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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재글 조원태목사의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 안부, 궁전 안으로 들어온 페허 (뉴스앤조이) 2026-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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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1회   작성일Date 26-04-30 11:15

    본문

    안부, 궁전 안으로 들어온 폐허

    •  

    조원태목사의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

    조원태 목사의 연재『요나서로 묻는 17개 질문』을 통해 독자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은 바 있습니다. 독자층에 깊은 질문을 던지며 신학적·목회적 통찰을 나누어 온 그의 글은 특히 삶의 언어로 성서를 풀어낸 점에서 많은 공감과 지지를 받았습니다.

    이번에는 성서 66권 각 책의 서문(Threshold, 문지방 텍스트)을 따라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새로운 연재『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로 다시 시작합니다.

    이 시리즈는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라는 주제로 출발합니다. 특정 책의 프롤로그 분석을 넘어, 성경 전체의 첫 문장을 따라 걸어가는 실험적 글쓰기로서 목회와 문학, 신학을 잇는 연재가 될 것입니다.

    연재의 서막을 여는 글은 프롤로그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소개되며, 이후 매주 성경의 서로 다른 현관을 열어갈 예정입니다.

    이 연재가 독자들의 시야를 넓히고 성서를 다시 ‘시작의 자리’에서 읽게 하는 영적 초대가 되리라 믿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성경의 전체적인 가르침이 다시금 생생하게 느껴지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 편집자 주 -

    느헤미야 1:1-4
    하가랴의 아들 느헤미야의 말이라 아닥사스다 왕 제이십년 기슬르월에 내가 수산 궁에 있는데 내 형제들 가운데 하나인 하나니가 두어 사람과 함께 유다에서 내게 이르렀기로 내가 그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의 형편을 물은즉 그들이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자들이 그 지방 거기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 하는지라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수산 궁의 겨울은 흠 없이 빛났을 것이다. 윤이 나는 돌바닥 위로 왕의 잔을 받쳐 든 손이 지나가고, 붉은 밀랍으로 봉인된 문서들은 탁자 위에서 차갑게 굳어 갔을 것이다. 제국은 늘 그런 얼굴을 한다. 아무도 울지 않는 얼굴. 아무것도 무너지지 않았다는 듯한 얼굴. 그러나 그 매끈한 얼굴 위로, 먼 도시의 폐허가 한 줄의 소식으로 내려앉는다.

    예루살렘이 무너졌다. 성문들은 불탔다. 남은 사람들은 환난과 능욕 속에 버려져 있다.

    궁전의 돌은 그대로였다. 문은 닫혀 있었고, 잔도 깨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 소식이 한 사람 안으로 들어간 순간, 보이지 않는 성벽 하나가 먼저 무너졌다. 제국의 바닥에는 금이 가지 않았지만, 그의 영혼에는 예루살렘의 먼지가 내려앉았다.

    에스라서가 제국의 조서와 하나님의 약속이 맞물리는 큰 역사로 문을 열었다면, 느헤미야서는 더 낮고 아픈 자리에서 시작한다. 칙령도, 성전 기물도, 귀환 행렬도 없다. 다만 폐허의 소식을 자기 안으로 들인 한 사람이 있다.

    “하가랴의 아들 느헤미야의 말이라.” 한 사람의 말. 한 사람의 이름. 한 사람의 몸 안으로 들어온 무너진 도시. 느헤미야서의 문지방은 성벽 완공식이 아니라, 그 무너짐 앞에 앉아 우는 한 사람의 애통에 놓여 있다.

    폐허는 때로 소식으로 먼저 도착한다. 불탄 나무의 검은 자국을 보지 못해도, 무너진 성문의 냄새를 맡지 못해도, 어떤 소식은 몸 안으로 들어와 통증이 된다. 그리고 그 통증이 사람을 바꾼다. 느헤미야는 듣고, 앉고, 울었다. 수일 동안 슬퍼했고, 금식하며 기도했다.

    그러므로 느헤미야서는 ‘안부’에서 열린다. 재건은 그다음에 온다. 성벽도 그다음에 세워진다. 이 이야기의 처음은 묻지 않아도 될 것을 묻는 일이다. 멀리 있는 폐허를 자기 몸 안으로 들이고, 안전한 자리에서 고통의 방향으로 마음을 옮기는 일이다.

    수산 궁은 제국의 질서를 보여 주고, 예루살렘의 폐허는 공동체의 상처를 드러낸다. 여기서 흐른 첫 눈물은 장차 밤의 성벽 시찰과 52일의 공사, 수문 앞 광장의 율법 낭독과 다시 흔들리는 공동체의 민낯까지 앞서 비춘다. 한 사람의 안부가 무너진 공동체를 다시 세우는 첫 돌이 된다.

     

    수산 궁의 안부

    그는 수산 궁에 있었다. 수산은 페르시아 제국의 겨울 궁전이 자리한 도시였다. 왕이 계절을 따라 머물고, 신하들이 오가며, 제국의 행정과 외교가 움직이던 권력의 중심이었다. 그곳에는 질서가 있었고, 광택이 있었고, 안전이 있었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달랐다. 성은 허물어졌고, 문들은 불탔다. 돌아온 사람들은 있었지만, 삶은 아직 돌아오지 못했다. 이름은 예루살렘이었으나, 도시는 상처 입은 몸처럼 열려 있었다. 무너진 성벽은 단순히 부서진 방어 시설이 아니었다. 그것은 모욕 앞에 드러난 공동체의 맨살이었다. 누구나 들어와 짓밟을 수 있고, 누구나 지나가며 비웃을 수 있는 삶이었다. 밤마다 도시를 지켜 주던 성문은 불탔고, 아이들의 잠을 감싸던 경계는 재가 되었다.

    수산 궁과 예루살렘 폐허 사이에는 먼 거리가 있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그 거리를 물음으로 건넜다. “내가 …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의 형편을 물은즉.” 이 물음이 느헤미야서의 문지방이다. 무엇이 무너졌는가. 누가 남아 있는가. 그들은 어떻게 견디고 있는가. 지금 예루살렘은 어떤 얼굴로 남아 있는가.

    이 책 전체는 이 물음에서 흘러나온다. 성벽을 다시 세우는 일도, 흩어진 백성을 모으는 일도, 수문 앞 광장에서 율법을 듣는 일도 여기서 시작된다. 한 사람의 안부는 도시의 재건으로 이어지고, 도시의 재건은 공동체의 갱신으로 깊어지며, 마침내 하나님 앞에 다시 서는 백성의 이야기로 번져 간다.

    안부는 지나가는 인사가 아니다. 참된 안부는 타인의 형편을 내 삶의 가장자리 안으로 들이는 일이다. “잘 지내십니까”라는 말도 진심을 통과하면 깊은 신학이 된다. 내가 안전하게 서 있는 곳과 누군가 무너져 있는 곳 사이에 다리를 놓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찾아오실 때 종종 물음으로 다가오신다. 에덴에서는 “네가 어디 있느냐” 물으셨고, 피 묻은 땅에서는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물으셨다. 하나님의 물음은 정보를 얻기 위한 질문이 아니다. 숨어 버린 인간을 다시 관계 앞으로 부르고, 외면한 형제의 피를 듣게 하는 부르심이다. 느헤미야의 안부도 그 흐름 안에 있다. 그는 단지 예루살렘의 소식을 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물음에 자기 몸을 내어 주고 있다.

    그는 묻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었다. 예루살렘의 먼지 속에 있지 않았다. 포로의 후손이었지만 제국 안에서 자리를 얻었고, 왕 가까이에 있었다. 그의 하루는 예루살렘의 무너진 돌보다 왕의 술잔에 가까웠다. 그러므로 그는 얼마든지 외면할 수 있었다. 궁의 일만으로도 하루는 충분히 바빴고, 예루살렘의 폐허는 그의 책임 밖에 있는 일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는 물었다. 그 물음 하나가 그를 지켜 주던 안전한 알리바이를 무너뜨렸다. 사람은 자신이 오래 묻는 쪽으로 마음을 옮긴다. 이익만 묻는 사람은 이익의 방향으로 기울고, 권력의 움직임만 살피는 사람은 권력이 흔드는 대로 끌려간다. 그는 폐허의 형편을 물었다. 그의 몸은 아직 수산 궁에 있었지만, 마음은 이미 예루살렘의 무너진 성문 앞에 서 있었다.

    에스라가 귀환의 문을 열었다면, 느헤미야서는 돌아온 뒤의 상처를 묻는다. 왜 돌아왔는데도 여전히 무너져 있는가. 왜 성전은 섰는데 삶은 아직 폐허인가. 왜 제단의 불은 다시 타오르는데 공동체는 여전히 능욕 가운데 있는가. 귀환이 장소를 되찾는 일이었다면, 안부는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정말 회복되었는지를 묻는 일이다.

    오늘도 우리는 각자의 수산 궁에 산다. 그것이 반드시 사치스러운 궁궐을 뜻하지는 않는다. 누군가의 고통을 보지 않아도 하루가 무리 없이 흘러가고, 멀리 있는 폐허를 정보로 소비해도 내 삶은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뉴스와 화면과 통계 속에서 타인의 상처를 지나쳐도, 저녁 식탁은 여전히 차려진다. 바로 그 안전한 무감각의 자리가 우리의 수산 궁이다.

    정보는 넘치지만 안부는 메말라 간다. 우리는 더 많이 알면서도 더 깊이 묻지 않고, 더 빨리 들으면서도 더 오래 아파하지 않는다. 손가락은 화면 위를 빠르게 지나가지만, 마음은 좀처럼 한 사람의 무너진 자리 앞에 멈추지 않는다. 느헤미야서의 문지방은 바로 그 무심한 속도 앞에서 우리를 붙든다.

    너는 누구의 형편을 묻고 있는가.

     

    눈물의 설계도

    느헤미야라는 이름은 “여호와께서 위로하신다”는 뜻을 품고 있다. 그런데 위로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책의 첫 장면에서 운다. 그는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금식하고 기도한다. 참된 위로는 고통을 서둘러 지우는 말이 아니다. 슬픔을 건너뛰고 오는 위로는 없다. 느헤미야의 위로는 눈물 없는 낙관이 아니라, 폐허의 소식을 자기 몸으로 받아 낸 사람 안에서 시작되는 하나님의 깊은 움직임이다.

    그는 소식을 듣자마자 계획서를 쓰지 않는다. 사람을 모으지 않고, 예산을 세우지 않으며, 왕에게 달려가지도 않는다. 먼저 앉는다. 그의 앉음은 포기가 아니다. 무너진 소식을 함부로 다루지 않기 위한 경건한 멈춤이다. 그는 대책으로 폐허를 덮지 않고, 자기 언어로 상처를 서둘러 봉합하지 않는다. 먼저 그 소식 앞에 자기 자리를 내준다.

    슬픔에는 마땅한 속도가 있다. 폐허의 소식을 서둘러 처리하면 사람을 놓치고, 너무 빨리 해결하려 들면 상처를 밟는다. 느헤미야는 그 앞에 머물 줄 알았다.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했다. 그 느린 눈물이 훗날 52일의 빠른 재건을 가능하게 했다.

    그의 눈물은 무력함이 아니다. 가장 깊은 책임은 때로 눈물의 형식으로 시작된다. 사람의 아픔 앞에서 울지 못하는 지도자는 사람을 숫자로 보기 쉽고, 울음을 잃은 공동체는 성벽을 높여도 차가워진다. 눈물이 마른 신앙은 하나님의 이름을 말하면서도 타인의 고통을 지나친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의 무너짐을 “그들의 문제”로 밀어내지 않는다. “우리의 위기”로 받아들인다. 바로 거기서 재건은 시작된다.

    타인의 고통이 내 안에서 대명사를 바꿀 때, 역사는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들이 우리가 되고, 저 폐허가 우리의 성문이 되며, 먼 소식이 내 기도가 된다. 성벽은 그렇게 시작된다. 돌보다 먼저 눈물이고, 행정보다 먼저 탄식이며, 전략보다 먼저 기도다.

    그러나 눈물만으로 성벽이 세워지지는 않는다. 느헤미야서는 감상에 머무는 책이 아니다. 그는 왕에게 말하고, 허가를 받고, 목재를 준비하고, 현장을 살피며, 사람들을 조직한다. 밤에는 무너진 성벽을 조사하고, 조롱과 위협 앞에서는 백성에게 한 손으로는 일하고 한 손으로는 병기를 잡게 한다.

    그는 낮의 환호 속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밤에 움직였다. 짐승을 타고 무너진 성벽 곁을 지나, 골짜기 문과 용정과 분문을 살폈다. 달빛 아래 돌들은 희미하게 무너져 있었고, 불탄 성문의 흔적은 검은 그림자처럼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는 폐허를 멀리서 상상하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가 보았고, 소식으로 들었던 무너짐을 자기 눈으로 확인했다. 그래서 그의 재건은 허공에 걸린 비전이 아니라 땅에 닿은 책임이었다. 그는 기도하는 사람이었고, 동시에 치밀한 행정가였다. 눈물의 사람이었지만 눈물에 머물지 않았다. 계획하고, 설득하고, 배치하고, 방어하며, 끝까지 견뎠다.

    그러나 그 모든 행동의 뿌리에는 1장의 눈물이 있었다. 눈물이 없는 행정은 사람을 소모품으로 만들고, 기도가 없는 재건은 또 다른 권력의 탑이 되기 쉽다. 그의 눈물은 성벽보다 먼저 사람의 마음을 세우는 설계도였다. 돌의 배열보다 먼저 마음의 방향을 바로잡는 도면이었다.

    그래서 이 안부는 단순한 연민이 아니다. 책임으로 익은 연민이다. 몸을 움직이게 하는 슬픔이고, 궁궐의 안락함을 흔들어 폐허의 자리로 걸어가게 하는 기도다.

    오늘 우리의 말은 너무 빠르다. 분노도, 판단도, 위로도 빠르다. 그러나 느헤미야서의 말은 느리다. 묻고, 울고, 기도한 뒤에야 움직인다. 그 느린 말만이 무너진 사람을 다시 일으킨다.

     

    성벽 너머의 공동체

    느헤미야서는 흔히 성벽 재건의 책으로 읽힌다. 그러나 성벽만 보면 이 책은 좁아진다. 느헤미야의 성벽은 능욕당하는 공동체의 맨살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경계였다. 그 돌은 권력을 과시하는 기념물이 아니라, 상처 입은 사람들 곁에 놓인 보호의 언어였다.

    그래서 이 성벽은 공동체가 말씀 앞에 다시 모일 수 있도록 마련된 품이다. 성벽이 세워진 뒤에도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백성은 수문 앞 광장에 모이고, 율법이 낭독되며, 사람들은 말씀을 듣고 운다. 초막절이 회복되고, 언약이 새로워진다. 경제 윤리와 안식일, 성전 질서와 가난한 이들의 삶까지 다시 말씀 앞에 세워진다.

    성벽은 도시를 둘러싸지만, 말씀은 백성을 모은다. 성문은 외부의 위협을 막지만, 율법의 낭독은 내부의 무너짐을 드러낸다. 이 책의 절정은 돌이 제자리를 찾는 순간에만 있지 않다. 수문 앞 광장에서 사람들이 말씀을 듣고 울다가, 다시 기쁨으로 초대받는 순간에도 있다.

    먼지 앉은 광장에 사람들이 모인다. 남자와 여자,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이 함께 선다. 책이 펼쳐지고, 귀가 열린다. 오래 무너져 있던 성벽 안에서 오래 닫혀 있던 마음들이 열린다. 성벽은 그들을 가두는 장벽이 아니라, 말씀 앞에 다시 서게 하는 자리였다.

    그러므로 느헤미야서의 재건은 벽의 완성이 아니라 백성의 회복이다. 성문을 다는 일이 아니라 삶의 리듬을 되찾는 일이며, 도성을 닫는 일이 아니라 말씀 앞에 다시 열리는 일이다. 성벽은 필요했다. 그러나 성벽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외부의 위협을 막는 일보다 어려운 것은 내부의 탐욕을 멈추는 일이었다. 무너진 돌보다 오래 걸린 것은 무너진 신뢰를 다시 세우는 일이었다. 성문을 다는 일보다 깊은 과제는 공동체의 마음에 다시 문을 내는 일이었다.

    그래서 이 책의 마지막은 산뜻한 승리로 닫히지 않는다. 느헤미야는 몇 번이고 “내 하나님이여 나를 기억하옵소서”라고 기도한다(느 5:19; 13:14, 22, 31). 그 기도에는 성취의 당당함보다 피로와 긴장, 다시 흔들리는 공동체를 바라보는 지도자의 고독이 더 짙게 배어 있다. 느헤미야서는 영웅담처럼 시작하지 않았고, 영웅담처럼 끝나지도 않는다.

    그 정직함이 오히려 우리를 붙든다. 재건은 완공의 순간보다 돌봄의 지속에 가깝다. 성벽을 세웠다고 공동체가 완성되지 않고, 예배당을 지었다고 교회가 세워지지 않으며, 정의를 외쳤다고 사회가 곧 정의로워지지 않는다. 안부는 다시 물어야 하고, 무너진 곳은 다시 살펴야 하며, 공동체는 계속 돌보며 세워 가야 한다.

    이 성벽은 오늘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무엇을 지키려고 경계를 세우는가. 우리의 경계는 약한 이들을 보호하는가, 불편한 이웃을 밀어내는가. 우리의 벽은 사람들을 말씀 앞에 모으는가, 두려움 안에 가두는가.

    분단의 땅 한반도에도 벽이 있다. 철조망과 초소와 지뢰와 오래된 증오가 뒤엉킨 비무장지대가 있다. 이름은 비무장이지만, 기억은 가장 무겁게 무장되어 있다. 그러나 오늘의 폐허는 고대 예루살렘에만, 한반도의 군사분계선에만 머물지 않는다. 레바논의 무너진 마을, 이란의 폭격 뒤에 주저앉은 학교, 국경 앞에서 이름을 잃은 사람들의 줄에도 있다.

    이민자의 삶에도 보이지 않는 벽이 있다. 서류 한 장, 낯선 언어, 불안한 신분, 억양과 가난이 사람을 조용히 갈라놓는다. 교회 안에도 그런 벽은 생긴다. 익숙한 사람과 낯선 사람 사이, 중심에 선 사람과 가장자리에 머문 사람 사이에 아무도 세웠다고 말하지 않는 벽이 자란다.

    그 장면 앞에서 안부는 더 이상 예의 바른 인사가 아니다. 누구의 성벽이 무너졌는가. 누구의 집이 불탔는가. 누구의 아이가 오늘 학교에 돌아오지 못했는가. 안부를 묻는다는 것은 편을 가르는 일이 아니라, 폐허 속에 아직 사람의 얼굴이 남아 있음을 끝까지 잊지 않는 일이다.

    느헤미야서는 모든 벽을 같은 이름으로 부르지 않는다. 허물어야 할 벽이 있고, 다시 세워야 할 경계가 있다. 상처 입은 사람을 보호하는 경계와 상처 입은 사람을 밀어내는 장벽은 같지 않다. 안부는 우리에게 그 차이를 묻게 한다.

    제국의 문서가 돌아오라 말해도, 사람의 마음까지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성전이 서고 성벽이 닫혀도, 아직 울고 있는 사람이 남아 있다면 회복은 끝난 것이 아니다. 누군가 물어야 한다. 아직 거기 사람이 있는지. 밥은 먹는지. 밤은 견디는지. 무너진 자리에서 그들의 마음이 어디까지 다쳤는지. 끝까지 물어야 한다.

    이 책이 오늘 우리에게 불편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우리는 완성된 성벽 앞에서는 박수를 치지만, 무너진 사람 곁에 오래 앉아 있지는 못한다. 결과는 빨리 보고 싶어 하면서도, 슬픔이 내 안에 들어와 머무는 일은 겁낸다. 공동체를 말하면서도 한 사람의 밥과 밤과 마음을 오래 묻는 일 앞에서는 쉽게 지친다.

    느헤미야 1장은 오래전 예루살렘 성벽만을 말하지 않는다. 어떤 소식 앞에서 우리가 멈추는지, 어떤 아픔을 내 삶의 바깥에 세워 두는지, 어떤 폐허의 이름을 끝내 모른 척하는지를 묻는다.

    우리는 수많은 비극을 실시간으로 본다. 그러나 많이 본다고 깊이 보는 것은 아니다. 화면은 지나가고, 숫자는 바뀌고, 또 다른 소식이 밀려온다. 그 사이에 한 사람의 얼굴이 사라진다. 이 책의 안부는 우리에게 묻는다. 너는 무엇을 보았는가가 아니라, 누구의 형편을 네 안에 들였는가.

    느헤미야서는 우리를 다시 그 자리로 데려간다. 재건은 먼저 안부로 온다. 남의 폐허를 내 삶의 바깥에 버려두지 않는 마음, 안전한 자리에서 고통의 방향으로 몸을 돌리는 사랑. 그것이 이 책이 조용히 보여 주는 첫 신학이다.

    하나님의 일은 때로 대답보다 물음에서 시작된다. 잘 있느냐고 묻는 순간,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긍휼이 가는 쪽으로 한 걸음 돌아선다. 안부는 재건의 작은 시작이고, 기도는 그 안부를 하나님 앞에 오래 내려놓는 자리다.

    수산 궁의 그 사람은 아직 예루살렘으로 떠나지 않았다. 돌 하나 옮기지 않았다. 성벽의 치수도 재지 않았고, 일꾼의 이름도 부르지 않았다.

    그는 다만 물었다. 들었다. 앉아서 울었다. 며칠을 슬퍼했고,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했다. 그 작고 낮은 장면 안에 느헤미야서 전체가 들어 있다. 성벽도, 광장도, 율법 낭독도, 공동체의 갱신도, 다시 무너지는 사람의 연약함도 그 물음에서 흘러나온다.

    어쩌면 한 인생도 그렇게 열린다. 오래 피했던 안부 하나 앞에서, 내 안전한 자리 바깥에 아직 울고 있는 사람이 있음을 더 이상 모른 척할 수 없을 때, 누군가의 무너진 성문이 어느 날 내 기도의 문이 될 때.

    그러므로 이 책을 다시 읽는다는 것은 성벽의 높이를 재는 일이 아니다. 묻지 않고 지나온 사람의 형편을 묻는 일이다. 오래 방치한 폐허의 이름 앞에 잠시 멈추는 일이다.

    지금 내 삶의 수산 궁은 어디인가.

    나는 누구의 안부를 더 이상 미루지 말아야 하는가.

     

    ※ 느헤미야서는 오랫동안 성벽 재건과 지도력의 책으로 읽혀 왔다. 그러나 최근 연구는 이 책을 페르시아 시대 유다 공동체가 폐허 이후 자신을 다시 세워 가는 이야기로 더 넓게 읽는다. H. G. M. 윌리엄슨은 에스라-느헤미야를 포로 귀환 이후 유다의 역사와 신학을 읽는 중요한 주석적 토대로 제시했고, 타마라 콘 에스케나지는 이 책을 한 영웅의 전기가 아니라 공동체가 문서와 기억과 공동 작업을 통해 다시 “백성”이 되는 산문 세계로 읽게 했다. 그렇게 보면 느헤미야 1장은 성공한 관리의 결심이 아니라, 폐허 이후 공동체가 다시 태어나는 첫 안부의 순간이다.

    조원태 목사 / <뉴욕우리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