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글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 숨결, 말씀 곁에 심긴 사람의 노래 (뉴스앤조이) 2026-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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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결, 말씀 곁에 심긴 사람의 노래
이번에는 성서 66권 각 책의 서문(Threshold, 문지방 텍스트)을 따라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새로운 연재『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로 다시 시작합니다.
이 시리즈는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라는 주제로 출발합니다. 특정 책의 프롤로그 분석을 넘어, 성경 전체의 첫 문장을 따라 걸어가는 실험적 글쓰기로서 목회와 문학, 신학을 잇는 연재가 될 것입니다.
연재의 서막을 여는 글은 프롤로그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소개되며, 이후 매주 성경의 서로 다른 현관을 열어갈 예정입니다.
이 연재가 독자들의 시야를 넓히고 성서를 다시 ‘시작의 자리’에서 읽게 하는 영적 초대가 되리라 믿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성경의 전체적인 가르침이 다시금 생생하게 느껴지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 편집자 주 -
시편 1:1–6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4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5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6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성경 한복판을 펼치면 종이 사이로 물소리가 난다.
그 소리는 시편의 첫 사람이 서 있는 물가에서 흘러나온다. 그는 이미 시냇가에 심긴 나무처럼, 보이지 않는 뿌리로 말씀의 물에 닿아 있다(시 1:3). 그 물가로 성소를 그리워하던 새벽의 노래가 흘러들고, 도망자의 동굴 벽에 부딪혀 낮게 울리던 탄식도 스며든다. 바벨론 강가의 젖은 흙 위에서 목이 메어 끊겼던 울음, 죽음 곁에서 마지막 숨을 붙들던 기도도 그 흐름 안으로 함께 흘러든다(시 57; 142; 137:1; 31:5).
시편은 책장에 얌전히 꽂힌 노래집이 아니다. 말이 끊긴 절벽 끝에서도 사람의 입술에 끝내 남아 있던 생존의 소리다. 울음이 기도가 되고, 기도가 다시 숨이 되는 소리. 시편은 그 마지막 호흡마저 하나님께 닿게 하는 자리다.
시편의 문턱에 이르면, 가장 먼저 고요한 한마디가 귀에 닿는다.
“복 있는 사람은”
할렐루야도, 성전의 찬가도, 왕의 이름도 아니다.
갈림길 앞에 한 사람이 서 있다. 발밑에는 사람들이 오래 밟아 단단해진 길이 있고, 저 만치에는 비어 있는 자리가 하나 놓여 있다. 그 자리는 위협적이지 않다. 오히려 부드럽고 편안하다. 잠시 앉으면 더는 혼자 서 있지 않아도 될 것처럼 보인다. 그는 사람들이 몰려가는 방향을 바라보고, 저 자리가 건네는 은근한 속삭임을 듣는다.
그러나 그는 멈춘다.
그리고 앉지 않는다.
성경의 많은 책이 하나님이 사람에게 건네신 말씀이라면, 시편은 사람이 하나님께 되돌려 드린 숨이다. 그래서 시편은 인간의 감정을 하나님 앞에 데려간다. 탄식도, 분노도, 죄책감도, 감사와 찬양도 그 앞에서 자기 말을 얻는다.
그러나 그 모든 말이 하나님께 가기 전에, 시편은 먼저 한 사람의 자리를 묻는다. 너는 지금 어디에 앉아 있는가?
시편 1편은 이 거대한 노래집을 여는 높은 창이다. 이 창가에 서면 150편의 능선이 멀리 펼쳐진다. 아직 해가 완전히 오르기 전, 어둠 속의 산등성이들이 빛을 받으며 하나씩 모습을 드러내듯 시편의 풍경도 서서히 열린다.
저편에서 먼저 발소리가 들린다. 성전에 오르는 순례자의 젖은 발걸음이다. 그 뒤로 다윗의 긴 밤과 아삽의 아픈 질문, 고라 자손의 목마른 갈망이 어둠 속에서 차례로 모습을 드러낸다. 바벨론 강가를 지나 돌아온 공동체의 떨리는 찬양도 가늘게 들려온다. 왕의 노래와 죄인의 참회, 원수 앞에서 터지는 부르짖음과 마지막 할렐루야가 이 첫 장면 안에서 희미한 불빛처럼 번진다.
여기서 길과 자리가 갈라진다. 말씀을 되뇌는 나무와 바람에 흩어지는 겨가 갈라진다. 남는 삶과 사라지는 삶이 갈라진다.
그러므로 시편 1편은 단지 맨 앞에 놓인 시가 아니다. 시편 전체가 어떤 숨으로 시작해 어디를 향해 흘러갈지를 미리 보여 주는 문지방이다.
이 문지방 앞에서 오늘의 우리도 걸음을 멈춘다. 말은 넘치는데 숨은 얕다. 화면은 쉬지 않고 우리를 어디론가 끌고 가고, 분노는 우리를 쉽게 의로운 사람처럼 느끼게 하며, 속도는 생각이 머물 틈을 빼앗는다. 그때 시편은 빠른 대답 대신 천천히 파고드는 질문을 건넨다. 너는 무엇을 주야로 되뇌고 있는가. 어떤 말이 너를 적시고, 어떤 소리가 너를 마르게 하는가.
시편 1편의 중심에는 “주야로 묵상하는도다”가 놓여 있다(시 1:2). 여기서 묵상은 머릿속 생각을 가지런히 정리하는 시간이 아니다. 히브리어 하가(hagah)는 입술 안쪽에서 낮게 되뇌는 소리, 오래 머금은 말씀이 몸속에서 다시 울리는 읊조림의 결을 품고 있다. 먹이를 움켜쥔 사자의 낮은 으르렁거림처럼, 묵상은 말씀을 놓치지 않으려는 깊은 갈망에 가깝다. 말씀은 그 오랜 되뇜 속에서 생각을 지나 숨이 되고, 숨은 다시 한 사람의 삶을 움직이는 노래가 된다.
그 오랜 되뇜에서 탄식이 태어난다. 탄식은 어두운 밤을 지나 감사의 언어로 건너가고, 감사는 마침내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라는 마지막 찬양에 이른다(시 150:6). 시편은 복으로 시작해 호흡으로 끝난다. 그 사이에서 한 인생은 운다. 묻는다. 기다린다. 다시 노래한다.
그렇게 조금씩 배운다. 하나님 앞에서 숨 쉬는 법을.
앉지 않는 사람
그 자리는 오래 비어 있지 않다. 사람들은 그 곁을 지나가다 하나 둘 눈길을 주고, 마침내 몸을 맡긴다. 분노에 기대고, 조롱에 팔을 얹고, 냉소에 등을 묻고, 자기 의에 깊숙이 가라앉는다.
복 있는 사람은 그 의자 앞에서 멈춘다.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시 1:1). 따르고, 서고, 앉는다. 세 동사는 악이 사람 안으로 스며드는 은밀한 동선을 보여 준다.
처음에는 스쳐 지나가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발끝에 먼지가 조금 묻었을 뿐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어느새 그 길 위에 서 있고, 마침내 그 자리를 자기 자리로 삼는다. 악은 한 번에 사람을 삼키지 않는다. 처음에는 길가의 풍경처럼 익숙해지고, 다음에는 쉼터처럼 편안해지며, 나중에는 그곳이 처음부터 내 자리였던 것처럼 느끼게 만든다.
이 첫 문장은 시편 전체를 읽는 첫 자세를 정한다. 시편에는 악인의 형통과 폭력의 성공, 억울한 사람의 긴 밤이 함께 들어 있다. 의인이 늘 웃고 악인이 늘 넘어지는 세상이라면, 시편은 이렇게 깊고 두껍지 않았을 것이다.
시편은 악인이 웃는 세상에서 의인이 어떻게 숨 쉬는지를 묻는다.
그래서 시편의 첫 복은 무엇을 얻었느냐보다 어디를 향해 서 있느냐에 가깝다. 복은 더 많이 쥔 상태가 아니라, 자신을 함부로 내주지 않는 자유다. 악인의 꾀를 따라가지 않는 자유, 죄인의 길 위에 오래 서 있지 않는 자유, 오만한 자의 자리를 내 자리로 삼지 않는 자유. 복 있는 사람은 먼저 거절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 거절은 완고함이 아니라, 영혼이 아직 살아 있음을 지키는 첫 자유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이 첫 절은 더 선명하게 다가온다. 화면은 분노가 지나갈 길을 비추고, 알고리즘은 조롱이 쉬어 갈 자리를 슬며시 마련한다. 우리는 손가락 하나로 길을 고르고, 짧은 문장 하나로 누군가의 얼굴을 흐리게 만든다. 그렇게 오래 머문 곳은 어느새 우리의 표정과 말투가 된다.
누군가의 고통을 너무 빨리 해석해 버리는 곳, 다른 사람의 실패를 내 의로움의 증거처럼 소비하는 곳, 하나님 없이도 세상을 다 아는 듯 말하는 곳. 그곳에 오래 앉으면 귀가 먼저 굳는다. 탄식은 약자의 투정처럼 들리고, 회개는 늘 남의 몫으로 보이며, 찬양은 고백이 아니라 장식이 된다.
시편은 아직 노래하지 말라고, 먼저 네가 머문 자리를 보라고 한다. 오래 들은 말은 어느새 숨이 되고, 오래 앉은 자리는 어느새 얼굴이 된다. 복은 조용히 몸을 일으켜, 더는 그 자리를 내 자리라 부르지 않는 데서 시작된다.
중얼거리는 나무
시편의 첫 시는 이제 우리를 말씀의 물가로 데려간다. 그곳에 나무 한 그루가 말없이 서 있다. 바람이 지나가면 잎은 미세하게 떨리고, 땅속 깊은 곳에서는 보이지 않는 뿌리가 물길을 더듬는다.
이 나무는 강해서가 아니라, 좋은 자리에 심겼기 때문에 산다. 가지가 하늘로 뻗기 전에, 뿌리가 먼저 물을 만났다. 햇빛 아래 드러난 것은 줄기와 잎이지만, 생명을 붙드는 일은 늘 보이지 않는 아래쪽에서 오래 이루어진다.
복 있는 사람도 그렇다. 그는 자기 안에 생명의 물을 저장해 둔 사람이 아니다.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그 말씀을 주야로 되뇌는 사람이다.
그는 은근히 되뇌고, 몸에 배도록 읊조린다. 말씀이 몸의 리듬이 될 때까지 말씀의 물가에 오래 머문다. 그렇게 한 구절이 한 사람의 숨이 되고, 그 숨이 마침내 삶의 방향이 된다.
시편은 이 유서 깊은 되뇜에서 태어난다. 시인은 하나님께 말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오래 들은 사람이다. 그래서 시편의 기도는 허공에 흩어지는 감정이 아니다. 말씀 곁에서 길을 얻은 마음의 언어다. 슬픔은 말씀 곁에서 울고, 분노는 말씀 곁에서 떨며, 기쁨은 말씀 곁에서 노래가 된다.
시편 1편의 나무는 이미 150편의 숲을 품고 있다. 비탄은 깊은 뿌리로 내려가고, 감사는 푸른 잎으로 돋아난다. 왕의 시편이 바라보는 하나님의 통치, 순례의 노래가 따라가는 길, 마지막 할렐루야의 열매까지 이 한 그루 안에 이미 맺혀 있다.
나무는 서두르지 않는다. 매일 자기를 증명하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뿌리로 물을 길어 올릴 뿐이다. 시편의 사람도 그렇다. 그는 쉽게 마르지 않는 사람이다. 잎사귀 하나가 푸르기까지 땅속의 어둠을 견딘 사람이다.
시냇가에 심겼다고 폭풍이 비켜 가는 것은 아니다. 뿌리가 물가에 닿아 있어도 밤은 오고, 원수는 일어나며, 몸은 쇠하고, 성전은 무너질 수 있다. 그러나 뿌리가 닿은 곳이 다르면 같은 밤도 다르게 견딘다. 시편 1편이 말하는 형통은 고난이 없는 삶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도 마르지 않는 생명력이다.
시편을 읽는다는 것은 나무처럼 서는 일이다. 당장 꽃을 피우지 못해도 말씀 곁에 오래 머무는 일이다. 내 안의 메마른 소리들을 말씀의 물가로 데려가 오래 적시고, 오래 되뇌는 일이다. 마침내 하나님의 말씀이 내 입술의 말이 되고, 내 몸의 리듬이 되고, 내가 걸어갈 길이 되게 하는 거룩한 수련이다.
바람 너머의 노래
시편의 첫 장에는 물가만 있지 않다. 바람 부는 타작마당도 있다. 햇빛은 희고, 땅은 바짝 말라 있다. 바람이 한 번 지나가면 겨가 허공으로 흩어진다. 알곡은 무겁게 남고, 겨는 가볍게 날린다. 겨에는 뿌리도, 머물 자리도 없다. 바람이 부는 쪽이 곧 자기 길이 된다. 멀리서 보면 자유로운 비행처럼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아무 것에도 붙들리지 못한 표류다. 그것은 뿌리 없는 가벼움의 비극이다.
시편의 하늘에는 바람 부는 시간이 많다. 왕국은 흔들리고, 악인은 형통하며, 가난한 자는 짓밟히고, 의인은 자신이 잊힌 것처럼 느낀다. 그래서 시편은 인간 영혼의 날씨를 기록한 기상도에 가깝다. 맑은 날도 있지만, 폭풍이 오래 머무는 날도 있다. 긴 가뭄이 있고, 갑작스러운 홍수가 있으며, 말문마저 젖어 버리는 눅눅한 밤도 있다.
그러나 시편은 그 모든 날씨를 지나 끝내 찬양을 향해 흐른다. 그 물길은 반듯하게 흐르지 않는다. 다시 무너지고, 다시 묻고, 다시 울고, 다시 기다린다. 그래도 시편의 끝은 찬양이다. 마지막 다섯 편은 숨 가쁜 할렐루야로 열린다. 슬픔을 지워서가 아니라, 슬픔을 하나님 앞에서 끝내 말해 냈기 때문이다.
우리는 감정을 빨리 처리하라고 배운다. 그러나 시편은 감정을 치우지 않는다. 하나님 앞으로 데려간다. 신음은 기도가 되고, 원망은 숨김없는 말이 되며, 오래 하나님 앞에 머문 마음은 마침내 찬양으로 숨을 얻는다. 그렇게 한 사람의 어둠은 공동체의 기도가 되고, 공동체의 상처는 다시 한 사람의 입술에서 노래가 된다. 시편은 기도로 된 역사이며, 역사로 된 노래다.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시 1:6). 여기서 인정한다는 말은 멀찍이 서서 옳고 그름을 판정한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이 그 길을 아신다는 뜻이다. 히브리어의 앎은 차가운 관찰이 아니라 함께 걸어 본 사람의 기억에 가깝다. 어두운 골짜기와 먼지 묻은 발자국과 멈춰 선 밤까지, 곁에서 잊지 않는 사랑의 언어다.
그 길 위에서 사람은 때로 “어디 계십니까” 묻고, “나를 잊으셨나이까” 부르짖는다. 그러나 시편은 그 밤에도 한 가지 진실만은 끝내 붙든다. 하나님은 그 길을 아신다. 어두운 골짜기와 원수의 식탁과 깊은 웅덩이를 지나도, 그 부름은 허공에 흩어지지 않는다. 하나님이 멀어진 듯한 밤에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일, 그것이 시편의 숨결이다.
시편을 다시 읽는다는 것은 내 숨을 말씀 곁에 다시 심는 일이다. 울음이 길을 잃지 않고 하나님께 닿게 하며, 흩어지기 쉬운 기쁨이 마침내 찬양으로 익어 가게 하는 일이다.
시편은 복 있는 사람으로 시작해, 호흡 있는 모든 자의 찬양으로 끝난다. 그 사이에서 사람은 운다. 묻는다. 기다린다. 용서받는다. 다시 노래한다.
신앙은 어쩌면 해답을 손에 쥐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 끊어진 숨을 다시 잇는 일인지 모른다. 말씀을 속 깊이 되뇌며 하루를 건너는 숨, 바람 속에서도 뿌리를 잃지 않는 숨, 울면서도 하나님께 말을 거는 숨.
시편을 펼치는 일은, 하나님 앞에서 다시 숨 쉬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 시편은 오래도록 신앙 공동체의 기도책이었다. 시편은 성경 안에 놓인 기도의 성소이며, 하나님의 백성이 자신의 울음과 찬양을 하나님께 되돌려 드려 온 가장 오래된 숨결이다. 현대 연구는 한때 각 시의 장르와 예배 자리를 밝히는 데 집중했지만, 제럴드 윌슨 이후에는 시편을 의도적으로 배열된 한 권의 책으로 읽는 흐름이 중요해졌다. 이 관점에서 시편은 흩어진 노래들의 모음이 아니라, 탄식에서 찬양으로, 왕의 실패에서 하나님의 통치로 나아가는 긴 여정이다. 월터 브루그만의 시편 읽기를 빌리면, 시편은 안정된 질서의 노래에서 흔들림의 탄식을 지나, 하나님 안에서 새롭게 회복된 찬양으로 나아가는 책이다. 그래서 시편 1편은 단순한 첫 시가 아니다. 말씀 곁에 심긴 사람의 길을 열고, 이어지는 모든 노래를 읽게 하는 첫 호흡이며 문지방이다.
조원태 목사 / <뉴욕우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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