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닫힌 문은 열고, 막힌 길은 냅니다." (뉴스앤조이) 2025-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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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힌 문은 열고, 막힌 길은 냅니다.”
[인터뷰] 조원태 목사의 희망신학
미국이 벽을 높이고 있다.
국경, 비자 심사대, 이민법정.
닫히는 문 앞에서 이민자들이 서 있다.
하지만 이들에게 문을 열어주는 곳이 있다.
교회다.
피난처가 되고, 목소리를 대신 내주는 곳.
이민자보호교회 네트워크(‘이보교’)를 이끄는 조원태 목사를 만났다.
-국경 장벽을 높이는 것은 결국 미국을 고립시키는 ‘벽’이 될 것이라는 비판이 많습니다. 하지만 트럼프 행정부는 개의치 않는 분위기입니다. 이번 조지아주에서 벌어진 일을 보면, 마치 군사작전 같았어요.

맞습니다. 이번 조지아주 현대–LG 배터리 공장 단속은 그냥 불법 체류 단속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현장에 있던 이민 심사관조차 “법 위반도 아닌데 왜 잡아오느냐”고 물을 정도로 과도하고 무리한 단속이었어요. 이건 단순한 단속이 아니라, 법치라는 이름을 빌린 정치적 쇼였다고 봅니다. 이번 사태는 반이민 정서를 부추기게 될 거고, 미국과 한국의 관계까지 해칠 수 있어요. 위험한 정치적 도박이라 생각합니다.
-이민자보호교회 네트워크에서 성명서를 발표하셨지요?
이번 성명서는 시민참여센터(KACE)와 이민자보호교회네트워크(KASCN)가 함께 발표했습니다. 세 가지를 강조했어요. 첫째, 이민 단속을 정치에 이용하지 말라는 겁니다. 산업 협력 현장에서 이민자를 볼모로 삼은 건 정치적 폭력입니다. 둘째, 제도의 빈틈을 메워야 한다는 겁니다. 제도 실패를 노동자에게 떠넘기는 일이 되었잖아요. 셋째, 인권 보장이에요. ICE의 군사식 단속은 명백한 인권 침해입니다.
-앞으로 이보교의 역할이 더 중요해지겠네요.
맞습니다. 지난 8년 동안 이보교는 단속 현장에서 체포된 이들을 돕고, 추방 위기 가족을 지키며 법률, 구호 활동을 해왔어요. 앞으로는 피난처 역할을 더 강화하려 합니다. 이민자들이 안심하고 의지할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려 하고요. 비자 제도 같은 구조적 문제 해결을 위해 시민단체와 연대해서 꾸준히 목소리를 내려 해요. 또 한인뿐 아니라 라틴계, 아시아계, 아프리카계 이웃들과 손잡고 힘을 모을 계획입니다.

-앞서 8년 동안이라고 하셨는데, 그럼 이보교 활동이 시작된 때가 트럼프 1기 때인가요?
네, 2017년에 설립됐습니다. 그때 트럼프가 집권하면서 7개 아랍 국가 국민의 입국을 금지하는 행정명령이 내려졌고, 서류미비자들(흔히 불법체류자로 불리는 사람들)이 무작위로 체포되고 추방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가까운 이웃들이 힘없이 쫓겨나는 현실을 목격하게 되었어요. 그러던 중 2월 27일, 미국 가톨릭 대주교가
“교회가 피난처가 되겠습니다.”
라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짧은 기사였지만 인상 깊었습니다. 저 역시 어린 시절 피난처 없이 절망적인 순간을 마주한 기억이 있었기에 큰 울림이 있었어요. 그런데 한인교회 가운데 피난처 교회가 한 곳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뜻있는 분들과 의견을 모았고, 그해 3월에 이민자보호교회(이보교)를 출범시켰습니다. 현재 170여 개 교회가 함께하고 있어요.
-8년 동안 활동하시면서 많은 사연을 접하셨을 텐데요.
가슴 아픈 만남도, 보람 있고 행복한 만남도 셀 수 없이 많았죠. 말씀하시니 딱 떠오르는 한 장면이 있습니다. 뉴욕 플러싱에서 맨해튼 가는 친구를 배웅하려고 플랫폼에 서 있었는데, 기차가 도착했고 친구는 탔어요. 그 짧은 순간, 문이 열리자 전혀 모르는 한인 여성 한 분이 저를 보며 울먹이며 인사를 건넸습니다. 고맙다면서요. 자녀가 불안정한 다카(DACA) 신분을 가지고 있는데
“기댈 곳 없는 우리 곁에 있어줘서 고맙다”는 말을 전했습니다. 문이 곧 닫혀 더 대화를 나누지 못했지만, 그 순간 가슴이 먹먹해졌어요. 기댈 언덕 없이 하루하루 가슴 졸이며 사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구나, 실감하게 됐습니다.
-기차의 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그 순간을 상상해 봤어요. 문득 목사님 앞에도 그렇게 서 있던, ‘곁에 있어줘 고맙던’ 분들이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제가 갈 곳 없이 서 있을 때 지켜봐 주시던 수많은 분들이 있지요. 시간을 좀 거슬러 올라가 제 어린 시절부터 얘기해 보자면 고아원에서 만난 분이 계세요.
조목사가 유년기 시절을 보낸 고아원. 먼저 고아원에서 살던 시절 이야기를 해야겠네요. 제가 가정 형편 때문에 정읍의 한 고아원에서 자랐는데, 제 기억에 하루도 빠짐없이 맞았던 것 같아요. 밤이 되면 불이 다 꺼진 방에서 죽도나 쇠파이프 같은 것으로 이유 없이 매를 맞았습니다. 언제 어디서 또 맞을지 몰라 늘 공포 속에 살았죠.
그러다 어느 날 가출을 했습니다. 인근 전주로 도망쳤다가 며칠 뒤 터미널 근처에서 붙잡혔어요. 큰 벌을 받았고, 그 뒤에 원장님을 찾아가 무릎 꿇고 부탁했습니다.
“목사가 되는 것이 제 꿈입니다. 저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이 세상에 많을 거라 생각하는데, 그들을 돕고 희망이 되고 싶습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신학교에 갈 수 없습니다. 저를 놓아주십시오.”
원장님은 결국 저를 놓아주셨습니다. 이후에 전 무작정 전주로 갔고요. 길거리 전봇대에 붙은 ‘개인 과외 선생님 급구’ 광고를 보고 그 집을 찾아가 초등학생 두 아이를 가르치며 지냈습니다. 중학교 2학년부터 그렇게 생활했는데, 늘 홀로 있다는 느낌으로 살았어요.
-꺼내기 힘든 기억을 말씀해 주셨네요. 목사님 목소리가 담담하다 못해 오히려 밝게 느껴져서, 제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조금 난감했습니다. 그래도 그 시절 목사님 곁에 누군가 있었다니 참 다행이에요. 그분이 누구였나요?
한 청년이 고아원 문 앞에 매주 토요일 나타났어요. 꼬질꼬질한 저를 데리고 목욕탕에 가서 깨끗이 씻기고, 국밥집에서 국밥을 먹이고 자기 방으로 데려갔어요. 그리고 조용히 앉아 노래를 불러주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노래가 바로 ‘사막의 샘이 넘쳐 흐르리라’였습니다.
세월이 흘러 제가 나중에 이분을 영국에서 만났어요. 영국 유학을 갔을 때 우연히 마주쳤는데, 그분 민대근 목사님도 목사가 되어 있었고 저도 목사가 되어 있었습니다. 서로 깜짝 놀랐죠.
또 한 분은 중학교 2학년 담임이던 김영순 선생님입니다. 그때 막 부임하셨는데, 가출한 제자를 찾아 나서신 거예요. 스타킹이 찢어지고, 발에 피가 날 정도로 달려오셨는데, 언덕 위에서 저를 붙잡고 아무 말 없이 우시더라고요. 그분을 만나 제가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두 분 외에도 저에게 기댈 언덕이 되어 주신 많은 분들이 계셨어요.
-글을 썼던 시간이 또 하나의 피난처가 되었을 거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릴 때부터 글 쓰는 걸 좋아했어요. 11살 때부터는 매일 종이에 세 가지 꿈을 적었습니다. 첫째는 스물다섯 살 이전에 결혼하는 것, 둘째는 아이 셋을 낳는 것이었는데 결국 넷을 낳았고(웃음), 셋째는 목사가 되어 누군가를 돕는 삶을 사는 것이었어요.
매일 그 꿈들을 같은 문장으로 반복해 쓰면서 스스로 희망을 확인했습니다. 저의 곁을 지켜주셨던 어른들, 그리고 꿈을 그려보던 저의 시간이 당시 제 심리적 피난처였던 것 같아요.
고아원에서 자라 그 그림자를 안고 살아온 조원태 목사. 그러나 그 기억은 무겁게 짓누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깊은 측은지심으로 이끌었습니다. 조목사는 오래전부터 아이티의 고아원을 정기적으로 찾아가 손을 잡아주며 희망을 말해주고 또 뉴욕우리교회 부임 후 첫 외부 일정을 장애인 기관 방문이었다는 그의 발걸음처럼 약한 자들을 향한 마음은 늘 그의 사역의 출발점이었습니다. 사진은 아이티 고아원에서 아이들과 나란히 앉아 환하게 웃는 조목사.-세 가지 꿈을 모두 이루셨네요. 왜 목사가 되고 싶으셨나요?
어릴 때 책을 정말 좋아했어요. 어머니 말씀으로는 제가 책을 읽어주면 그대로 외웠다고 하더라고요. 그중에서도 제일 좋아했던 책이 슈바이처 전기였습니다. 신학자이자 의사였던 슈바이처가 아프리카에서 봉사하는 이야기는 어린 제 마음에 깊은 인상을 줬고, 그게 목사가 되고 싶다는 제 꿈의 씨앗이 되지 않았을까 합니다.
성경을 읽는 것도, 곁에 두는 것도 좋아했다.
찰스 해돈 스펄전(Charles Haddon Spurgeon) 목사의 저서에 빠져 성서와 설교에 눈을 떴다. 그 영향으로 영국 유학을 결심했다.
1992년 한신대학교와 한신대학원을 졸업한 뒤 서울한신교회를 섬기던 조원태 목사는 2001년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한신대학교, 한신대학원을 졸업한 뒤 한신교회를 거쳐 지방의 한 교회를 섬기던 조원태 목사는 2001년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영국 버밍엄대에서 구약학을 전공하셨어요. 유학을 결정하기까지 쉽지 않으셨을 것 같습니다.
결정은 쉬웠는데 과정이 약간 힘들었습니다. 제가 대학원 다닐 때 결혼했어요. 그때 지방에 있는 작은 교회에서 한 달에 18만 원을 받았는데, 거기에서 십일조도 내고 하면서 조금씩 돈을 모아 유학 자금을 마련했지요. 2000년에 자그마치 500만 원을 모았습니다. 그때는 큰 부자가 된 것 같았어요.
며칠 뒤, 인도에서 달리트 선교를 하던 선교사님이 교회에 오셨습니다. 그분이 “500만 원이면 예배당을 지을 수 있다.”고 하시는데, 순간 마음이 기울었습니다. 아내와 상의한 뒤 그 자리에서 전액을 헌금했어요.
유학 간다고 하면서 교회는 이미 사임했고, 무일푼이 되었지만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교회들을 찾아다니며 제 꿈을 말하고 “2년 동안 매달 2만 원씩만 투자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70%는 거절당했지만 너무나 감사하게도 시골 할아버지들이 쌈짓돈을 꺼내 주시더라고요. 그렇게 모은 돈으로 2001년 1월, 영국행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한국 돈으로 24만 원이 전 재산이었는데도 정말 신이 났습니다.
유학을 위해 준비한 재정을 모두 인도 선교에 바친 후, 학업의 길을 이어가기 위해 후원을 요청하는 카드.영국에 가서 학비와 생활비 벌려고 닥치는 대로 일했지요. 웨이터, 발톱 깎기, 홈케어, 마트 청소까지 안 해본 일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설명할 수 없는 여정이었습니다.
-박사 논문은 무슨 주제로 쓰셨을지 궁금해집니다.
호세아 11장을 주제로 논문을 썼어요. 호세아서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다양한 은유로 묘사하는데, 11장은 유독 부모와 자녀 관계로 표현됩니다. “어찌 내가 너를 버리겠느냐”는 하나님의 폭발적인 사랑이 드러나는 장이지요. 그 렌즈를 통해 성서를 새롭게 보게 되었어요.

제 인생의 화두는 결국 사랑입니다. 사랑이 부족했던 순간도 있었고, 사랑으로 가득했던 순간도 있었습니다. 그 모든 경험이 지금의 저를 만들었고, 누군가에게 절대적인 희망을 전할 근거가 되었다고 생각해요.
제가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아내를 만났으니 제 아내는 거의 30년 동안 제 삶의 변화를 다 지켜본 셈인데요. 어느 날 아내가 제 삶을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당신의 삶은 희망이다.”
박사 논문은 완성하지 못했습니다. 비록 박사 과정을 끝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그 공부 덕분에 성서와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론을 얻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그 ‘렌즈’를 통해 세상을 조망하고 있습니다.
플로리다 노회에서 성찬을 집례하는 조원태 목사. 흑인·여성·동양인·백인으로 구성된 집례자들과 함께, 화해와 평화의 의미를 담아 드려진 성찬 예식 -영국에서 공부 마치시고, 목사님의 다음 여정은 어디로 이어지나요?
2006년에 플로리다 세인피장로교회에서 사역했고, 2010년에 뉴욕으로 왔습니다. 그때 교회 이름을 ‘뉴욕우리교회’라고 지었어요. 예수님의 사랑으로 한 가족이 된 ‘우리’, 또 요한복음 10장에 나오는 양의 우리, 울타리처럼 연약한 사람들을 위한 피난처가 되자는 뜻을 담았습니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저는 이민자 문제나 한인 사회의 이슈를 잘 몰랐습니다. 2017년이 돼서야 이민자보호교회 세우고 활동하면서, 교회의 역할과 공동체의 가치를 더 깊이 돌아보게 되었죠.
-좀 전에 말씀하신 그 ‘렌즈’로 세상을 바라보며 ‘이보교’를 꾸려가고 계실 거란 생각을 해봅니다.
이보교의 비전은 단순히 긴급 상황에 대응하는 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교회가 피난처가 되고, 이웃이 서로 연대하고, 제도가 바뀌어 가는 그 과정에 끝까지 함께하고 싶습니다. 새로운 이웃들과의 더 큰 연대도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도, 함께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있으니까요.
저희는 뉴욕 최대 이민자 단체인 ‘뉴욕 이민자연맹’의 회원단체로 활동하고 있는데요, 거기서 만나는 이웃들을 볼 때마다 감탄합니다. 이렇게 따뜻한 사람들, 이렇게 멋진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세상에 많다는 사실에 늘 감사해요.
재시 잭슨 목사와 함께한 이보교 활동가들 (사진 왼쪽부터 박동규 변호사, 조건삼 목사, 조원태 목사.)-‘이보교’ 활동을 이어오면서 지켜온 원칙이 있을까요?
사실 누군가의 입장을 완전히 공감하고 이해한다는 건 정말 어렵습니다. 그래서 제가 늘 지키려는 두 가지 원칙이 있어요.
첫째는 피해자의 자리에서 생각하기입니다. 저는 제3자의 입장일 때가 많지만, 그 사람의 경험을 직접 겪어 보지 않으면 그 고통을 온전히 헤아리기 어렵죠. 그래서 최대한 그 자리에 서 보려고, 스스로 그 상황을 느껴 보려고 노력합니다.
둘째는 주도권 다툼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활동하다 보면 “내가 했다”, “내가 도왔다” 하는 식으로 시간을 낭비하고 일을 망치는 걸 자주 봐요. 저는 그런 데 힘을 쓰고 싶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누가 했느냐가 아니라 일이 제대로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제 에너지를 오직 그 부분에 집중하려고 합니다.
조원태 목사에게는 세 분의 스승이 있다.
성서를 통해 설교를 보게 했던 찰스 해돈 스펄전 목사, 아버지와 같은 존재로 성서를 통해 교회와 목회 현장을 보게 했던 한신교회 이중표 목사, 그리고 성서로 민족을 만나게 했던 문익환 목사. 이 세 분의 가르침은 조 목사로 하여금 성서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교회를 섬기며, 시대와 민족을 향한 사명을 발견하게 했다.
문익환 목사의 통일의 집에서 박용길 장로님과 함께 사진 왼쪽은 아들 조어진군.-3·1절 기념예배를 드렸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2020년에 3·1절 기념예배를 드리고 황기환 지사 묘소 참배를 했는데, 이는 단지 애국심을 고취하는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정의와 긍휼을 따라 오늘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묻는 신앙의 시간이었어요.
제가 새벽예배를 마치면 교회 근처 공동묘지를 산책하곤 하는데, 우연히 황기환 지사의 묘소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한 드라마의 실존 인물이라고 알려지기 전까지 황기환 지사는 역사 속에서 잊힌 분이었죠. 임시정부의 외교 활동과 독립운동에 헌신했는데 말이에요.
삼일절 기념예배을 마치고 독립운동가 황귀환의 묘에서 교인들과 함께한 조원태 목사.독립운동가가 홀대받는 현실은 지금 이 땅에서 추방의 두려움 속에 살아가는 이민자들의 현실과 닮아 있습니다. 그래서 3·1절 예배와 묘소 참배는 지금 이 땅에서 존엄을 보장받지 못하고 주변부로 밀려난 이들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와 직결됩니다.
-목사님의 ‘긍휼의 렌즈’로 현실을 보면, 또 어디에 초점이 맞춰지나요?

저는 한반도 평화에 초점을 맞추게 돼요. 정치적 협상만으로는 진짜 평화가 오지 않거든요. 긍휼과 사랑의 마음이 행동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길이 열린다고 믿습니다.
저는 한반도 평화를 제 인생의 소명으로 믿습니다. 그래서 정지석 목사님이 2012년 DMZ 접경지대 철원에 ‘국경선평화학교’를 열었어요. 거기서 실제 삶의 현장에서 평화를 배우고 나누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국제 청소년들과 DMZ 절반을 함께 걸으면서 ‘국경선 청소년 평화순례’도 계속 이어왔고요. 내년에는 한국과 미국 목사들의 합동 평화순례를 계획하고 있어요.
4.27 평화 손잡기 운동에서 손에 손을 잡고 남북한 대사관을 연결하는 행사를 가졌다.
그간 해온 활동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4·27 판문점 선언을 기념해 2018년에 뉴욕에서 열었던 ‘평화 손잡기 운동’입니다. 역사상 처음으로 사람들이 손에 손을 잡고 맨해튼에서 북한 대사관과 한국 대사관을 연결했어요. 그날 세계 도심 한복판에서 평화를 외쳤던 그 장면은 지금도 제 가슴에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조원태의 역할은 무엇이라 생각하시는지요?
저는 작은 불씨들을 지피는 불쏘시개 같은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목회자로서, 또 여러 분들과 함께 이민자보호교회를 섬기는 사람으로서, 저는 국경을 넘어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하며 더 큰 연대와 평화를 만들어 가고 싶습니다. 한반도의 평화는 단순한 정치 구호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을 따라 살아내야 하는 신앙의 과제입니다. 제 삶이 그 길에 작은 불씨라도 되길 바랍니다.
벽을 눕히면 다리가 되고, 벽을 밀면 문이 된다고 했던가. 세상에 다리와 문을 내기 위해 ‘단단한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던 조원태 목사. 인터뷰를 마치고 문을 열고 세상으로 나서는 그의 뒷모습에 문익환 목사의 시 한 구절이 겹쳐진다.
난 이유 없는 이 길을 다시 가야 하는군요
그럴밖에 다른 길이 어디 있겠습니까
당신이 절망하면서도
절망하지 않고 가신 길
내가 누군데 안 갈 수 있겠습니까
(〈나의 길 당신의 길〉 중에서)
조원태 목사가 걸어온 길과 앞으로 걸어갈 길은 결국 하나일 것이다.
그 길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붙들고, 고통 속에서도 사랑을 선택하며, 오래전 예수가 그랬듯 세상 속으로 기꺼이 들어가는 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