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글 조원태목사의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 위로, 재국의 끝에서 되찾는 숨 (뉴스앤조이) 2026-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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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 재국의 끝에서 되찾는 숨
조원태목사의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
이번에는 성서 66권 각 책의 서문(Threshold, 문지방 텍스트)을 따라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새로운 연재『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로 다시 시작합니다.
이 시리즈는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라는 주제로 출발합니다. 특정 책의 프롤로그 분석을 넘어, 성경 전체의 첫 문장을 따라 걸어가는 실험적 글쓰기로서 목회와 문학, 신학을 잇는 연재가 될 것입니다.
연재의 서막을 여는 글은 프롤로그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소개되며, 이후 매주 성경의 서로 다른 현관을 열어갈 예정입니다.
이 연재가 독자들의 시야를 넓히고 성서를 다시 ‘시작의 자리’에서 읽게 하는 영적 초대가 되리라 믿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성경의 전체적인 가르침이 다시금 생생하게 느껴지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 편집자 주 -
나훔 1:1-8
1 니느웨에 대한 경고 곧 엘고스 사람 나훔의 묵시의 글이라 2 여호와는 질투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3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권능이 크시며 … 여호와의 길은 회오리바람과 광풍에 있고 구름은 그의 발의 티끌이로다 7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 8 그가 범람하는 물로 그곳을 진멸하시고 자기 대적들을 흑암으로 쫓아내시리라

니느웨의 궁전 벽에는 전쟁이 새겨져 있었다. 성벽을 기어오르는 병사들, 질주하는 전차, 끌려가는 포로들의 행렬. 전쟁은 성 밖에서 끝나지 않고 궁전 깊숙한 곳까지 따라 들어왔다. 제국은 폭력을 감추지 않았다. 오히려 돌에 새겨 오래 보게 했다. 보라고. 기억하라고. 두려워하라고.
그 벽 앞에 선 사람은 칼이 닿기 전에 이미 작아졌을 것이다. 제국은 몸보다 먼저 마음을 굴복시킨다. 저 성벽은 무너지지 않는다고. 저 이름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역사는 언제까지나 저들의 것이라고 믿게 한다. 니느웨는 도시의 이름이기 전에, 저항할 마음부터 꺾는 이름이었다.
그런데 작은 예언서 하나가 그 거대한 이름을 첫 문장에 불러 세운다. “니느웨에 대한 경고”(나 1:1). 축하문도 승전보도 아니다. 경고다. 그 짧은 문장이 세계의 중심을 향한다.
너희도 영원하지 않다.
미가가 사마리아와 예루살렘 안의 폭력을 들여다보았다면, 나훔은 시선을 제국의 수도 니느웨로 돌린다. 불의는 안에도 있고 밖에도 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죄도, 제국의 폭력도 영원한 질서로 남겨 두지 않는다. 바로 그 문턱에 쉽게 지나칠 수 없는 말 하나가 놓여 있다.
보복.
2절은 ‘보복하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나캄’을 거듭한다. 하나님을 이렇게 불러도 되는가? 분노하고, 보복하고, 대적을 심판하는 하나님. 우리가 믿고 싶은 하나님은 이런 얼굴을 하고 있는가?
나훔서는 그 불편한 질문을 치우지 않는다. 오히려 그 앞에서 문을 연다.
보복의 문턱
보복이라는 말 앞에서 우리는 대개 머뭇거린다. 받은 만큼 돌려주고 싶은 오래된 충동이 먼저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호와는 질투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나 1:2)이라는 문장은 거칠게 들린다. 하나님마저 복수하는가?
그러나 나훔이 서 있던 자리로 옮겨 서면 문장의 온도가 달라진다. 이 말은 제국의 궁전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승자의 손에 더 큰 칼을 쥐여 주려는 말도 아니다. 앗시리아의 무게 아래 오래 숨죽인 작은 유다의 자리에서 들려온 말이다. 강자의 입에서 보복은 위협이지만, 짓밟힌 사람의 귀에서는 다른 뜻을 얻는다. 폭력은 영원하지 않다는 약속.
나훔이 활동하던 시대는 이미 하나의 폐허를 알고 있었다. 기원전 663년 앗시리아는 이집트의 테베를 무너뜨렸다. 그러나 니느웨는 아직 서 있었다. 무너지지 않을 듯 높고 단단하게. 그리고 기원전 612년, 그 도시도 폐허가 된다. 나훔은 쓰러진 테베와 아직 서 있는 니느웨 사이의 시간에 말한다. 어제 다른 도시를 무너뜨린 제국도 내일은 무너질 수 있다고.
영원해 보이는 힘과 영원한 힘은 같지 않다.
그래서 나훔의 ‘보복’을 충동적인 분노로만 읽기는 어렵다. 보복을 거듭 말한 뒤, 곧바로 하나님을 “노하기를 더디하시는”(나 1:3) 분이라 부른다. 오래 참으심과 심판은 서로를 지우지 않는다. 오래 참으시기에 심판은 변덕이 아니고, 심판하시기에 오래 참으심은 방치가 아니다. 나훔이 말하는 하나님의 진노는 악에게 마지막 말까지 내어 주지 않으려는 하나님의 거절에 가깝다.
아무것에도 분노하지 않는 사랑은 끝내 아무것도 지키지 못할 수 있다. 아이를 때리는 손, 약자를 짓밟는 권력, 사람을 숫자로 만드는 폭력 앞에서도 무표정한 사랑을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까?
나훔의 하나님은 편안한 하나님이 아니다. 그러나 폭력 앞에서 무표정하지도 않다. 그의 진노는 사랑의 반대가 아니라, 사랑하는 것을 파괴하는 힘 앞에서 “여기까지”라고 말하는 얼굴이다.
바로 여기서 나훔은 위험하게 읽힐 수 있다. 분노가 정의의 언어를 빌리는 일은 어렵지 않다. 내가 미워하는 사람을 니느웨라 부르고, 내 복수를 하나님의 심판이라 이름 붙이는 순간, 나훔은 폭력의 끝을 말하는 책에서 폭력을 다시 허락하는 책으로 뒤집힌다.
그러나 나훔은 유다의 손에 보복의 칼을 쥐여 주지 않는다. 심판은 하나님의 몫으로 남는다. 악을 악이라 말하되 내가 최후의 심판자가 되지 않는 것, 복수의 칼을 들지 않고도 폭력의 끝을 믿는 것. 바로 그 좁고 어려운 자리에서 나훔의 위로가 시작된다.
그래서 먼저 물어야 할 것은 “나의 니느웨는 누구인가”가 아니다. 더 먼저 물어야 할 것이 있다. 내가 가진 힘 앞에서 누군가 숨죽이고 있지는 않은가? 내가 정의라고 부르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니느웨의 성벽처럼 보이지 않는가?
구름은 발의 티끌
나훔 1장의 시선이 갑자기 위로 열린다. 니느웨의 성벽에 머물던 눈이 하늘로 들린다. 회오리바람이 들판을 휘감고, 광풍이 나무를 뒤집으며, 먹구름이 산등성이를 넘어온다. 그때 나훔은 구름을 두고 뜻밖의 말을 한다. “구름은 그의 발의 티끌이로다”(나 1:3).
사람이 올려다보면 하늘을 뒤덮는 구름이다. 도시 하나를 작게 만들 만큼 거대한 구름이다. 그런데 나훔은 그것마저 하나님의 발끝에서 일어나는 티끌이라 부른다. 세계의 크기가 다시 정해진다. 사람을 질식시키던 니느웨의 위세가 갑자기 작아지고, 제국보다 더 큰 하늘이 열린다.
바다는 꾸짖음에 마르고, 강물은 바닥을 드러낸다. 바산과 갈멜의 푸름은 시들고, 레바논의 꽃은 빛을 잃는다. 산은 흔들리고 언덕은 녹아내린다. 나훔의 언어는 멈춰 있지 않다. 땅이 떨리고, 물이 물러가고, 구름이 달린다. 그 거대한 움직임 앞에서 제국이 자랑하던 크기는 더 이상 세계의 척도가 아니다.
고대의 왕들은 자신의 힘을 돌에 새겼다. 높은 성벽, 거대한 궁전, 전쟁의 부조, 끝없이 이어지는 왕의 칭호. 사람은 오래전부터 큰 것을 영원한 것으로 착각해 왔다. 셸리의 「오지만디아스」에서 한때 세계를 호령했던 왕의 얼굴이 사막에 부서져 누워 있듯, 나훔은 훨씬 오래전에 니느웨를 향해 묻는다. 그토록 큰 너는, 얼마나 오래 클 수 있는가?
2장과 3장으로 들어가면 그 질문은 장면이 된다. 방패가 번쩍이고, 병거가 거리를 질주하며, 성문이 열리고, 궁전이 무너진다. 한때 다른 도시의 비명을 전리품으로 삼았던 도시가 이제 자기 거리에서 비명을 듣는다. 1장의 회오리바람은 아직 오지 않은 그 붕괴를 먼저 흔들어 놓는다.
나훔 1:1–8에는 이미 책 전체가 접혀 있다. 첫 문장에서 니느웨는 심판의 자리로 불려 나오고, 이어지는 말씀은 그 도시보다 더 큰 하나님의 현존을 펼쳐 보인다.
그런데 7절에 이르면 그 거대한 시선이 한 사람에게 내려앉는다. 세계를 뒤흔드는 하나님이 환난을 피하는 사람의 산성이 된다. 그리고 8절에서 물은 다시 대적을 휩쓴다. 심판과 피난처가 나훔의 문지방에 함께 서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하나님이 앗시리아보다 더 크다는 사실이 아니다. 앗시리아 역시 크기를 힘으로 삼았던 제국이다. 크기만 겨룬다면 하나님은 가장 큰 제국의 왕이 되고 만다. 나훔이 보여 주는 차이는 힘의 크기가 아니라 그 힘이 향하는 곳에 있다.
니느웨의 힘은 사람을 떨게 했다. 하나님의 힘은 떨고 있는 사람에게 숨을 곳이 된다.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나 1:7). 폭풍 한가운데, 산성이 선다.
폭풍 속의 산성
산성은 멀리서 보면 돌벽이다. 그러나 쫓기던 사람이 그 문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돌의 뜻이 달라진다. 문이 닫히고 뒤따르던 발소리가 멀어진다. 가쁜 숨을 고를 시간이 생긴다. 누군가를 막는 벽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살아남게 하는 경계가 된다.
나훔 1장의 거친 풍경 한가운데 그 산성이 놓여 있다.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나 1:7). 세계를 뒤흔드는 하나님이 여기서는 한 사람의 피난처가 된다. 제국은 사람을 인구와 조공과 노동력으로 세지만, 하나님은 피하여 들어온 사람을 안다.
바로 여기에서 심판과 위로는 더 이상 반대말이 아니다. 폭력이 끝나는 순간, 그 폭력 아래 눌려 있던 사람에게는 숨 쉴 자리가 생긴다. 감옥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간수에게는 질서의 붕괴로 들릴지라도, 갇힌 사람에게는 자유의 소리인 것처럼. 같은 사건도 어디에 서서 듣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이름을 얻는다.
그래서 이 거친 책의 예언자에게 ‘나훔’, 곧 위로의 이름이 붙어 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위로는 언제나 부드러운 손길이나 따뜻한 말로만 오지 않는다. 어떤 위로는 단 한 문장으로 온다. 이 고통은 영원하지 않다고. 너를 짓누르는 힘도 마지막은 아니라고.
1장에는 출애굽의 오래된 기억도 어른거린다. “노하기를 더디하시는”(나 1:3)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시내산에서 들려온 하나님의 자기소개를 떠올리게 하고, 바다와 강을 말리시는 모습은 종살이하던 이들이 물을 건너 자유로 나아가던 이야기를 겹쳐 보게 한다. 제국의 이름은 이집트에서 앗시리아로 바뀌었지만 질문은 그대로 남는다. 사람을 영원히 붙들어 둘 수 있는 제국이 있는가?
미가와 나훔은 이 자리에서 다시 만난다. 미가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름이 내부의 불의를 면제해 주지 않는다고 말했다. 나훔은 제국의 크기 또한 외부의 폭력을 영원하게 만들지 못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우리 편이라는 이유로 우리의 불의를 덮지 않고, 강대하다는 이유로 제국의 불의를 영원한 현실로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정의의 시선은 성벽 안에서도, 성벽 밖에서도 멈추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훔의 위로는 새로운 니느웨를 세우라는 초대일 수 없다. 폭력에서 풀려난 사람이 다시 다른 사람의 목 위에 발을 올려놓는 순간, 해방은 또 하나의 제국이 된다. 힘은 쉽게 자신을 정의라고 부르고, 승자는 자신의 승리를 옳음으로 기록한다. 나훔이 무너뜨리는 것은 니느웨라는 한 도시만이 아니라, 힘이 영원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우리에게도 좀처럼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것들이 있다. 군사력의 지도, 시장의 숫자, 돈의 흐름, 화면을 장악한 목소리, 사람을 침묵시키는 조직의 위계. 오래 지속된 힘은 어느 순간 현실 그 자체처럼 보인다. 우리는 바꿀 수 없는 것이라고 체념한다. 나훔은 바로 그 체념에 금을 낸다.
제국이 가장 오래 버티는 곳은 성벽이 아니라 사람의 체념 속이다.
그래서 끝내 다시 1장 7절로 돌아오게 된다. 나훔서의 중심에는 칼만 있지 않다. 산성이 있다. 하나님은 무너뜨리는 분으로만 서 있지 않는다. 누군가 달려가 몸을 숨길 곳이 된다. 심판이 폐허만 남긴다면 그것은 또 하나의 파괴일 뿐이다. 그러나 나훔의 심판 곁에는 한 사람이 숨을 되찾는 자리가 있다.
처음의 니느웨는 너무 컸다. 성벽은 높았고, 군대의 발소리는 컸으며, 왕의 이름은 먼 곳까지 닿았다. 그러나 나훔 1장을 지나오면 풍경이 달라진다. 니느웨 위로 구름이 흐른다. 그 거대한 구름조차 하나님의 발끝에서는 티끌이다. 그리고 그 아래, 거의 보이지 않는 한 사람이 산성 안으로 들어간다.
제국은 작아지고, 한 사람은 다시 숨을 쉰다.
나훔서를 읽는 우리의 시선은 끝내 그 장면까지 가야 하는지 모른다. 무엇이 무너지는지만 바라보던 우리의 눈을, 그 폐허 곁에서 다시 숨을 쉬기 시작한 사람에게로 돌려놓는 책.
그래서 나훔의 마지막 질문은 단지 “누가 무너질 것인가”에 머물지 않는다. 나는 무엇을 영원한 것처럼 두려워하고 있는가. 그리고 내가 가진 힘은 누군가를 숨죽이게 하는 성벽인가, 아니면 숨을 돌리게 하는 산성인가.
나훔의 문지방에는 결국 두 문장만 남는다.
제국은 끝난다.
피할 곳은 있다.
그 두 문장 사이에서, 나훔이라는 오래된 위로가 다시 우리를 책 안으로 부른다.
※ 나훔서는 오랫동안 니느웨의 멸망을 선포하는 심판의 책으로 읽혀 왔다. 현대의 나훔 연구의 중요한 흐름은 그 심판의 의미뿐 아니라, 책이 사용하는 폭력의 언어와 그 윤리적 긴장, 그리고 앗시리아 제국이라는 역사적·수사적 배경까지 함께 살핀다. 줄리아 M. 오브라이언은 나훔의 시적 아름다움과 폭력적 수사가 어떻게 맞물리는지를 비판적으로 읽으며, 그 긴장을 외면하지 않는 윤리적 독해를 요청한다. 다니엘 C. 티머는 나훔을 앗시리아 제국의 정치적·상징적 세계 속에서 읽으며, 같은 하나님의 행위가 폭력적인 제국에는 심판이면서 그 아래 눌린 이들에게는 구원이 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그렇게 보면 나훔 1:1–8은 단순히 분노하는 하나님의 초상이 아니다. 폭력에는 끝이 있고, 환난 속에는 피할 산성이 있다는 두 선언을 함께 품은 나훔서 전체의 문지방이다.
나훔서의 문장
폭력의 가장 깊은 패배는, 한 사람이 다시 숨을 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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