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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재글 도망치는 예언자, 요나 (뉴스앤조이) 2025-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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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media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166회   작성일Date 25-04-17 11:11

    본문

    요나서로 묻는 17개의 질문
    도망자에게, 하나님이 묻고 계십니다.

    요나는 도망쳤고, 하나님은 추적하셨다.《요나서로 묻는 17개의 질문》은 요나에게 던진 하나님의 물음을 오늘의 우리 삶으로 다시 불러낸다. “왜 피하는가, 왜 자려느냐, 왜 성내는가…” 이 연재는 도망치는 나, 그리고 끝까지 따라오시는 하나님을 깊이 만나게 될 것이다. - 조원태 목사 -


    왜 피하는가? (요나 1:1–3)

     

    조원태 목샤 @ 미주뉴스앤조이.

    햇살이 따갑게 내리쬐는 욥바 항구. 한 남자가 숨 가쁘게 배에 올라탄다. 선창가에 길게 늘어선 밧줄들과 비릿한 내음 사이로, 그는 등을 돌린 채 서 있다. 이름은 요나. 이스라엘의 예언자, 하나님의 사람 요나였다. 지금 그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니느웨를 향한 길이 아니다. 그는 정반대 방향, 먼 다시스로 향하는 배편을 끊는다. 세상 끝이라 불릴 만큼 먼 항로, 폭풍이 빈발하는 위험한 바다길이다. 요나는 기꺼이 그것을 택했다. 차라리 폭풍을 맞더라도, 하나님의 얼굴은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요나 1:3).


    요나는 지금 도망자다.

    나도 도망자였다.

    나는 어린 시절 고아원에서 자랐다. 매일같이 맞았다. 때리는 손보다 더 무서운 건, 숨조차 삼켜버리는 그 공기였다. 말이 사라지고 숨도 납작해지던 시간들. 중학교 2학년 봄, 나는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 문을 넘는 순간, 나는 모든 걸 잃을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

    다른 도시에서 나는 붙잡혔다. 나를 붙든 건 누군가의 명령이 아니었다. 누구의 손도 아니었다. 그저 한 사람의 마음이었다. 그해 처음 교편을 잡은, 20대 중반의 여 선생님이었다. 구두는 벗겨졌고 스타킹은 찢어졌는데도, 그분은 한마디 말 없이 나를 따라 언덕을 올랐다. 그날, 그 벼랑 위에서 선생님은 내 손을 붙잡고 울었다. 아무도 나를 위해 울어주지 않던 세상에서, 처음으로 한 사람이 나를 위해 울어주었다.

    그날 이후, 나는 달라졌다. 더는 그렇게 숨고 싶지 않았다. 그 눈물 속에서 나는 처음으로 알았다. 붙잡히는 것이, 축복일 수 있다는 것을.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떠나는 사람. 도망치는 단 한 걸음에 그의 믿음과 인격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는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고 싶었다. 그는 무엇이 두려웠을까? 어떤 상처가 그를 이렇게까지 내몬 걸까?

    요나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해 학자들의 의견은 나뉜다. 요나를 ‘실패한 예언자’나 ‘풍자적 반영웅’으로 보는 해석이 있는가 하면, 그의 도피조차도 하나님의 구속사적 계획에 포함된 섭리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 설교는 그 긴장과 충돌 사이에서 길을 찾고자 한다.[1]

    니느웨—당시 아시리아 제국의 수도로 12만 명이 살던 세계 최대 도시. 오늘날의 대도시, 그 복잡하고 분주한 심장부처럼 느껴지는 곳이었다. 군사력과 번영의 정점에 선 니느웨는 잔혹함으로 악명이 높았다. 요나는 그 이름만으로도 몸서리쳤다. 어린 시절부터 들어온 이야기들—항복한 자들의 가죽을 산 채로 벗기고, 잘린 머리를 장대 끝에 매달던 아시리아의 만행은—니느웨라는 이름을 증오와 공포의 심연으로 새겨 놓았을 지 모른다. 그 기억들은 그의 가슴 어딘가에 응고되어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잔혹함은 지금도 대영박물관에 남아 있는 아시리아의 라기스 부조에 생생히 새겨져 있다. 항복한 자들의 가죽을 벗기고 목을 베는 모습은, 요나가 왜 그 이름만으로도 몸서리쳤는지를 설명해준다.[2]

     

    자비 앞에서 망설이는 사람

    요나는 왜 그렇게까지 피하려 한 것일까. 그가 등을 돌린 때는 다름 아닌, 하나님의 말씀이 막 임한 직후였다.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다.”(요나 1:2) 요나는 알고 있었다. 경고가 주어졌다는 것은 곧, 회개의 문이 열렸다는 뜻이었다. 자비가 시작될 수도 있다는 신호였다.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저토록 잔인한 원수들에게 왜 희망의 여지를 주시는 걸까. 심판이면 충분했다.[3]

    사실 요나는 애국적인 사람이었다. 동시대 선지자들인 아모스나 호세아가 이스라엘 왕의 불의를 신랄하게 비판할 때, 요나는 여로보암 2세의 강력한 군사 정책을 지지했던 예언자였다(열왕기하 14:25). 그런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라는 말씀은 조국을 등지고, 원수의 회복을 돕는 길로 보였을 것이다. 니느웨가 회개해 살아남으면, 이스라엘이 도리어 심판을 받을 수 있다는 두려움. 무엇보다 그는 그들이 용서받는 모습을 차마 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예언자의 자리에서 물러나는 한이 있더라도, 이 사명만큼은 외면하고 싶었을 것이다.[4]

    우리도 때로는 요나처럼 납득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도망치고 싶어질 때가 있다. 프랑스의 저명한 법철학자이자 신학자인 자끄 엘륄은 요나서가 단순한 도피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이 감당하기 어려운 하나님의 정의 앞에서 일어나는 정직한 저항의 서사라고 본다[5]. 그래서 그의 분석은, 도망자 요나를 통해 인간의 복합적 신앙 현실을 조명한다. 요나처럼 우리도 감당할 수 없는 부르심 앞에서 숨고 싶어진다. Mark Sayers는 이를 ‘위험을 피하는 문화에 잠식된 교회’라 부르며, 현대 신앙이 부르심보다 안전, 진실보다 무난함을 택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오늘날의 교회는 점점 요나를 닮아가고 있다.[6]

    오늘날의 신앙은 말보다 침묵을 선택하고, 충돌보다 물러섬을 택한다. 정의를 말하면 분열을 만든다 여겨지고, 사랑을 말하면 편향되었다는 손가락질이 돌아온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말하지 않는다. 침묵 속에서 믿음을 지킨다며 물러선다. “그러나 그 침묵은, 정의의 물음 앞에서 잠시 눈을 감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은 조용히 말씀하신다. 나는 듣노라. 억울한 자의 속삭임도, 말로 다 닿지 못한 눈물도, 기억한다. 사람의 귀엔 닿지 않아도, 하나님의 귀에는 머문다. 도피는 은혜의 길이 아니다. 회피는 믿음의 대답이 아니다. 이해되지 않는 명령은 받아들일 이유를 찾지 못하면 따를 의지도 잃게 만든다. 요나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정의 앞에서 침묵하거나 피하고 싶은 마음이 솟구친다.

    20세기 독일의 루터교 목사, 마르틴 뉘멜러는 히틀러 정권하에서 침묵했던 자신의 양심을 회개하며 이렇게 남겼다:

    처음, 그들이 사회주의자를 잡으러 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회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다음, 노동조합원을 잡으러 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다음, 유대인을 잡으러 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이 나를 잡으러 왔을 때, 나를 위해 말해 줄 사람은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아담과 하와 역시 이해되지 않는 하나님의 명령 앞에서 자신들의 판단을 따랐다. 불신은 작은 행동 하나로 나타났고, 그 손길이 에덴의 문을 닫게 했다. 요나도 마찬가지였다. 자기의 뜻과 하나님의 명령이 다를 때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고 도리어 명령이 없는 것처럼 여기고 도망치기에 이른다.

     

    추적하는 하나님

    그러나 역설적으로, 요나서의 이야기는 거기에서 시작된다. 요나가 그렇게 등을 돌리고 도망쳤는데도,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요나에게 말씀을 주셨고, 그 말씀이 요나의 삶에 붙들려 있었다고 성경은 전한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자유롭게 선택할 여지를 주신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그는 그 말씀의 추적을 받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요나가 반대편 끝으로 가는 배에 몸을 실었을 때에도 함께 있었다. 풍랑 속에서도, 물고기 뱃속에서도, 그 어둠의 끝에서도 요나를 놓지 않았다. 엘륄은 말한다. 요나가 거부한 것은 하나님 자체가 아니라, 그 하나님의 뜻이었다. 그의 도피는 불순종이 아닌, 이해할 수 없는 정의 앞에서의 정직한 저항이었다.[7]

    요나서의 진짜 주인공은 요나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선택한다고 믿는 인생의 길 위에서, 하나님은 우리보다 먼저 선택하고, 끝까지 따라오신다. 그 사랑은 포기하지 않는다. 꺾을지언정, 끝내 일으키신다. 때로는 조용히 꺾고, 다시 세우신다. 예수께서도 요나의 사흘을 ‘표적’이라 불렀다. 죽음과 부활을 품은, 삼일의 어둠.

    다윗은 노래했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시 23:6). 여기서 ‘따르리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라다프’(רדף), 영어로는 ‘chase after’. 사냥감을 끝까지 추적하는 맹수처럼, 하나님은 단 한 사람을 포기하지 않으신다. 도망치는 자의 발자국 끝에도, 숨고 싶은 뒷모습 뒤에도, 그분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조용히 따라붙는다. 부드럽고 단호하게, 마침내 사랑으로 닿는다. 도망은 끝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추적은 멈추지 않는다. 그 사랑은, 반드시 우리를 찾아온다.

    우리는 포기하지만, 하나님은 추적하고 인도하신다. 우리의 피하는 마음이 멈추는 자리마다 언제나 그분의 사랑이 먼저 가 계신다. 

     

    추적

                                                                                                                                    조원태 

    지상에서 가장 먼 바다로 발걸음을 내디딜 때 고요히 쏟아진 것은 당신의 깊은 침묵이었다


    흔들리는 수면 위 당신의 그림자 아득히 흔들릴 때 나는 끝내 달아났다. 차마 만질 수 없는 말씀 하나 심장 깊숙이 박힌 채


    살려고 더 멀리 가야 했다 내가 꿈꾸던 먼 곳은 당신과의 가장 가까운 거리였음을 알면서도 애써 믿으려 했다 그곳만은 당신 손이 닿지 않을 거라고


    욥바의 낡은 항구 소란스런 출항 속에서도 당신은 결코 나를 놓지 않으셨다


    당신은 바람을 던지셨다 고요하고도 격렬한 바람


    어두운 밤의 파도 위 당신의 목소리는 더욱 선명해지고 피할 수 없는 자리에서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당신의 숨결이 바람이라는 것을 멀리 달아날수록 더욱 가까워지는 당신 앞에서 두려움은 깊어만 갔다


    당신을 등지고 도망칠 때마다 마주한 것은 텅 빈 나 자신이었다. 가장 깊은 심연으로 던져졌을 때 비로소 나는 당신을 마주했다


    숨 잃고 길 잃고 더는 도망칠 곳 없는 자리에서 당신은 나를 꼭 안으셨다. 나의 평생을 당신이 결코 놓지 않으셨음을 이제야 깨달았다


    나의 도피는 당신의 추적이었고 당신의 추적은 나의 유일한 구원이었음을 이제야 비로소 알았다


    멀리, 그토록 멀리 가려 했던 내가 이제 당신의 품속 가장 깊은 심장 곁에 내 모든 것을 내려놓는다

    ※ 이 글의 시 「추적」은 저자의 자작시입니다.

    ………………………..

    [1] Bruce Vawter, Phyllis Trible, James Limburg, Leslie Allen 등의 주요 학자들이 요나서를 실패한 예언자 또는 구속사적 예언자로 보는 양 축의 해석을 대표한다.

    [2] 대영박물관, ‘라기스 공성전 부조’ (British Museum, Lachish Reliefs). 

    [3] 팀 켈러, 『방탕한 선지자』, 두란노, 2019, p. 25.

    [4] Phyllis Trible, 『Rhetorical Criticism and the Book of Jonah』, Fortress Press, 1994, p. 78.

    [5] 자끄 엘륄, 『요나: 심판과 구원』(Jonah: The Judgment of God), IVP, 1996, pp. 21–27.

    [6] Mark Sayers, Disappearing Church: From Cultural Relevance to Gospel Resilience (Chicago: Moody Publishers, 2016), pp. 45–51. 

    [7] 자끄 엘륄, 『요나: 심판과 구원』, IVP, 1996, p. 25. 

    조원태 목사 / <뉴욕우리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