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글 조원태목사의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 포효, 지진보다 먼저 온 목소리 (뉴스앤조이) 2026.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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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효, 지진보다 먼저 온 목소리
조원태목사의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
이번에는 성서 66권 각 책의 서문(Threshold, 문지방 텍스트)을 따라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새로운 연재『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로 다시 시작합니다.
이 시리즈는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라는 주제로 출발합니다. 특정 책의 프롤로그 분석을 넘어, 성경 전체의 첫 문장을 따라 걸어가는 실험적 글쓰기로서 목회와 문학, 신학을 잇는 연재가 될 것입니다.
연재의 서막을 여는 글은 프롤로그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소개되며, 이후 매주 성경의 서로 다른 현관을 열어갈 예정입니다.
이 연재가 독자들의 시야를 넓히고 성서를 다시 ‘시작의 자리’에서 읽게 하는 영적 초대가 되리라 믿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성경의 전체적인 가르침이 다시금 생생하게 느껴지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 편집자 주 -
아모스 1:1-2
1 유다 왕 웃시야의 시대 곧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시대 지진 전 이년에 드고아 목자 중 아모스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상으로 받은 말씀이라 2 그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부르짖으시며 예루살렘에서부터 소리를 내시리니 목자의 초장이 마르고 갈멜산 꼭대기가 마르리로다

땅은 아직 흔들리지 않았다.
아침이면 장터의 먼지가 얇게 일었다. 보리 자루가 열리고, 은전이 손바닥에서 손바닥으로 건너갔다. 저울추가 내려앉을 때마다 짧은 쇳소리가 났다. 곡식에도 값이 있었고, 신 한 켤레에도 값이 있었다. 사람에게도 값이 붙었다.
왕국의 경계는 넓어졌고, 부유한 집의 상아는 햇빛을 받아 매끈하게 빛났다. 제단에서는 연기가 올랐고 노래가 끊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것을 번영이라 불렀다. 아모스서는 그 풍경 한가운데에 날짜 하나를 놓는다.
“지진 전 이년에.”
아직 벽은 서 있었다. 잔에는 포도주가 남아 있었고, 사람들은 내일도 오늘과 같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드고아의 목자는 땅보다 먼저 무너지는 것을 보았다. 저울이 기울고, 판결이 한쪽으로 쏠리고, 사람의 존엄은 서서히 깎여 나가고 있었다.
아모스는 그 평온 속에서 한 소리를 들었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부르짖으시며.” ‘부르짖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샤아그’(שאג)는 사자의 포효를 가리킨다. 보이지 않는데도 몸이 먼저 알아듣는 소리다. 아직 사자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공기가 달라지고, 초장은 마르며, 멀리 갈멜의 푸른빛까지 시들기 시작한다.
요엘의 마지막에도 그 소리가 있었다. 시온에서 울려 나와 민족들을 떨게 하고, 자기 백성에게는 피난처가 되었던 목소리. 그런데 아모스에 이르면 그 포효는 멀리 머물지 않는다. 제단과 시장과 법정을 지나, 마침내 이스라엘 안으로 들어온다.
하나님의 날을 기다린다고 해서 언제나 그 빛 속에 서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그 목소리가 먼 곳의 잘못을 향한다고 믿고 싶어 한다. 그러나 사자의 울음은 끝내 듣는 사람 앞에 멈춘다.
땅은 아직 흔들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먼저 흔들린 것은 무엇인가?
땅보다 먼저
아모스는 왕궁에서 오지 않았다. 성전에서도 오지 않았다. 드고아의 목자였다. 남유다의 거친 들판에서 짐승의 숨과 먼지를 가까이하며 살던 사람이, 북이스라엘의 중심을 향해 말을 건넸다. 바깥에 있던 사람이 안쪽의 균열을 먼저 보았다.
그때 북이스라엘은 무너지는 나라처럼 보이지 않았다. 여로보암 2세 아래 국경은 넓어졌고, 시장은 붐볐으며, 부유한 집들은 더 화려해졌다. 그러나 번영은 모든 사람에게 같은 얼굴로 오지 않았다. 왕국이 넓어지는 동안, 그 풍요의 바깥으로 밀려나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모스는 얼마 뒤 그 현실을 짧게 적는다.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 한 켤레를 받고 가난한 자를 팔며”(암 2:6). 신발에는 값이 있었다. 사람에게도 값이 붙었다. 문제는 그 둘이 같은 저울 위에 올라갔다는 데 있었다. 시장은 번성했지만, 그 풍요 속에서 어떤 사람들의 존엄은 서서히 깎여 나가고 있었다.
아모스가 본 불의는 몇 사람의 악행으로 끝나지 않았다. 시장에서 사람의 존엄까지 흥정되고 있었고, 법정에서는 힘 있는 쪽으로 판결이 기울었다. 부유한 집에서는 상아 침상이 빛났고, 그 곁에서 노래가 흘렀다. 제단의 불도 꺼지지 않았고 절기도 계속되었다. 문제는 그 모든 것이 한 시대 안에서 함께 가능했다는 데 있었다.
그래서 아모스의 고발은 시장과 법정을 지나, 마침내 예배의 자리까지 들어간다.
“내가 너희 절기들을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암 5:21).
이 말은 예배 자체를 거부하는 선언이 아니다. 제단의 연기가 오르는 동안, 번영한 시장의 그늘에서는 어떤 사람들의 삶이 너무 쉽게 값으로 바뀌고 있었다. 많이 바쳤다고 해서 그 모순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저울이 거짓되다면, 노래는 하나님께 닿기 전에 이미 금이 간다.
아모스는 예배와 삶 사이의 거리를 허락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향해 노래하는 입과 가난한 이의 몫을 계산하는 손은 한 사람에게 붙어 있다. 아모스에게 정의는 말보다 먼저 삶의 문제였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은 사람이 돌아서서 약한 이의 등을 밟을 수는 없었다.
땅은 아직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아모스에게 지진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성벽 밑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먼저 금이 갔다. 땅속 깊은 곳보다, 약한 이들의 삶이 한쪽으로 밀려나는 자리에서 더 서늘한 붕괴가 진행되고 있었다. 훗날 사람들은 실제 지진을 오래 기억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모스가 끝내 기록한 것은 그보다 먼저 무너진 인간의 존엄이었다.
어쩌면 붕괴는 무너지는 날보다 먼저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아무도 위험하다고 말하지 않을 때,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는 것처럼 보일 때, 한 사람의 존엄이 소리 없이 깎여 나가는 곳에서.
사자가 울었다
아모스의 목소리는 처음부터 이스라엘을 향하지 않는다. 먼저 다메섹을 부르고, 가사를 부르고, 두로와 에돔과 암몬과 모압을 부른다. 이름 하나가 불릴 때마다 한 나라의 폭력이 드러난다. 사람을 포로로 넘긴 일, 형제를 끝까지 추격한 일, 땅을 넓히려고 임신한 여인의 배를 가른 일(암 1:3-2:3).
이스라엘은 처음에는 그 소리를 멀리서 들었을 것이다. 남의 죄가 호명될 때 사람은 쉽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나 소리는 멈추지 않는다. 모압을 지나 유다로, 유다를 지나 이스라엘로 들어온다.
듣는 사람은 남의 죄가 불릴 때마다 그 말 안으로 조금씩 들어간다. 그러다 어느 순간 자신도 이미 그 안에 서 있음을 알아차린다. 하나님의 포효는 멀리서 시작하지만, 끝내 듣는 사람 앞에 멈춘다.
타인의 불의 앞에서는 눈이 밝아지면서도 자기 삶의 그늘 앞에서는 쉽게 흐려진다. 먼 전쟁의 잔혹함에는 분노하면서, 내가 누리는 편안함이 누구의 몫을 덜어 내고 있는지는 좀처럼 묻지 않는다. 남의 위선은 선명하게 보이는데, 내가 속한 자리의 특권은 오래 바라보지 못한다. 아모스의 사자는 그 거리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모스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열방의 멸망이 아닐지 모른다. “화 있을진저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느냐 그 날은 어둠이요 빛이 아니라”(암 5:18). 기다리던 날이 빛이 아니라 어둠일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날이 오면 내가 서 있던 자리가 옳았음이 드러날 것이라 믿고 싶어 한다. 그러나 아모스의 하나님은 우리가 그어 놓은 선 안에 머물지 않는다. 그분의 목소리는 늘 저편에서 들려오는 것 같다가, 어느 순간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들린다.
아모스의 하나님은 한 민족 안에 갇히지 않는다. 다메섹에서 사람이 짓밟힐 때도, 가사에서 사람이 팔려 갈 때도, 암몬에서 생명이 찢길 때도 그분의 시선은 거기에 머물렀다. 그리고 그 시선은 이스라엘도 비켜 가지 않았다. “내가 땅의 모든 족속 가운데 너희만을 알았나니 그러므로 내가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암 3:2).
선택은 면제가 아니라 더 깊은 책임이었다.
하나님의 포효는 미움에서 나오지 않는다. 약한 사람의 머리가 먼지 속에 짓밟히는데도 세상이 아무 일 없다는 듯 지나갈 때, 하나님은 침묵하지 않으신다. 아무도 들으려 하지 않았던 울음이 마침내 그분의 목소리가 된다.
“사자가 부르짖은즉 누가 두려워하지 아니하겠느냐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즉 누가 예언하지 아니하겠느냐”(암 3:8).
아모스는 목소리의 주인이 아니었다. 먼저 들어 버린 사람이었다. 예언자는 남보다 크게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남들이 지나친 울음 앞에 먼저 멈춘 사람인지 모른다.
강물의 방향
아모스의 말은 마침내 물이 된다.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암 5:24).
이 물은 잔잔한 풍경이 아니다. 고인 것을 깨우고, 막힌 곳을 지나, 메마른 자리까지 스며드는 물이다. 물은 낮은 곳으로 간다. 마른 흙을 적시고, 오래 비어 있던 자리를 채운다. 높은 곳에 머물지 않는다. 아모스의 정의도 그렇다. 이미 넘치는 곳보다, 오래 메말라 있던 곳을 향한다.
그래서 그의 질문은 언제나 사람에게 닿는다. 누가 법정에서 밀려나는가? 누가 빚 때문에 삶의 자리를 잃는가? 누가 일하고도 제 몫을 받지 못하는가? 누구의 풍요가 다른 사람의 희생 위에 세워지고 있는가?
오늘의 세계는 숫자로 가득하다. 집값, 임금, 주가, 보험료. 숫자는 매일 오르고 내린다. 그러나 아모스는 그 숫자 뒤에 남겨진 사람을 보게 한다.
이 질문 앞에서 번영이라는 말도 흔들린다. 누군가의 편안함이 다른 이의 불안 위에 놓여 있지 않은지, 내가 안전하기 위해 누군가가 더 위험한 자리에 서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
아모스가 문제 삼는 것은 풍요 그 자체가 아니다. 풍요가 시야를 가릴 때다. 내 잔은 가득 차 있는데, 그 곁의 목마름이 보이지 않을 때다. 기울어진 저울 아래 한 사람이 눌려 있다면, 정의는 그 저울을 다시 세우는 쪽으로 움직인다.
아모스서의 끝에는 다시 세워지는 것들이 있다. 무너진 다윗의 장막이 일어서고, 황폐한 성읍에 사람이 돌아오며, 심은 포도나무에서 열매가 맺힌다(암 9:11–15). 그러나 그 회복은 이전의 풍요로 되돌아가는 일이 아니다. 상아 침상은 그대로이고, 가난한 사람은 다시 신 한 켤레에 팔리는 세계라면 그것은 회복이 아니다.
아모스의 마지막에도 처음의 포효는 남아 있다. 초장을 마르게 하던 목소리가 이제는 마르지 않는 강을 요구한다. 무너져야 할 것을 무너뜨리고, 다시 살아야 할 곳으로 물을 흐르게 하는 한 목소리다.
아모스서를 다시 펼치면 사자의 울음은 처음에는 먼 곳에서 들린다. 그러나 몇 장을 지나지 않아 내가 쓰는 저울과 내가 부르는 찬송, 내가 누리는 편안함 가까이까지 와 있다. 더는 남의 이야기로 들을 수 없는 거리다.
땅이 흔들리기 두 해 전, 한 목자는 먼저 그 울음을 들었다.
아모스는 묻는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지금, 무엇이 이미 금이 가고 있는가? 내가 보지 않는 사이 누가 더 낮은 자리로 밀려나고 있는가?
어쩌면 한 인생의 서문도 그렇게 열릴지 모른다. 세상이 무너진 뒤가 아니라, 아직 아무것도 무너지지 않은 것처럼 보일 때 들려오는 목소리 앞에 멈추는 것으로.
사람의 값이 낮아지는 곳에서, 하나님의 포효는 시작된다.
※ 아모스 연구는 오랫동안 역사적 예언자와 책의 형성 과정에 큰 관심을 두어 왔다. 최근에는 여기에 문학적 구성과 수사, 사회적 불의와 예배의 관계를 함께 읽으려는 연구가 활발하다. 고란 에이데발은 예언자의 생애를 추정하기보다 지금 우리가 가진 아모스서 자체의 문학과 신학에 주목한다. 이런 관점에서 아모스 1장 1–2절을 읽으면, ‘지진 전 이 년’과 시온에서 울리는 포효는 아직 흔들리지 않은 세계 안에서 이미 시작된 균열을 드러내는 문지방이 된다. 그리고 1–2장의 포효는 남의 죄에서 시작하는 듯하다가, 끝내 이스라엘 자신을 향한다.
아모스서의 문장
정의 없는 번영은 지진 전의 고요와 닮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