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글 조원태목사의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 그날, 폐허에서 '그 후' 가 시작되다 (뉴스앤조이) 2026.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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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폐허에서 ‘그 후’가 시작되다
조원태목사의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
이번에는 성서 66권 각 책의 서문(Threshold, 문지방 텍스트)을 따라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새로운 연재『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로 다시 시작합니다.
이 시리즈는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라는 주제로 출발합니다. 특정 책의 프롤로그 분석을 넘어, 성경 전체의 첫 문장을 따라 걸어가는 실험적 글쓰기로서 목회와 문학, 신학을 잇는 연재가 될 것입니다.
연재의 서막을 여는 글은 프롤로그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소개되며, 이후 매주 성경의 서로 다른 현관을 열어갈 예정입니다.
이 연재가 독자들의 시야를 넓히고 성서를 다시 ‘시작의 자리’에서 읽게 하는 영적 초대가 되리라 믿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성경의 전체적인 가르침이 다시금 생생하게 느껴지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 편집자 주 -
요엘 1:1-4
1 브두엘의 아들 요엘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2 늙은 자들아 너희는 이것을 들을지어다 땅의 모든 주민들아 너희는 귀를 기울일지어다 너희의 날에나 너희 조상들의 날에 이런 일이 있었느냐 3 너희는 이 일을 너희 자녀에게 말하고 너희 자녀는 자기 자녀에게 말하고 그 자녀는 후세에 말할 것이니라 4 팥중이가 남긴 것을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을 느치가 먹고 느치가 남긴 것을 황충이 먹었도다

하늘이 사라지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처음에는 먼 데서 검은 띠 하나가 번져 왔다. 바람을 타고 넓어지더니 마침내 빛의 가장자리까지 덮었다. 날개들이 부딪치는 마른 소리가 들판을 메웠고, 떼가 내려앉은 자리에서 푸른빛이 먼저 지워졌다.
2020년 동아프리카를 덮친 사막메뚜기 떼는 에티오피아와 소말리아에서는 25년 만에, 케냐에서는 70년 만에 가장 심각한 사태였다. 사람들이 바라보는 동안 하늘은 어두워지고 들판은 색을 잃어 갔다. 그 아래에 사람들이 서 있었다.
요엘서의 첫머리에도 그 어둠이 내려앉아 있다. 그런데 이 책은 메뚜기의 날개 소리보다 먼저 한 문장을 들려준다.
“브두엘의 아들 요엘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욜 1:1).
호세아서의 첫머리에는 왕들의 이름이 길게 이어진다. 요엘서에는 왕이 없다. 어느 왕의 때였는지, 어느 해였는지도 적혀 있지 않다. 요엘이 살았던 시간은 흐릿하다. 그 흐릿한 시간 속으로 말씀이 왔다.
요엘이라는 이름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라는 뜻을 품는다. 그 이름은 풍성한 들판보다 폐허 위에서 더 무겁게 들린다. 먹을 것이 사라지고 내일의 씨앗마저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질문 하나가 남는다.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가?
요엘은 서둘러 대답하지 않는다. “늙은 자들아 너희는 이것을 들을지어다. 땅의 모든 주민들아 너희는 귀를 기울일지어다”(욜 1:2). 대답보다 먼저 듣게 한다. 사라진 것을 바라보게 하고, 그날을 기억하게 한다. 그리고 다시 묻는다. “너희의 날에나 너희 조상들의 날에 이런 일이 있었느냐”(욜 1:2).
그 질문에는 여러 날이 포개져 있다. 너희의 날. 조상들의 날. 다가올 여호와의 날. 그리고 모든 것이 끝난 듯한 자리 너머의 ‘그 후’.
요엘서는 그날들 사이를 걷는다. 지나간 것을 기억하고, 닥쳐온 것을 바라보며, 아직 오지 않은 것을 기다린다.
메뚜기의 이름보다 오래 남는 것은 그날의 기억이다.
누구의 날인가
팥중이가 남긴 것을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을 느치가 먹고, 느치가 남긴 것을 황충이 먹는다(욜 1:4). 문장이 이어질수록 남아 있는 것은 적어진다. 히브리어에는 네 이름이 차례로 놓여 있다. 서로 다른 곤충인지, 메뚜기의 성장 단계인지, 거듭 밀려온 떼인지 분명하지 않다. 이름은 넷인데, 끝에 남는 풍경은 하나다.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재난은 밭에서 멈추지 않는다. 곡식과 포도주가 사라지자 성전에 드릴 곡식 제물과 전제도 끊긴다. 사람의 식탁이 비고, 하나님의 제단도 빈다. 들판의 결핍이 마침내 성전까지 번진다. 요엘은 눈앞의 메뚜기 떼 너머로 더 큰 시간을 바라본다.
여호와의 날.
“슬프다 그 날이여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나니 곧 멸망 같이 전능자에게로부터 이르리로다”(욜 1:15).
이 말은 책 곳곳에서 되풀이된다. 그날은 가까이 오고(욜 2:1), 크고 두려우며(욜 2:11), 해와 달마저 빛을 잃는 날로 그려진다(욜 2:31; 3:15). 먼 미래에만 놓여 있는 날이 아니다. 익숙했던 세계가 흔들리고 감추어져 있던 것이 드러나는 날이다. 유다 사람들은 그날을 기다렸을 것이다. 하나님이 일어나 원수를 물리치고 자기 백성을 구하시는 날. 그러나 예언자들이 말한 그날은 기대하던 승리보다 더 두려운 날이었다. 하나님의 빛은 원수에게만 비치지 않는다. 그 빛 앞에서는 자기 백성도 숨을 곳이 없다.
같은 날이, 모두에게 같은 날은 아니다.
미국의 추수감사절도 그런 날이다. 1620년 영국 정착민들이 도착하기 전, 유럽인들과의 접촉으로 번진 전염병은 뉴잉글랜드의 원주민 공동체를 휩쓸었다. 왐파노아그 사람들도 많은 이를 잃었고, 정착민들이 들어온 파툭셋에는 이미 수많은 자리가 비어 있었다. 그 역사는 훗날 감사와 수확의 이야기로 기억되었지만, 다른 자리에서는 죽음과 빼앗긴 땅의 기억으로 남았다. 1970년부터 원주민들은 추수감사절마다 플리머스에 모여 ‘국가 애도의 날’을 지켜 왔다.
같은 날이다. 누군가는 감사하고, 누군가는 애도한다.
어떤 역사는 승리한 사람의 달력에 적힐 때 지나치게 깨끗해진다. 풍성한 식탁은 남고, 그 식탁이 놓인 땅에서 먼저 사라진 사람들의 자리는 지워진다. 감사의 곁에는 때로 누군가의 애도가 놓여 있다. 그 애도를 보지 않는 순간, 기억은 또 하나의 상처가 된다. 요엘의 ‘여호와의 날’은 우리를 그 지워진 자리 앞에 세운다.
그날은 누구에게 좋은 날인가?
내가 구원이라 부르는 동안, 누군가는 그 이름 아래 짓밟히고 있지 않은가? 내가 승리라 부르는 것을, 누군가는 상실이라 부르고 있지 않은가? 요엘은 ‘그날’을 남에게 닥칠 심판으로만 남겨 두지 않는다. 멀리 향해 있던 그 빛을 돌려 우리의 얼굴에도 비춘다.
그날은 달력에만 남지 않는다. 질병을 통보받은 날.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날. 집을 떠나야 했던 날. 믿었던 세계가 한순간에 이전과 이후로 갈라진 날. 그날을 지나면 오래 중요하다고 믿었던 것들이 작아진다. 당연했던 것은 간절해지고, 오래 붙들어 온 말이 더는 우리를 붙들어 주지 못하기도 한다. 그제야 남아 있던 것이 보인다.
요엘을 읽으며 모든 재난을 하나님의 형벌로 곧장 번역해서는 안 된다. 고통받는 사람의 죄부터 헤아리기 시작하면, 질문은 어느새 우리에게서 멀어져 타인을 향한다. 요엘은 그 질문을 다시 우리 쪽으로 돌려놓는다. 그날은 하나님이 사라진 날이 아닐지도 모른다. 오히려 하나님에 대해 너무 쉽게 말해 온 우리의 말이 먼저 무너지는 날일 수 있다.
기억을 건네는 법
요엘서의 첫머리에서 뜻밖의 명령이 들린다.
“너희는 이 일을 너희 자녀에게 말하고 너희 자녀는 자기 자녀에게 말하고 그 자녀는 후세에 말할 것이니라”(욜 1:3).
말하라. 지나간 일을 다음 사람에게 건네라. 사람은 좋은 날을 기억하게 하고 싶어 한다. 잘된 일, 견디어 낸 일, 아무것도 없던 자리에서 여기까지 왔다는 이야기. 가족사진을 고를 때에도 웃고 있는 얼굴에 손이 간다. 실패한 날과 두려웠던 밤, 차마 다시 꺼내고 싶지 않은 순간들은 사진 밖에 남겨 둔다. 요엘은 바로 그날들까지 다음 세대에게 건네라고 한다.
메뚜기가 지나간 날도 그렇다. 밭이 비었던 날. 먹을 것이 줄었던 날. 예배마저 흔들렸던 날. 어른들조차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던 날. 그날을 자녀에게, 그 자녀의 자녀에게, 다시 그다음 세대에게 전하라고 한다.
재난은 저절로 기억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면 어떤 기억은 흐려지고, 어떤 기억만 유난히 선명해진다. 힘 있는 사람의 이야기는 기록되고, 힘없는 사람의 울음은 그 바깥으로 밀려난다. 누군가는 기념비에 이름을 남긴다. 누군가는 이름이 있었다는 사실마저 희미해진다. 요엘은 그렇게 희미해지는 것들을 기억하라고 한다.
재난을 말한다는 것은 그날을 숨기지 않는 일일 것이다. 무엇을 잃었는지, 무엇을 보지 못했는지, 누구의 울음을 지나쳤는지. 그리고 그 시간을 건너오며 뒤늦게 무엇을 보게 되었는지.
아이들은 위기의 날에 어른들의 말을 듣는다. 그러나 더 오래 기억하는 것은 그들의 몸이다. 먹을 것을 감추던 손과 내어 주던 손. 약한 사람을 밀어내던 몸과 곁을 내주던 몸. 누구의 손을 잡았는지, 누구에게서 돌아섰는지. 그날을 지나온 몸은 오래 기억된다.
요엘서 2장에 이르면 모두가 다시 불려 나온다. 늙은 이와 어린이, 젖먹이, 신랑과 신부까지. 아무도 그날의 바깥에 남아 있지 않는다. 그때 한 문장이 들린다.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욜 2:13).
옷이 찢어지는 것은 보인다. 마음이 찢어지는 것은 보이지 않는다. 옷은 한순간에 찢어진다. 마음은 오래 걸린다. 찢어진 마음으로 외면했던 얼굴을 다시 보고, 듣지 않았던 울음을 듣게 된다. 잘못 걸어온 길도 그제야 보인다. 돌아서는 일은 거기서 시작된다.
‘돌아오라’는 말이 아직 들린다는 것은 돌아갈 길이 남아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말보다 먼저, 오래된 고백이 있다.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신”(욜 2:13) 분. 모든 것이 무너진 뒤에도 자비는 남는다. 그러나 자비가 지나간 일을 없었던 것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잃어버린 시간은 이미 지나갔다. 굶었던 밤은 굶었던 밤으로 남는다. 떠난 사람과 사라진 것, 다시 돌아오지 않는 시간도 있다. 회복은 그것들을 지우지 않은 채 온다.
그래서 “메뚜기가 먹은 햇수”를 갚으시겠다는 약속은 더 깊게 들린다(욜 2:25). 지나간 시간을 되돌린다는 말보다, 상실이 앞으로 올 시간까지 삼키게 두지 않겠다는 약속에 가깝다. 과거가 먹힌 뒤에도, 미래까지 먹힐 필요는 없다.
말하지 못한 상처는 사라지지 않고 다른 이름으로 다음 세대에 건너가기도 한다. 애도하지 못한 슬픔이 분노로 남고, 오래 감춘 두려움이 누군가를 문밖에 세우기도 한다. 그러나 정직하게 기억한 고통은 다른 길을 낸다. 굶주렸던 사람은 한 사람의 자리를 더 마련하고, 쫓겨났던 사람은 낯선 이를 위해 문을 열 수 있다. 아무도 내 말을 들어 주지 않았던 기억 때문에 작은 목소리 앞에 조금 더 오래 머물 수도 있다.
폐허를 건넌다는 것은 거기에 머무는 일이 아니다. 그곳을 지나며 비로소 보게 된 것을 다음 사람의 기억에 건네는 일이다.
그 후
요엘서에는 작은 말 하나가 있다. 그 말이 책의 시간을 바꾼다.
“그 후에.”
메뚜기가 지나간 후에. 들판이 벗겨진 후에. 울고 금식한 후에. 마음을 찢고 돌아선 후에.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욜 2:28). 아들과 딸이 예언하고, 늙은 이는 꿈을 꾸며, 젊은이는 이상을 본다. 남종과 여종에게도 하나님의 영이 부어진다.
요엘 1장에서 자녀들은 어른들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이었다. “너희는 이 일을 너희 자녀에게 말하고”(욜 1:3). 그런데 ‘그 후’에 이르면, 이야기를 건네받던 자녀들이 자기 입으로 아직 오지 않은 것을 말하기 시작한다.
기억이 예언이 된다.
늙은 이들은 꿈을 꾼다. 오래 산 사람은 희망이 얼마나 자주 무너지고, 기다림이 얼마나 길어지는지 안다. 그런 사람이 다시 꿈을 꾼다. 세상을 몰라서 꾸는 꿈이 아니다. 너무 오래 보았는데도, 미래를 버리지 않는 꿈이다.
젊은이들은 이상을 본다. 아들과 딸이 함께 예언하고, 종들에게까지 하나님의 영이 부어진다. 오래 몇 사람의 입에만 머물던 말이 다른 입으로 건너간다. 늙은 이도, 젊은이도, 아들과 딸도, 종들도 자기 자리에서 입을 연다. 오래 사람을 나누어 놓았던 경계가 흔들린다.
오순절의 예루살렘에서 요엘의 말이 다시 들린다. 서로 다른 곳에서 온 사람들이 저마다의 언어로 하나님의 큰일을 듣던 날, 오래전 폐허 위에 놓였던 한마디가 되돌아온다.
“그 후에.”
그러나 오순절의 불꽃으로 곧장 건너가서는 안 된다. 그 불꽃에 이르기 전에 메뚜기가 지나간 들판이 있었다. 울음과 굶주림이 있었고, 금식과 기다림이 있었다. 마음을 찢는 시간도 있었다. 요엘의 성령은 그 시간을 건너뛰지 않는다. 상처 위에 밝은 미래를 서둘러 덧칠하지도 않는다. 꿈은 상처가 없었다는 증거가 아니다. 상처가 미래의 전부는 아니라는 증거다.
요엘서의 끝으로 갈수록 ‘그날’은 다시 커진다. 해와 달이 흔들리고, 열방이 하나님의 판단 앞에 선다. 사람들은 흩어졌고, 땅은 나뉘었다. 소년과 소녀는 값이 매겨져 다른 사람의 손으로 넘어갔다. 이름을 가진 사람이 물건처럼 거래되었다. 요엘의 심판은 바로 그 자리들을 향한다.
여호와의 날은 내가 미워하는 사람이 사라지는 날로 오지 않는다. 사람에게 값을 매기고, 땅을 전리품처럼 나누고, 약한 사람의 울음을 이익으로 바꾸어 온 세계가 더는 그대로일 수 없는 날이다. 그날을 기다린다는 것은 먼 날짜를 헤아리는 일이 아니다. 이름보다 가격이 먼저 붙은 사람에게 이름을 돌려주고, 쫓겨난 사람이 서 있던 땅의 이야기를 듣고, 말할 자리를 잃은 사람 곁에 자리를 내어 주는 일이다. 그날의 정의는 그렇게 오늘에 닿는다.
요엘서는 메뚜기 떼로 시작해 물이 흐르는 샘으로 간다. 재난의 이야기를 듣던 아이들은 어느새 아직 오지 않은 것을 말하고, 희망이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지 아는 노인들은 다시 꿈을 꾼다. 모든 것을 먹어 치우는 소리로 시작한 책은 마침내 모든 육체 위에 부어지는 영의 숨결에 닿는다.
첫 장에서 어른들은 묻는다. 이런 일이 있었느냐. 그리고 그날을 기억하라고 말한다. 그 이야기를 듣던 자녀들이 마침내 입을 연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요엘서를 다시 읽는다는 것은 오래전 메뚜기의 이름을 알아내는 데 머무는 일이 아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서 무엇이 사람들의 시간을 먹고 있는지, 아직 오지 않은 날마저 빼앗고 있는지를 묻는 일이다. 그리고 우리가 지나온 폐허를 다음 사람에게 어떤 기억으로 건넬 것인지 생각하는 일이다.
한 사람의 삶에도 그런 날이 있다. 그날 이전과 이후가 갈라지는 날. 지우고 싶은 날, 아직 이름 붙이지 못한 날. 오래 지났는데도 아직 다 지나가지 않은 날.
요엘은 그날을 감추지 말라고 한다. 그러나 그날에 머물지는 말라고 한다. 상처가 다음 세대의 운명이 되지 않도록, 그 이야기를 기억으로 건네라고 한다. 언젠가 그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이 우리가 보지 못했던 것을 보고, 우리가 끝이라 여긴 자리에서 아직 오지 않은 것을 말할 수 있도록.
그때 ‘그날’은 다른 이름을 얻는다. 모든 것이 무너진 날이면서, 끝이라고 믿었던 것이 끝이 아니었던 날.
그 후.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것 같았던 자리에서, 아직 오지 않은 것이 시작된다.
※ 최근 요엘 연구는 저작 연대와 메뚜기 재난의 역사적 정체를 밝히는 데서 나아가, 책의 최종 형태와 문학적 흐름, 열두 예언서 안에서의 역할에 주목한다. 엘리 아시스는 재난에서 하나님의 임재 회복으로 이어지는 문학적·수사학적 구조를 강조하고, 제임스 D. 노갈스키는 요엘을 열두 예언서의 문학적 맥락 속에서 읽는다. 그레이엄 R. 햄보그 역시 요엘의 최종 형태와 다른 예언서들과의 문학적 연결에 주목한다. 이러한 연구들은 메뚜기의 정체를 둘러싼 논쟁을 넘어, 재난과 회복, 여호와의 날과 모든 육체에 부어지는 영이 어떻게 하나의 신학적 세계를 이루는지를 보여 준다.
요엘서의 문장
끝이라고 믿었던 자리에서, ‘그 후’가 시작된다.
조원태 목사 / <뉴욕우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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