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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재글 조원태목사의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 형제, 형제가 무너지던 날, 멀리 선 사람들 (뉴스앤조이) 2026.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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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media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3회   작성일Date 26-08-29 18:04

    본문

    형제, 형제가 무너지던 날, 멀리 선 사람들

     

    조원태목사의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

    조원태 목사의 연재『요나서로 묻는 17개 질문』을 통해 독자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은 바 있습니다. 독자층에 깊은 질문을 던지며 신학적·목회적 통찰을 나누어 온 그의 글은 특히 삶의 언어로 성서를 풀어낸 점에서 많은 공감과 지지를 받았습니다.

    이번에는 성서 66권 각 책의 서문(Threshold, 문지방 텍스트)을 따라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새로운 연재『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로 다시 시작합니다.

    이 시리즈는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라는 주제로 출발합니다. 특정 책의 프롤로그 분석을 넘어, 성경 전체의 첫 문장을 따라 걸어가는 실험적 글쓰기로서 목회와 문학, 신학을 잇는 연재가 될 것입니다.

    연재의 서막을 여는 글은 프롤로그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소개되며, 이후 매주 성경의 서로 다른 현관을 열어갈 예정입니다.

    이 연재가 독자들의 시야를 넓히고 성서를 다시 ‘시작의 자리’에서 읽게 하는 영적 초대가 되리라 믿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성경의 전체적인 가르침이 다시금 생생하게 느껴지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 편집자 주 -

    오바댜 1:1-4
    1 오바댜의 묵시라 주 여호와께서 에돔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말미암아 소식을 들었나니 곧 사자가 나라들 가운데에 보내심을 받고 이르기를 너희는 일어날지어다 우리가 일어나서 그와 싸우자 하는 것이니라 ……  3 너의 마음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 바위 틈에 거주하며 높은 곳에 사는 자여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누가 능히 나를 땅에 끌어내리겠느냐 하니 4 네가 독수리처럼 높이 오르며 별 사이에 깃들일지라도 내가 거기에서 너를 끌어내리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예루살렘이 무너지던 날,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멀리 서 있었다.

    성문은 깨지고 있었다. 불길은 지붕을 핥아 올라갔고, 타는 나무 냄새와 흙먼지가 골목을 메웠을 것이다. 아이를 안은 사람들은 숨을 곳을 찾았고, 다친 사람의 발밑에는 피가 마른 흙과 섞였다. 누군가는 성문 밖으로 달렸고, 누군가는 돌아보았다. 조금 전까지 집이었던 것이 무너지는 것을.

    오바댜는 그 거리를 놓치지 않는다. “네가 멀리 섰던 날”(옵 1:11). 

    칼을 처음 든 사람은 아니었다. 성벽을 처음 무너뜨린 군대도 아니었다. 그러나 형제가 무너지는 동안 바라보았고, 그 패망을 기뻐했고, 성문 안으로 들어가 재물에 손을 댔으며, 달아나는 사람의 길을 막았다. 마침내 살아남은 자들을 원수에게 넘겼다(옵 1:11-14). 

    방관은 조금씩 공모가 되었다. 

    아모스가 여러 나라의 이름을 차례로 불러 세웠다면, 오바댜는 그 가운데 한 이름 앞에 오래 멈춘다. 에돔. 단순한 이웃이 아니었다. 

    형제였다.

    에서는 에돔이 되었고, 야곱은 이스라엘이 되었다. 한 어머니의 배 속에서 서로 밀치던 두 아이는 두 민족으로 갈라졌다. 오래된 다툼은 국경이 되었고, 국경은 전쟁의 기억을 품었다. 그러나 오바댜는 끝내 그 오래된 이름을 놓지 않는다.

    “네 형제 야곱.”

    스물한 절뿐인 작은 책이, 여기서 깊어진다. 먼 나라의 몰락 이야기가 아니다. 가까운 사람이 무너지던 날, 나는 어디에 서 있었는가?

     

    바위의 착각

    에돔은 높은 곳에 있었다. 바위 틈에 몸을 숨기고 산악 지형을 요새처럼 삼았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세상은 작아진다. 길은 실처럼 가늘어지고, 사람은 점이 된다. 아래의 비명도 바람 속에서 멀어진다.

    그 높이에 오래 머문 마음을 오바댜는 한마디로 부른다. “너의 마음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옵 1:3).

    교만은 자신을 크게 보는 마음만이 아니다. 다른 사람의 고통이 작아 보이기 시작하는 거리다. 무너지는 집은 풍경이 되고, 울음이 소음이 된다. 누군가의 재앙도 내 하루 바깥의 일이 된다. 에돔의 바위는 몸을 숨겨 주었지만, 마음까지 지켜 주지는 못했다.

    높은 곳에는 오래 머물수록 생기는 착각이 있다. 나는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누가 능히 나를 땅에 끌어내리겠느냐.” 에돔은 독수리처럼 오르고 별 사이에 깃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짧게 말씀하신다. 거기에서도 끌어내리겠다(옵 1:3-4).

    에돔은 올라가고, 하나님은 끌어내리신다. 인간은 높이를 안전이라 부르지만, 오바댜는 그 높이가 무엇을 보이지 않게 만드는지 묻는다. 

    형제의 얼굴이다.

    성경의 오래된 기억 속에서 에서는 한때 야곱에게 달려갔다. 두려움 속에 다가오던 동생을 안고, 목을 어긋맞추고, 입을 맞추고, 함께 울었다(창 33:4). 원한보다 먼저 포옹이 있었던 날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포옹은 희미해졌다. 얼굴은 국경이 되었고, 형제는 적국이 되었다. 오래된 상처는 기억이 되어 다음 세대로 건너갔다. 어쩌면 공동체의 비극은 미움이 시작되는 순간보다, 한때 서로 울었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순간에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우리에게도 높은 바위는 있다. 지위와 돈, 국적과 학력, 정치적 확신과 종교적 확신. 그 위에 서면 타인의 사정은 쉽게 단순해진다. 가난은 노력의 부족이 되고, 난민은 숫자가 되며, 실패는 몇 마디 판단으로 정리된다.

    높은 곳에서는 판단이 빨라진다. 얼굴은 잘 보이지 않는다.

    오바댜의 문지방은 묻는다. 얼마나 높이 올라갔는가가 아니라, 그 높이에서 누구의 얼굴을 잃어버렸는가?

     

    멀리 선 형제

    오바댜서에서 가장 서늘한 말은 칼이나 불이 아니다.

    “멀리.”

    예루살렘이 무너지던 날 에돔은 멀리 섰다. 그러나 오바댜는 곧이어 말한다. “너도 그들 중 한 사람 같았느니라”(옵 1:11). 가까이 가지 않았는데도 이미 그들 가운데 있었다.

    우리는 검을 들지 않고도 잔인해질 수 있다. 누군가의 몰락을 반가워하고, 조롱에 웃음을 보태고, 쫓겨나는 사람을 바라보다가 아무 일도 하지 않을 수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말은 때로 가장 많은 것을 감춘다.

    처음에는 멀리 선다. 바라본다. 기뻐한다. 조롱한다. 성문 안으로 들어간다. 재물에 손을 댄다. 도망자의 길을 막는다. 마침내 살아남은 사람을 원수에게 넘긴다(옵 1:11-14).

    방관은 그렇게 폭력의 편으로 걸어간다.

    오바댜는 그날을 “형제의 날”이라고 부른다. 원수의 날도, 경쟁자의 날도 아니었다.

    형제의 날이었다.

    형제가 무너지는데 기뻐하는 순간, 함께 살아온 기억 하나가 먼저 깨진다. 얼굴을 알아보던 마음이 사라진다.

    오늘 우리는 타인의 재앙을 너무 빨리 본다. 무너지는 도시도, 폭격 뒤 먼지를 뒤집어쓴 아이도, 국경 앞에서 돌아서는 사람의 등도 손바닥만 한 화면 안으로 들어온다. 손가락을 한 번 움직이면 다른 장면이 열린다.

    비극은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우리는 이미 떠나 있다.

    너는 그날, 어디에 서 있었는가?

    우리가 모든 비극을 막을 수는 없다. 그러나 아무 책임도 없는 것은 아니다. 형제의 고통을 구경거리로 만들지 않는 일, 그의 실패를 내 옳음의 증거로 삼지 않는 일, 도망치는 사람의 길을 막지 않는 일은 남는다.

    오바댜는 형제를 잃어버린 자리를 보여 준다.

    형제는 가까워서 편한 사람이 아니다. 오래된 기억 때문에 더 아픈 사람일 수도 있다. 억울함과 경쟁, 지워지지 않는 과거가 그 이름 안에 남아 있다.

    한반도에도 오래 갈라져 살아온 형제가 있다. 같은 말을 쓰던 사람들이 서로에게 총을 겨누었고, 전쟁이 멈춘 자리에는 철조망이 남았다. 계절은 수십 번 바뀌었지만, 그 선 너머의 얼굴은 좀처럼 가까워지지 않았다.

    가장 가까워야 할 형제가, 가장 먼 곳에 산다. 그래서 오바댜의 한마디가 오래 남는다. “네 형제 야곱.” 

    오바댜서에서 가장 무거운 말은 어쩌면 심판이 아니라, 그 한 단어다.

     

    그날의 주인

    오바댜서에는 ‘날’이라는 말이 반복된다.

    예루살렘이 무너진 날. 재앙의 날. 패망의 날. 환난의 날.

    그날에는 주인이 있는 듯했다. 성문은 부서지고, 재물은 빼앗기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길 위로 밀려났다. 에돔은 그것이 유다의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15절에서 날의 주인이 바뀐다. “여호와의 날.”

    남의 재앙을 바라보던 사람이 이제 그 빛 아래 선다. 오바댜는 짧게 말한다. 네가 행한 대로, 네게 돌아온다(옵 1:15).

    보복보다 더 깊은 말이다. 우리가 타인에게 만들어 준 세계는 언젠가 우리가 살아야 할 세계가 된다. 조롱이 일상이 된 곳에서는 누구도 끝까지 조롱하는 쪽에만 설 수 없고, 약한 사람의 길을 막아 온 세계에서는 어느 날 내가 그 길 앞에 설 수도 있다.

    오바댜의 ‘그날’은 복수가 허락되는 날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같은 빛 아래 서는 날이다.

    그래서 책은 에돔의 몰락에서 멈추지 않는다. 마지막에 시선은 시온으로 옮겨지고, 흩어진 사람들에게 다시 땅이 열린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에서 나라는 인간의 손을 떠난다.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리라”(옵 1:21).

    유다가 에돔을 이긴다는 말로 끝나지 않는다. 상처 입은 사람이 다시 힘을 얻는 것으로도 끝나지 않는다. 피해의 기억이 새로운 폭력의 허가증이 되는 순간, 상처는 다른 사람에게 옮겨 간다. 힘을 되찾는 것과 새로운 세계가 시작되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니다.

    하나님은 에돔이 멀리 서 있던 것을 보셨다. 형제의 몰락을 기뻐한 마음도 보셨다. 그러나 야곱의 분노마저 왕좌에 앉히지는 않으신다.

    오바댜의 마지막은 승자를 남기지 않는다.

    하나님을 남긴다.

    오바댜서를 다시 읽는다는 것은 오래전에 사라진 에돔의 죄를 바라보는 일이 아니다. 내 삶의 높은 바위를 살펴보는 일이다. 누구의 실패 앞에서 마음이 가벼워졌는지, 누구의 고난 앞에서 멀리 서 있었는지 돌아보는 일이다.

    그리고 한 가지 질문이 남는다. 나는 누구를 더 이상 형제라고 부르지 않는가? 가족일 수도 있고, 한때 함께 걸었던 사람일 수도 있다. 오래된 기억을 공유하면서도 이제 서로를 적으로만 부르는 공동체와 민족일 수도 있다.

    오바댜는 그 잊힌 이름을 다시 불러낸다.

    형제.

    이 짧은 책에서 가장 아픈 단어다. 어쩌면 한 인생의 서문도 여기에서 다시 쓰일지 모른다. 얼마나 높이 올라갔는지가 아니라, 누군가 무너지던 날 어디에 서 있었는지. 누구를 이겼는지가 아니라, 끝내 누구의 얼굴을 잊지 않았는지.

    오바댜의 문은 좁다. 스물한 절이면 끝난다. 그러나 그 문 앞에 오래 서 있으면, 멀리 있던 얼굴 하나가 가까워진다.

    그 얼굴이 다시 형제로 보일 때, 비로소 이 작은 책은 열린다

     

    ※ 오바댜서의 역사적 배경과 형성 시기는 여전히 논쟁적이다. 11-14절을 기원전 587/586년 예루살렘 함락과 연결하는 해석이 널리 받아들여져 왔지만, 포로기 이후의 갈등과 기억이 본문에 반영되었다고 보는 연구도 있다. 오늘의 연구는 예레미야 49장과의 병행, 에돔을 ‘형제이자 타자’로 기억하는 방식, 복수와 폭력의 윤리, 「열두 예언서」 안에서 오바댜가 차지하는 자리를 함께 살핀다. 그런 점에서 오바댜는 옛 원수를 저주하는 작은 책을 넘어, 형제의 배신과 보복의 욕망을 끝내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리라”는 선언 아래 가져다 놓는 책으로 읽힌다.

     

    오바댜서의 문장

    형제가 무너지던 날, 멀리 선 침묵도 폭력이 된다.

    조원태 목사 / <뉴욕우리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