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글 조원태목사의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 거룩, 주홍의 도시를 깨우는 흰빛 (뉴스앤조이) 2026-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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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 주홍의 도시를 깨우는 흰빛
조원태목사의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
이번에는 성서 66권 각 책의 서문(Threshold, 문지방 텍스트)을 따라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새로운 연재『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로 다시 시작합니다.
이 시리즈는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라는 주제로 출발합니다. 특정 책의 프롤로그 분석을 넘어, 성경 전체의 첫 문장을 따라 걸어가는 실험적 글쓰기로서 목회와 문학, 신학을 잇는 연재가 될 것입니다.
연재의 서막을 여는 글은 프롤로그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소개되며, 이후 매주 성경의 서로 다른 현관을 열어갈 예정입니다.
이 연재가 독자들의 시야를 넓히고 성서를 다시 ‘시작의 자리’에서 읽게 하는 영적 초대가 되리라 믿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성경의 전체적인 가르침이 다시금 생생하게 느껴지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 편집자 주 -
이사야 1:1–18
1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본 계시라 4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17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그 아침, 예루살렘은 아직 무너지지 않았기 때문에 더 위태로웠다. 성전 뜰에는 제물의 피가 마르지 않았고, 밤새 꺼지지 않은 제단의 불은 낮은 숨처럼 붉은 연기를 올려 보냈다. 장작은 탁탁 갈라지고, 짐승의 울음은 새벽 공기를 찢었으며, 제사장의 짧은 지시는 차가운 돌바닥 위에 떨어졌다.
모든 것이 제자리처럼 보였다. 바로 그것이 두려웠다. 겉으로 보면 유다는 아직 나라였고, 예루살렘은 아직 거룩한 도시였다.
그러나 이사야의 눈에는 다른 것이 보였다. 그는 무너진 성벽보다 먼저 무너진 양심을 보았고, 성전의 연기 아래 묻힌 울음을 들었다. 제물은 제단 위에 놓였지만, 정의는 성문 밖으로 밀려나 있었다. 도시는 서 있었으나, 하나님 앞에서 이미 기울어져 있었다.
이사야서는 폐허의 잿더미가 아니라, 모든 것이 정상처럼 보이던 아침에서 시작한다. 그래서 더 두렵다. 무너진 뒤에는 누구나 무너짐을 안다. 그러나 무너지기 전에는 잘 모른다. 예배가 계속되고, 제도가 작동하고, 도시는 빛나는데도 한 공동체의 영혼은 이미 하나님에게서 멀어질 수 있다.
이사야 1장은 단순한 첫머리가 아니다. 심판의 쓴맛과 위로의 숨결, 제국의 그늘과 새 창조의 빛이 이 문지방 안에 함께 접혀 있다.
이사야서는 66장으로 이루어져 있고,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앞의 39장과 뒤의 27장을 구약 39권과 신약 27권에 빗대어 읽기도 했다. 마치 성경 전체의 호흡이 이 한 권 안에 압축된 듯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숫자의 대응이 아니라 방향이다. 이사야서는 거룩하신 하나님이 주홍의 역사를 흰빛의 새 창조로 이끌어 가시는 책이다.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본 계시라”(사 1:1). 이 문장은 책 전체의 문패다. 이사야서의 히브리어 첫 단어는 “하존”이다. ‘환상’, ‘계시’, 곧 ‘본 것’이라는 뜻이다. 이사야는 단지 들은 사람이 아니다. 그는 왕들의 옷자락이 끌리는 궁정 바닥을 보았고, 국경 너머에서 밀려오는 제국의 검은 먼지를 보았고, 성전 위로 올라가는 연기와 그 아래 묻힌 울음을 보았다. 무엇보다 그 모든 소리와 상처 너머에 계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보았다. 이사야서는 그가 본 것에서 시작된다.
이사야서는 상처 입은 사랑의 법정으로 문을 연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말씀하신다.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사 1:2). 이 말은 차가운 고발이 아니라, 등을 돌린 자녀를 향한 아버지의 떨리는 탄식이다.
그래서 이 책의 거룩은 성전 안의 엄숙한 분위기가 아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이신 무게이며, 제단의 재 냄새와 거리의 먼지, 고아의 젖은 뺨과 과부의 갈라진 목소리를 외면하지 않는 사랑이다. 거룩은 불의한 예배의 쓴맛을 견디지 못하고, 주홍처럼 밴 죄 위에 흰빛을 내리시는 하나님의 칼날이면서 품이다.
하늘의 법정
이 책은 하늘과 땅이 증인석에 서는 법정으로 문을 연다. 재판장은 하나님이고, 피고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사 1:2). 그 음성이 울리자 앗수르의 군홧소리와 왕궁의 은밀한 계산, 성전 뜰의 피 냄새와 향 냄새, 빼앗긴 밭의 마른 흙, 재판정 밖으로 밀려난 과부의 떨리는 숨이 한꺼번에 법정 안으로 들어온다
하늘과 땅은 들었고, 흙은 기억했다. 권력은 기록을 고칠 수 있어도 발자국까지 지울 수 없고, 예배는 향기를 피울 수 있어도 손에 묻은 피까지 감출 수 없다. 한 공동체의 배반은 사람의 삶에 쓴맛을 남기고, 땅의 질서까지 흔든다.
이사야의 첫 고발은 예배의 결핍이 아니었다. 제사는 드려졌고, 절기는 지켜졌으며, 기도 소리는 성전 안을 가득 메웠다. 그러나 향 냄새가 번지는 동안 성문 밖에서는 약한 이들의 신음이 묻혔다. 하나님을 부르는 입술과 사람을 짓밟는 손이 한 몸 안에 있었다. 예배는 계속되었지만, 정의는 회복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사야의 말은 곧장 거리로 내려간다.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사 1:17). 거룩은 빼앗긴 밭의 마른 흙을 만지고, 과부의 갈라진 목소리를 들으며, 고아의 젖은 뺨 곁에 머무는 일이다. 이사야가 보는 죄는 마음속의 희미한 얼룩이 아니라, 공동체의 살갗 깊이 밴 상처다.
하나님을 버린다는 것은 예배당을 떠나는 일만을 뜻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말하면서도 그분이 돌보시는 사람의 신음에 귀를 닫을 때, 우리는 이미 멀리 물러난다. 소와 나귀의 비유가 아픈 까닭이 여기에 있다. 짐승도 구유의 냄새를 맡고 주인의 발소리를 알아듣는데, 하나님의 백성은 알지 못한다. 이 무지는 지식의 부족이 아니라 관계의 단절이다(사 1:3).
오늘의 도시도 다르지 않다. 전쟁은 손바닥 위의 화면을 스쳐 지나가고, 국경의 사람들은 숫자가 되며, 가난은 통계로 굳는다. 알림음은 쉴 새 없이 울리지만, 한 사람의 울음 앞에 오래 머무는 귀는 드물다. 우리는 더 많이 보면서도 더 적게 아파하고, 더 빨리 들으면서도 더 쉽게 잊는다.
그래서 이사야 1장을 읽는다는 것은 오래된 예언서를 공부하는 일이 아니다. 우리가 사는 도시의 법정에 서는 일이다. 무엇을 아는지가 아니라 무엇을 모른 척하는지, 내 예배가 누구의 울음 앞에서 멈추는지, 내 신앙이 약한 이의 이름을 기억하는지 묻는 일이다. 하나님의 거룩은 종교성을 칭찬하는 말이 아니라, 우리의 세계를 다시 재는 기준이다.
거룩의 중력
이사야서에는 하나님을 부르는 독특한 이름이 반복된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사 1:4; 5:19, 24; 10:20; 12:6; 30:11-12, 15; 41:14, 16, 20; 43:3, 14; 54:5; 60:9, 14). 이 이름은 이사야 신학의 심장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가까이 계시지만 인간의 뜻에 갇히지 않으시고, 사랑하시지만 불의를 묵인하지 않으신다.
이 이름은 이사야서 전체를 붙드는 중력이다. 이사야는 이미 첫 장에서 그 핵심을 드러낸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사 1:4). 죄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일만이 아니다. 그분의 무게를 가볍게 여기고, 그분의 끌어당김에서 서서히 멀어지는 일이다.
거룩은 하나님이 인간과 다르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 다름은 세상을 밀어내는 거리가 아니라, 흩어진 세계를 제자리로 부르는 힘이다. 제국은 땅을 움켜쥐고, 권력은 두려움을 키우며, 욕망은 마음을 흩뜨리지만, 이사야는 그 모든 중심 너머에서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본다.
거룩은 하나님의 중력이다. 무중력의 공포는 마음대로 떠다니는 자유가 아니라, 붙들어 줄 중심을 잃은 불안이다. 발이 땅에 닿아 넘어지는 순간조차 감사가 되는 것은, 넘어질 땅이 있고 다시 일어설 중심이 있기 때문이다.
유다의 위기는 강대국들 사이에서 흔들린 정치적 불안만이 아니었다. 하나님이라는 중력을 잃어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는 영혼의 궤도 이탈이었다. 앗수르의 그림자가 하늘을 덮고 북이스라엘이 무너지는 동안, 왕들은 동맹을 계산하고 사람들은 국경 너머의 말발굽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이사야가 본 더 깊은 위기는 제국이 아니라 중심을 잃은 신앙이었다. 그들은 여호와를 버리고, 거룩하신 이를 가볍게 여기며, 점점 멀어졌다. 죄는 한순간의 폭발보다 거룩의 중력에서 서서히 벗어나는 긴 이탈에 가깝다.
이 책의 전체는 거룩하신 하나님이 흩어진 백성을 다시 끌어당기시는 길을 따라간다. 6장의 숯불은 부정한 입술을 정결하게 하고, 40장의 음성은 지친 백성을 위로하며, 53장의 종은 백성의 상처를 짊어지고, 65장의 새 하늘과 새 땅은 창조 전체의 회복을 연다. 이 모든 길을 붙드는 힘이 거룩이다. 거룩은 죄를 태우는 불이면서, 무너진 백성을 다시 부르는 숨결이다.
오늘 우리를 끌어당기는 힘도 많다. 성공과 불안, 인정과 분노, 정치적 진영과 종교적 체면이 우리 삶의 궤도를 만든다. 그러나 그것들이 우리를 고아와 과부, 학대받는 이들의 자리로 이끌지 않는다면 거룩의 중력이라 할 수 없다. 하나님께 가까워질수록 우리는 사람의 고통에도 가까워져야 한다. 거룩은 깨끗한 방으로 숨는 일이 아니라, 상처 입은 거리에서 정의를 배우는 일이다.
거룩은 아름답지만 안전하지 않다. 우리가 붙든 거짓 중심을 흔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그 흔들림이 우리를 살린다. 이사야의 문지방은 묻는다. 지금 무엇이 너를 끌어당기고 있으며, 그 힘은 너를 어디로 데려가고 있는가?
주홍 위의 첫눈
이사야 1장의 놀라운 장면은 고발 뒤에 온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자녀의 반역과 예배의 위선을 드러내신다. 그러나 판결이 내려올 자리에서 뜻밖의 음성이 들린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사 1:18) 추방이 아니라 초대다.
이 말은 이사야서의 깊은 신비다. 거룩하신 분이 인간을 법정으로 부르시지만, 그 법정은 단순한 처벌의 자리가 아니다. 하나님은 죄를 드러내시되 대화를 닫지 않으신다. 주홍 같고 진홍같이 붉은 죄를 숨기지 않으시지만, 거기서 끝내지도 않으신다. 그 붉은 얼룩 위에 눈과 같은 흰빛, 양털 같은 새로움을 약속하신다.
주홍은 쉽게 빠지지 않는 색이다. 한 번 천에 배면 빨아도 흔적이 남듯, 폭력과 거짓과 가난이 남긴 상처도 공동체의 살갗에 오래 스민다. 이사야는 죄를 가볍게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털어 낼 먼지가 아니라, 역사 깊숙이 밴 얼룩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주홍 위에 눈을 약속하신다.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사 1:18). 붉은 천 위로 첫눈이 내리듯, 아무도 지울 수 없는 얼룩 위로 하나님의 흰빛이 내려온다. 이 한 문장 안에 책 전체의 길이 접혀 있다. 심판은 위로를 향하고, 포로의 밤은 귀환의 아침으로 열리며, 무너진 시온은 새 예루살렘의 빛을 향해 나아간다.
이사야의 희망은 큰 무리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딸 시온은 포도원의 망대 같이, 참외밭의 원두막 같이, 에워싸인 성읍 같이 겨우 남았도다”(사 1:8). 모든 것이 무너진 자리에도 하나님은 남은 자를 남기신다.
그 작은 생존의 불씨는 한 사람에게로 모인다. 임마누엘의 징조, 어둠 속에 비치는 큰 빛, 이새의 줄기에서 돋는 한 싹, 고난 받는 종의 상처가 그 길을 연다. 이사야서는 겨우 남은 자들을 끝까지 끌어당겨, 마침내 메시아의 희망 앞에 세운다.
이사야는 절망을 낭만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왕들은 실패하고, 제국은 교만하며, 백성은 완고하다. 그러나 심판이 마지막 말은 아니다. 광야에는 길이 나고, 사막에는 강이 흐르며, 칼은 보습이 되고, 시온은 다시 빛을 입는다. 이사야의 거룩은 차가운 완전성이 아니라, 주홍을 보면서도 회복을 포기하지 않는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이다.
이 점에서 이사야의 서문은 책 전체의 복선이다. 처음의 법정은 마지막의 새 창조를 품고 있다. 이 책 전체를 다시 읽는다는 것은 그 길을 따라가는 일이다. 주홍에서 흰빛으로, 법정에서 위로로, 무너진 도시에서 새 창조로 나아가는 일이다.
이사야는 오늘 우리에게도 묻는다. 무엇이 우리의 주홍인가? 증오, 배제, 거짓, 무감각도 공동체의 살갗에 깊이 밴 색이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그 자리에서 말씀하신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사 1:18).
흰빛은 값싼 망각이 아니다.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사 1:17). 고아의 억울함을 듣고, 과부를 변호하며, 학대받는 이 곁에 머무는 자리에서 회복은 시작된다. 흰빛은 죄가 없었다는 선언이 아니라, 죄가 마지막 색이 되지 못한다는 약속이다.
우리 시대는 주홍을 이미지와 속도로 덮는 데 익숙하다. 그러나 이사야는 숨기지 말고 드러내라 한다. 하나님 앞에서 인정하고, 약한 이들의 자리에서 정의를 다시 배우는 것, 그것이 흰빛으로 가는 길이다.
이사야서는 그 배움의 긴 학교다. 숯불로 입술을 태우고, 임마누엘의 징조를 보여 주며, 큰 빛과 평화의 가지, 고난 받는 종과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우리를 이끈다. 그 문은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으로 열린다. 하나님은 무정한 재판관이 아니라,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거룩한 사랑이다.
이 책을 다시 읽는다는 것은 예언의 암호를 푸는 일이 아니다. 주홍을 주홍이라 말하는 용기와, 그것이 마지막이 아니라고 믿는 희망을 배우는 일이다. 이사야의 문은 무겁지만 닫혀 있지 않다. 법정의 끝에서 하나님은 아직 말씀하신다.
오라. 돌아오라.주홍보다 깊은 흰빛이 있다.
※ 이사야서 해석은 오랫동안 한 예언자의 책으로 읽는 전통과, 본문을 여러 시대의 역사적 층위로 나누어 읽는 연구 사이에서 전개되어 왔다. 오늘의 연구는 둘 중 하나만을 택하기보다, 앗수르·바벨론·페르시아 시대를 지나며 형성된 본문이 어떻게 한 권의 책으로 신학적 통일성을 이루는지 함께 살핀다. 특히 시온과 남은 자, 거룩과 정의, 고난 받는 종과 새 창조가 책 전체에서 서로를 비추는 방식에 주목한다. 그런 점에서 이사야 1장은 책 전체의 입구이자 축소판이다. 여기서 예배는 정의 앞에서 시험받고, 주홍의 죄는 흰빛의 약속 앞에 놓이며, 거룩하신 하나님은 심판을 넘어 회복으로 독자를 부르신다.
조원태 목사 / <뉴욕우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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