야만 했다.

    필립스 트리블은 요나서의 '뱃속'(히. מֵעֶה, meʿeh)이 남성 명사였다가 2장 1절에서 여성 명사로 전환된 점에 주목했다.⁷ 무덤처럼 닫혀 있던 그 공간이, 요나가 기도하기 시작하면서 생명을 잉태하는 자궁이 되었다는 해석이다.

    하나님은 도망치고 내려가던 요나를 물고기 뱃속에서 새롭게 빚으셨다. 스스로 닫힌 존재에서, 하나님을 향해 다시 열리는 사람으로.

    바울이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의 세례를 말했듯, 바닥은 죽음을 지나 새 삶으로 나아가는 문이다. 죽음의 입에서 기도가 열리고, 하나님의 손이 다시 시작된다.

    바닥에 있다고 좌절하지 마라. 그곳은 끝이 아니라, 다시 살아나는 자리다. 하나님만 남는 순간, 다른 무엇도 필요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항복 외엔 방법이 없는 자리. 그러나 그 항복이야말로 은혜의 시작이다.

    성찬은 예수님께서 바닥에서 내어주신 식탁이다. 무너진 살과 쏟아진 피로 차려진 생명의 빵. 그 양식을 먹는 자는 다시 일어난다. 바닥의 떡이 되고, 바닥의 잔이 되는 그분을 통해, 우리는 다시 걷는다.

    음부까지 내려가 사망을 이기신 예수님처럼, 하나님만 남은 그곳에서 항복하고, 다시 일어서는 바닥에 서자. 기도 외엔 다른 길이 없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다시 올리신다.

     

    바닥의 편지

                                                                                                                                         조원태 

    바닥은 차디찬 밥상이었다

    눈물 한 그릇, 밥보다 먼저 놓이고

    말은 목구멍까지 와 멈췄다

     

    이름조차 불리지 않던 계절

    나는 나를 잃었다

     

    누군가 나를 위해 울어준 기억

    묵묵히 버텨준 간 하나

    붙들려 있던 하루들이 있었다

     

    그제야 알았다

    물고기 뱃속은 무덤이 아니라

    기도가 다시 뛰는 심장이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깊이에서

    하나님은 나를 꺼내어

    다시 걷게 하셨다

     

    각주) ¹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요나서 1장 17절이 2장 1절로 시작된다. 이는 물고기 뱃속이라는 새로운 무대가 시작됨을 뜻한다. 요나서는 총 4장으로, 각 장마다 무대가 바뀐다. 1장은 바다 위의 배, 2장은 물고기 뱃속, 3장은 니느웨 성, 4장은 성 밖 언덕이다. 참조: T. Desmond Alexander, Obadiah, Jonah and Micah: An Introduction and Commentary (IVP Academic, 2021), p. 116.

    ² 자끄 엘륄은 구약성경에서 물이 종종 "죽음을 삼키는 혼돈"과 동시에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한다고 말한다. 홍수(창 7–8장), 홍해(출 14장), 시편의 바다(시 69:1–2)처럼, 물은 하나님의 통치를 필요로 하는 혼돈의 이미지다. 요나가 던져진 바다는 그 혼돈의 중심이었고, 물고기 뱃속은 죽음과 부활의 전환점이었다. Jacques Ellul, Judgment and Salvation: A Reading of the Book of Jonah, trans. Geoffrey W. Bromiley (Grand Rapids, MI: Eerdmans, 1971), pp. 41–43.

    ³ 1947년 2월 8일, 토마스 에디슨의 백 주년 생일에 그의 책상서랍에서 발견된 메모이다.

    ⁴ Timothy Keller, The Prodigal Prophet: Jonah and the Mystery of God's Mercy (Viking, 2018), p. 70.

    ⁵ Ibid., pp. 6–7.

    ⁶ 조셉 시틀러는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가장 낮아졌을 때, 우리 자신의 한계를 직면했을 때 가장 강력하게 경험된다"고 말했다. Joseph Sittler, Grace Notes: Sermons and Addresses (Grand Rapids, MI: Eerdmans, 2000)

    ⁷ Phyllis Trible, Rhetorical Criticism: Context, Method, and the Book of Jonah (Fortress Press, 1994), p. 1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