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글 조원태 목사의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 성전, 돌보다 먼저 세워지는 귀 (뉴스앤조이) 2026-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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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 돌보다 먼저 세워지는 귀
이번에는 성서 66권 각 책의 서문(Threshold, 문지방 텍스트)을 따라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새로운 연재『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로 다시 시작합니다.
이 시리즈는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라는 주제로 출발합니다. 특정 책의 프롤로그 분석을 넘어, 성경 전체의 첫 문장을 따라 걸어가는 실험적 글쓰기로서 목회와 문학, 신학을 잇는 연재가 될 것입니다.
연재의 서막을 여는 글은 프롤로그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소개되며, 이후 매주 성경의 서로 다른 현관을 열어갈 예정입니다.
이 연재가 독자들의 시야를 넓히고 성서를 다시 ‘시작의 자리’에서 읽게 하는 영적 초대가 되리라 믿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성경의 전체적인 가르침이 다시금 생생하게 느껴지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 편집자 주 -
역대하 1:1-6
“다윗의 아들 솔로몬의 왕위가 견고하여 가며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사 심히 창대하게 하시니라 … 솔로몬이 온 회중과 함께 기브온 산당으로 갔으니 … 여호와 앞 곧 회막 앞에 있는 놋 제단에 솔로몬이 이르러 그 위에 천 마리 희생으로 번제를 드렸더라”

새 왕조는 산길에 이는 먼지로 문을 연다. 기브온으로 향하는 행렬이 비탈을 타고 오르자 발끝에 차인 잔돌들이 아래로 흩어지고, 긴 그림자들이 산등성이에 눕는다. 솔로몬은 앞서 걷고, 방백들과 족장들과 온 회중은 그 뒤를 따른다.
먼저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회막의 천막과 놋제단이다. 역대하가 먼저 붙드는 것은 하나님께로 몸을 돌리는 한 공동체의 방향이다.
기브온의 풍경은 이상할 만큼 어긋나 있다. 법궤는 예루살렘에 옮겨져 있었고, 모세의 회막과 브살렐의 놋제단은 기브온, 곧 여호와의 장막 앞에 남아 있었다. 거룩한 것들이 한곳에 있지 않다는 사실은 단순한 배치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아직 한 집을 이루지 못한 백성의 형편을 비춘다. 성전의 시대가 막 열리는데 첫 장면이 흩어짐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바람은 먼지를 밀어 올리고, 해묵은 천막에서는 광야의 냄새가 난다. 제단은 오래된 연기를 검게 뒤집어쓴 채 침묵한다. 역대하는 바로 이 흩어진 자리에서, 다시 하나로 모아질 중심을 향해 문을 연다.
성전은 돌보다 먼저 방향이다. 흩어진 걸음을 한곳으로 돌리고, 흩어진 백성을 다시 모으는 자리다. 공동체는 어디로 다시 몸을 돌려야 하는가. 이 물음은 이미 역대하의 첫 장면에 놓여 있다.
이 오래된 서문은 오늘에도 닳지 않는다. 사람들은 눈을 뜨자마자 손바닥만 한 빛을 먼저 집어 든다. 밤새 밀려든 속보와 분노와 유행이 그 안에서 번쩍이고, 전쟁과 재난의 화면, 시장의 불안이 하루의 공기를 먼저 차지한다. 잠에서 덜 깬 마음은 두려움과 욕망에 먼저 붙들린다. 손가락 하나가 화면을 밀어 올릴 때마다 내면도 함께 출렁인다. 하루가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수십 개의 끌림이 우리를 제 쪽으로 잡아당긴다. 그래서 오늘의 사람은 바쁘기 전에 먼저 흩어진다.
몸은 한자리에 머물러도 마음은 벌써 여러 산당을 떠돈다. 인정과 불안의 제단 사이를 오가며, 사랑하는 것과 두려워하는 것이 몇 번이나 얼굴을 바꾸는지 다 헤아리지 못한 채 하루는 저문다.
왕과 백성과 제단이 한 방향으로 오르는 그 느린 장면이, 숨 돌릴 틈 없이 질주하는 우리 시대의 심장을 정면으로 건드린다. 이 서문을 읽는다는 것은 오래된 성물의 배치를 공부하는 일이 아니다. 내 삶을 실제로 붙드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끝내 돌아갈 곳이 어디인지 들여다보는 일이다.
왕관보다 제단
이 첫 장면에는 솔로몬보다 한 나라의 몸이 먼저 들어온다. 그는 홀로 빛나지 않는다. “온 회중과 함께” 오른다. 지도자들과 백성의 긴 숨결이 산길을 채운다. 새 왕조의 첫 행렬이 궁의 문이 아니라 제단을 향한다는 사실, 그 낯선 방향 하나가 이미 책 전체를 예고한다.
여기서 예배는 사적인 수양이 아니라 한 나라의 얼굴이 어디를 바라보는지 드러내는 공적 장면이다. 흩어진 사람들을 한 방향으로 세우고, 제각기 뛰던 심장을 하나의 박자로 묶는 일이다.
좋은 왕은 백성을 하나님 앞으로 다시 불러 모은다. 닫힌 성전 문을 열고, 잡초 돋은 제단을 일으키고, 잊힌 절기 위에 노래를 다시 얹는다. 반대로 나쁜 왕은 그 중심을 잃은 채 무너진다. 왕이 먼저 흔들리면 성전 뜰의 공기가 식고, 제단의 불이 약해지면 백성의 눈빛도 함께 흐려진다. 나라의 몰락은 예배의 불씨가 꺼지는 자리에서 먼저 시작된다.
솔로몬의 이 첫 걸음 안에 책 전체의 씨앗이 들어 있다. 어떤 왕은 성전 문을 열어 노래와 제사를 다시 일으킬 것이고, 어떤 왕은 그 문을 닫아 나라의 숨을 막히게 할 것이다. 어떤 시대에는 제단의 불이 다시 타오르고, 어떤 시대에는 뜰에 잡초가 무릎까지 자랄 것이다. 마침내 불길은 집 자체를 삼키고, 돌들은 무너지고, 남은 자들은 재 냄새를 품은 채 낯선 땅으로 흩어질 것이다. 이 모든 이야기가 이미 한 왕이 먼저 제단 앞으로 걸어가는 이 장면 속에 들어 있다.
본문 마지막의 천 마리 번제는 이 장면을 열왕상 3장의 밤으로 밀어 올린다. 불길은 어둠을 밀어내며 제단 위에서 오래 타오르고, 연기는 산등성이를 넘어 하늘로 스민다. 그 밤, 제단 곁에는 아직 식지 않은 재와 뜨거운 돌의 냄새가 남아 있다. 열왕상은 바로 그 번제의 밤을 더 깊이 들여다본다.
솔로몬은 장수도, 부도, 원수의 생명도 구하지 않았다(왕상 3:11). 그가 구한 것은 히브리어로 레브 쇼메아, 곧 듣는 마음이었다(왕상 3:9). 말씀에 먼저 귀를 기울이고, 백성의 사연 앞에 자기 뜻을 앞세우지 않으며,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를 낮출 줄 아는 마음이다. 들으려는 의지가 먼저 심장에 자리 잡는 순간, 권력은 비로소 방향을 얻는다.
그러므로 성전은 듣는 마음에서 시작된다. 백향목과 금이 집을 세울 수는 있어도, 듣는 마음 없이는 그 집이 끝내 성전으로 서지 못한다. 눈에 보이는 장엄함보다 먼저, 보이지 않는 순종이 그 집의 기초를 이룬다.
그래서 역대하는 왕을 그가 선 자리로 읽는다. 왕은 어디에 서는가. 왕은 무엇 앞에 먼저 고개를 숙이는가. 그 물음 하나가 한 나라의 운명을 가른다. 성전 가까이 간 왕은 백성의 호흡을 살리고, 성전에서 멀어진 왕은 나라의 축을 잃는다. 나라는 법과 무력만으로 오래 버티지 못한다. 모두가 함께 바라볼 한 초점, 함께 돌아갈 한 주소가 있을 때에만 오래 선다.
한 집을 이루지 못한 거룩
역대하의 아름다움은 성전을 말하면서도 아직 성전이 없는 자리에서 시작된다는 데 있다. 사람은 웅장한 집을 기대하지만, 먼저 펼쳐 보이는 것은 텅 빈 터와 흩어진 거룩이다. 황금도, 백향목도, 하늘을 찌를 듯한 기둥도 없다. 대신 해묵은 회막이 바람을 맞고, 브살렐이 만들었던 놋제단이 오래된 불의 기억을 검게 두른 채 서 있다.
새 시대는 열렸지만 거룩한 것들은 아직 서로 떨어져 있다. 법궤는 예루살렘에, 회막은 기브온에, 제단은 그 앞에 있다. 거룩한 것들이 한곳에 모이지 못했다는 사실은 단순한 배치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아직 한 집을 이루지 못한 백성의 형편을 비춘다. 본문은 바로 그 어긋난 풍경으로 말한다. 시작은 좀처럼 완성의 얼굴로 오지 않는다고. 하나님은 다 갖추어진 중심보다 아직 모여 가는 흔적들 속에서 먼저 자신을 드러내신다고.
사람의 삶도 그렇다. 우리는 모든 것이 정돈된 뒤에야 하나님을 찾을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한다. 마음이 잠잠해지고, 일정이 정리되고, 삶의 조각들이 반듯하게 맞춰진 다음에야 거룩을 말할 수 있을 것처럼 여긴다. 그러나 사람은 오히려 흩어졌을 때 길을 나선다. 안이 소란할 때, 무엇이 중심인지 더는 알 수 없을 때, 그제야 오래된 제단을 찾아간다. 길은 대개 가장 잘 정리된 순간보다, 더는 버틸 수 없이 흩어진 순간에 열린다.
그래서 성전은 단지 웅장한 건축물이 아니다. 여기서 성전은 보이는 집이면서 동시에 보이지 않는 방향이다. 사람들의 시선을 한곳으로 돌리고, 바깥으로 새어 나가던 마음을 하나님 쪽으로 다시 붙드는 힘이다. 성전이 한 나라의 심장이 뛰는 자리라는 말이 비유에 그치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다.
성전이 살아 있으면 개혁은 법보다 먼저 삶의 공기에서 시작된다. 닫혔던 문이 삐걱이며 열리고, 먼지 덮인 기구들이 다시 햇빛을 받는다. 오랫동안 멎어 있던 찬양의 숨이 성전 뜰에 차오르고, 잡초가 제단 틈을 비집고 올라오던 자리에는 다시 발소리가 모인다. 잊힌 절기 위로 노래가 돌아오고, 사람들은 비로소 같은 방향으로 숨 쉬기 시작한다.
성전 수리와 정결, 유월절 회복과 찬양대의 질서를 그토록 집요하게 기록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그것은 건축 보고서가 아니다. 무너진 공동체의 호흡이 어떻게 되살아나는지 보여 주는 기록이다. 금이 간 돌을 메우는 동시에 금이 간 시간을 다시 꿰매는 일이다.
솔로몬이 천 마리 희생으로 번제를 드리는 장면도 단지 장엄한 의식으로만 읽히지 않는다. 제단 앞으로 끌려오는 짐승의 울음, 번쩍이는 칼날, 돌 위에 번지는 피, 불길이 밀어 올리는 짙은 연기. 그 연기는 아침의 찬 공기를 뚫고 하늘로 오른다. 피 냄새와 불 냄새가 산바람에 섞이고, 타오르는 불빛은 사람들의 얼굴을 붉게 흔든다. 그 앞에 선 나라는 자기 운명을 어디에 묶어 두어야 하는지 몸으로 배운다.
권력은 언제나 스스로를 중심에 두고 싶어 한다. 왕관은 자꾸만 자기 머리 위의 빛을 보게 만든다. 그러나 역대하는 왕의 첫 장면을 제단 앞에 세움으로써 그 유혹을 끊어 낸다. 왕도 제단 앞에 서야 한다. 나라의 미래도 그 앞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여기서 성전은 돌로 지은 건물에 앞서 권력이 무릎을 배우는 자리다. 흩어진 마음과 시대가 다시 한 이름 아래 모이는 자리다.
불타지 않는 주소
끝까지 읽고 나면 솔로몬의 영광은 오래가지 않는다. 햇빛을 받아 눈부시던 성전은 어느 날 검은 연기 속으로 사라진다. 금빛 문짝은 재가 되고, 향내로 가득하던 뜰에는 타는 나무 냄새와 먼지 냄새가 뒤엉킨다. 성벽은 벌어진 입처럼 무너지고, 깨진 돌들은 거리마다 흩어진다. 조금 전까지 노래가 오르던 집에서는 이제 불꽃이 지붕을 핥고, 불이 지나간 자리마다 그을음과 침묵만 남는다.
사람들은 등 떠밀리듯 성 밖으로 쏟아져 나온다. 아이를 안은 여자, 고개 숙인 노인,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는 사내. 모두 자기 집의 방향을 몸으로는 기억하지만, 더는 그리로 걸어갈 수 없다. 발은 앞으로 밀려가는데 눈은 자꾸 뒤를 향한다. 무너지는 것은 벽만이 아니다. 한 시대가 함께 숨 쉬던 방향도, 한 백성이 함께 올려다보던 중심도 그날 무너진다(대하 36:17-19).
그러나 역대하는 폐허를 마지막 화면으로 남겨 두지 않는다. 맨 끝에 남는 것은 짧은 칙령 하나다. “너희 중에 그의 백성 된 자는 다 올라갈지어다”(대하 36:23). 돌아오라. 다시 세우라. 잿더미 위에도 아직 문장 하나가 살아 있다는 뜻이다. 불길이 집을 삼켰어도, 그 집을 향해 몸을 돌리던 기억까지 태워 버리지는 못했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 기록은 재시작의 책에 가깝다. 성전은 불탔지만, 성전이 가리키던 방향까지 타 버린 것은 아니다. 집은 무너질 수 있어도, 그 집을 향해 몸을 돌리던 기억까지 한순간에 사라지지는 않는다. 포로 이후의 사람들에게 성전은 건축 설계도이기 전에, 잃어버린 자신을 다시 찾아가게 하는 주소였을 것이다.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지, 무슨 이름으로 다시 모여야 하는지를 일러 주는 표지였다.
그래서 성전은 돌의 깊이를 넘어선다. 한 공동체의 영혼이 길을 잃지 않도록 안쪽에서 오래 깜빡이는 등불에 가깝다. 눈에 보이는 집이 무너진 뒤에야 사람은 비로소 눈에 보이지 않던 방향의 소중함을 배운다. 잃어버린 다음에야, 그 자리가 얼마나 오래 안쪽에서 우리를 붙들고 있었는지 깨닫는다.
이 대목에 이르면 이 기록은 이상하리만큼 오늘의 책이 된다. 지금도 사람들은 무너지지 않은 집 안에서 길을 잃고 살기 때문이다. 공동체는 갈라지고, 공적 언어는 거칠어지고, 사람들의 마음은 저마다 다른 제단 앞에 흩어진다.
어떤 이는 성공 앞에, 어떤 이는 불안 앞에, 어떤 이는 분노 앞에 오래 선다. 겉으로는 모두 분주하지만, 속에서는 같은 방향으로 뛰는 심장을 잃어버린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이 질문은 낡지 않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중심에 두고 사는가. 우리는 어디로 함께 올라가고 있는가.
집을 다시 짓는 기술은 많다. 그러나 한 시대의 심장을 다시 같은 방향으로 뛰게 하는 일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역대하는 바로 그 문제를 성전이라는 말 하나로 붙든다.
성전은 흩어진 마음이 다시 돌아갈 주소다. 그리고 그곳으로 사람을 이끄는 힘은 듣는 마음이다. 결국 사람은 잃어버리고 나서야 안다. 무엇이 오래 자기 안을 붙들고 있었는지. 무엇이 무너진 뒤에도 끝내 타 버리지 않는지. 오래전에 잃어버린 주소 하나가, 아직도 조용히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는 것을.
※ 최근의 역대하 연구는 이 책을 더 또렷하게 읽게 한다. 사라 야펫과 H. G. M. 윌리엄슨이 보여 주듯, 역대하는 더 이상 열왕기의 요약이 아니다. 포로 이후 공동체의 정체성을 성전을 중심으로 다시 해석한 신학적 역사다. 그래서 성전은 흩어진 백성을 하나의 기억과 예배로 다시 묶는 자리로 읽힌다. 중요한 것은 돌의 규모가 아니라, 공동체가 몸과 마음을 어디로 향하게 하느냐다. 이 문지방에 오래 서 있으면 사람은 성전보다 먼저 자기 삶을 돌아보게 된다. 나는 무엇 앞에 서는가. 내 마음은 어디로 흩어지고, 어디로 돌아오는가. 나를 붙드는 주소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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