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글 조원태 목사의 '요나서로 묻는 17개 질문' 민족이 신앙보다 앞설 때 (뉴스앤조이) 202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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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서로 묻는 17개의 질문
가장 먼저 말한 것
왜 그것이 우선인가? (요나 1:7-9)

바다는 여전히 흔들리고 있었지만, 그 순간은 모든 것이 멈춘 듯했다. 제비가 던져지는 순간, 시간은 멈춘 듯했다. 바다는 여전히 요나를 향해 흔들리고 있었고, 요나의 중심도 함께 흔들렸다. 말이 없던 자, 끝내 침묵으로 피하던 자. 그는 입을 열었고, 가장 먼저 튀어나온 말은 ‘하나님’이 아니었다.
“나는 히브리 사람입니다. (요나 1:9)”
그의 첫마디였다. 정체성이 가장 깊은 곳에서 반사처럼 튀어나온 말. 요나는 민족을, 자신이 속한 집단을, 신앙보다 먼저 꺼냈다. 입을 열지 않던 자가 첫 문장에 무엇을 가장 먼저 말하는가—그것이 그 사람의 우선순위다.
요나는 선원들의 질문 앞에서 세 가지를 고백해야 했다: 그의 사명, 그가 온 곳, 그가 속한 민족 (요나 1:8). 그러나 요나는 순서를 뒤집어 가장 먼저 민족을 말했다. 정체성과 충성, 그리고 그 충성의 질서가 드러났다.
요나에게 신앙은 중요했다. 그러나 ‘히브리인’이라는 민족적 자긍심이 신앙보다 먼저 나왔다. 하나님조차 그 정체성을 넘지 못했다. 하나님이 명하신 니느웨로의 부르심은 요나의 민족적 경계에 부딪혀 거부당했다 (요나 1:3). 그의 신앙은 민족을 위한 수단이었고, 하나님조차 그 수단에 맞춰야만 했다.
요나가 사랑했던 하나님은, 민족주의라는 유리창 너머에 있었다. 자비는 그 필터를 통과하며 왜곡되었고, 신앙은 은밀히 울타리를 만들었다. 요나는 하나님을 믿었지만, 그 믿음은 이미 좁은 땅의 경계 안에서 길을 잃고 있었다.[1]
우리는 누구를 먼저 말하는가
올림픽 중계 화면 속에 한국 선수가 등장했다. 메달 색깔보다 더 찡한 건, 그 순간을 위해 흘렸을 땀이었다. 가족들과 함께 앉아 경기를 보던 저녁, 나는 물었다. “한국과 미국이 붙으면 누굴 응원할래?”
막내가 두 손을 번쩍 들며 외쳤다. “오 필승 차이나!” 잠시의 정적 후, 셋째가 곧바로 맞받았다. “파이팅 인디아!”
모두가 웃음을 참지 못했고, 그 와중에 막내가 진지하게 말했다. “그래도… 난 한국이야.”
그 짧은 장난 속에 정체성의 무의식이 비쳤다. “아메리칸 코리안”이라기보다 “코리안 아메리칸”이라고 말할 때, 어순 하나에 자기 위치와 우선이 담긴다.
요나 역시 질문을 받았다. “네 생업이 무엇이냐, 어디서 왔느냐, 어느 민족에 속하느냐.” (요나 1:8) 그런데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히브리 사람입니다.” (요나 1:9)
요나는 먼저 말하지 않았다. 부르심에도, 외침에도, 그는 침묵했다. 그러나 제비가 그를 가리키고, 모든 시선이 닿는 자리에서, 그는 입을 열었다.
“나는 히브리 사람입니다.”
그 말은 물결 위에 가볍게 놓였지만, 그 안에는 무거운 것이 담겨 있었다. 묻는 이들은 사명과 고향을 물었지만, 요나는 가장 마지막의 것을 가장 먼저 꺼냈다. 하나님도, 땅도 아닌 민족이었다. 말보다 먼저 드러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중심이다.
요나의 중심에는 하나님보다 먼저 민족이 자리하고 있었다. 신앙은 있었으나, 그 신앙은 이미 경계 안에서 작동하고 있었다. 고백은 짧았고, 그 짧은 말은 울타리처럼 높았다.
잭 M. 새슨은 말한다. 고대에서 “히브리인”이라는 표현은 외부인에게 자신을 설명할 때 사용하는 정체성의 언어였다. 요나는 신앙보다 민족을 먼저 드러냈다. 그 말은 울타리였고, 하나님 앞에서조차 지워지지 않았다.[2]
요나는 멀리 있지 않다. 우리의 말과 기도, 그리고 침묵 속에 있다. 이름보다 먼저 드러나는 충성, 자부심이라는 은밀한 신을 향한 숨은 예배.
하나님의 자비가 니느웨를 향할 때, 요나의 중심은 흔들렸다. 그가 가장 먼저 사랑했던 경계가 조용히 넘어지고 있었다.
미로슬라브 볼프는 말한다. “어떤 집단에 속한 것이 하나님께 속한 것보다 더 근본적인 것이 될 때, 그 집단은 곧 거짓 신이 된다.”[3] 요나는 하나님보다 민족에 먼저 속했고, 그 고백은 오늘 우리를 비춘다.
또한 잭 M. 새슨은 이렇게 말한다. “요나의 진술은 실제로 단 두 단어—‘나는 히브리인입니다’—로 구성되어 있으며, 요나가 그 순간에 말하고자 한 모든 것이었다.”[4]
요나는 그 짧은 문장에서 모든 것을 말했다. 신앙보다 먼저 입 밖으로 튀어나온 자기 규정, 하나님보다 앞세운 민족의 이름. 말은 짧았지만, 그 말은 벽이었다. 진짜 부름은, 그 벽을 넘는 곳에서 시작된다.
플로리다에서 목회하던 시절이었다. 탬파의 힐스보로 강은 가만히 흐르지만, 물가 수풀 너머로 악어들이 종종 몸을 드러내곤 했다. 그날, 가족과 귀한 손님 목사님 부부와 함께 두 대의 카누에 나뉘어 탔다.
나는 어린 아들들과 함께, 아내는 손님과 한 배에 있었다. 물빛은 평온했고, 강은 한낮의 습기를 머금은 채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아무도, 그 평화가 곧 깨어질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다.

하늘이 터졌다. 빗물은 강을 삼키듯 부풀었고, 카누는 나무에 부딪혀 뒤집혔다. 그 아래, 목사님의 아내가 보이지 않았다. 어둠과 물속의 침묵 속에서, 누구도 바로 확인할 수 없었다.
모두의 숨이 멎었다. 한 사람은 물 아래에 잠긴 채 떠오르지 않았다. 강물은 쉼 없이 흔들렸고, 그 속에서 누구에게 무엇이 가장 소중한지—그것이 조용히 드러났다.
아내는 주저하지 않았다. 그때 내 쪽 카누에서 어린 아들들이 울음을 터뜨렸다. 엄마가 걱정된 것인지, 공포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울음은 폭우를 뚫고 터져 나왔고, 떨리는 공기를 타고 몸으로 번졌다. 그러나 아내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물속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단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다.
아내는 아이들의 울음에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맨발로, 악어가 도사릴지도 모르는 강물 속으로 내디뎠다. 그리고 그다음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비에 젖은 두 손으로 아내는 뒤집힌 카누를 들어올렸다. 물살을 가르듯, 물에 잠긴 카누가 흔들리며 들려 올랐고, 그 안에서 목사님의 아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순간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시간이었다. 아내는 나중에 조용히 말했다. "그땐, 살려야겠다는 생각뿐이었어."
그때, 아내의 우선순위는 말이 아닌 몸으로 드러났다. 본능은 위기 앞에서 가장 먼저 꺼내는 진실이다. 요나는 민족을 먼저 말했고, 아내는 말보다 앞서 물속을 향해 걸어갔다. 말이 아니라 선택이었고, 침묵이 아니라 중심이 응답한 일이었다. 무엇을 가장 먼저 꺼내는가—그것이 사람의 가장 깊은 자리다.
물속에서 드러난 우선
무엇을 해야 할까. 제비는 요나를 뽑았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풍랑을 멈추기 위한 선택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그 제비 안에 한 사람의 질서를 담아 돌리셨다. 우선순위. 사랑의 무게. 말보다 깊은 자리.
그 제비는 오늘도 돌고 있다. 요나서의 이야기는 먼 바다의 사건이 아니라, 오늘 이 자리에서 나를 겨누는 하나님의 룰렛이다.
반드시 거센 풍랑까지 가야 할까. 아니, 말씀 앞에서 멈추면 된다. 내가 하나님보다 먼저 앞세운 것들이 무엇인지, 조용히 떠올려 보면 된다. 그리고 그것들을 놓으면, 그 자리에 하나님이 오신다.
요나는 마지막에 이렇게 말했다. “나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입니다.” (요나 1:9) 우리는 이 고백을 오늘 맨 앞에 둘 수 있다. 바다도, 육지도, 하늘도, 우리를 위협하던 것들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의 창조주를 가장 먼저 경외하는 것. 그것이 이 이야기의 끝이고, 우리 신앙의 시작이다.
바다는 신이었고, 하늘은 신이었고, 땅도 신이던 시대였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지으신 분이 계시다는 것을 기억하는 순간, 모든 신들은 입을 다문다. 하나님을 먼저 두는 것이, 다시 숨을 쉬게 한다.
사람은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것을 위해 움직인다. 무엇이 우리를 일으켜 세우는가. 무엇이 우리를 흥분 시키고, 분노하게 하고, 가만히 있을 수 없게 하는가.
요나에게는 그것이 민족이었다. 그는 그 안에서 불타올랐고, 그 틀 안에서 하나님을 믿었다. 니느웨를 향한 자비보다, 이스라엘의 자존이 먼저였다. 그의 신앙은 경계 안에 있었고, 하나님조차 그 선을 넘지 못했다.
우상은 대개 멀리 있지 않다. 그것은 언제나 가장 가까운 것, 가장 익숙한 것, 가장 선해 보이는 얼굴로 다가온다. 충성도, 헌신도, 정의도—하나님보다 먼저일 때, 그것은 이름 바꾼 우상이다. 요나는 누구보다 열심이었지만, 그 열심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우상의 그림자 속에서 자란 것이었다.
지금도 하나님은 제비를 돌리고 계신다. 내 안의 우선순위를 알아채시기 위해. 풍랑이 아니라, 더 깊은 데, 말이 닿지 않는 그 내면의 경계를 흔들기 위해.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린다. “누가 이 재앙의 원인인가.” “제비를 뽑자.”
그들의 손에서 작은 나무 조각이 던져진다. 인간의 불확실함. 그 틈으로 하나님이 들어오신다.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모든 결정은 여호와께로부터.” (잠언 16:33)
제비는 우연처럼 보였지만, 하나님의 질문이었다. 풍랑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무너진 중심을 꿰뚫는 것이었다. 바다가 흔든 것이 아니었다. 요나 안에 감춰진 것, 하나님보다 앞선 것을 드러내기 위한 선택이었다.
그는 뽑혔다. 바다를 흔든 자가 아니라, 하나님보다 민족을 먼저 품은 사람으로. 하나님은 그 사실을 조용히 ‘제비’로 말하셨다. 그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무심한 손끝에서 튕겨 나간 조각은 이름을 가리켰고, 그 이름 아래 감춰져 있던 우상이 얼굴을 내밀었다.
하나님은 요나를 벌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침묵 속에서 제비 하나를 허락하셨다. 모든 것이 우연처럼 보였지만, 그 속에는 방향이 있었다. 제비는 그를 가리켰고, 그 지목은 드러냄이었다. 하나님보다 먼저 품은 것이 무엇인지,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가르쳐주는 손짓이었다.
우상은 언제나 가까운 곳에 있다. 너무 익숙해서 의심하지 않게 되는 것들. 충성이라는 이름으로, 신앙이라는 옷을 입고, 그럴듯한 말들 뒤에 숨은 것들. 제비는 그것을 벗기기 위한 하나님의 손짓이었다.
그 제비는 오늘도 돌고 있다. 설교 한가운데, 내 양심의 물비늘 위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어느 밤의 침묵 속에서. 하나님은 묻고 계신다.
“너는 무엇을 가장 먼저 말하는가?”
아주 오래전 바다 위에서 던져진 질문이, 오늘 내 마음 안으로 다시 가라앉고 있다.
말보다 먼저
제비는 알고 있었다
내 안에서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을
.....................................................
각주)[1] Timothy Keller, The Prodigal Prophet: Jonah and the Mystery of God’s Mercy (New York: Viking, 2018), p. 137.
[2] Jack M. Sasson, Jonah: A New Translation with Introduction, Commentary, and Interpretation (The Anchor Yale Bible;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90), pp. 115–119.
[3] Miroslav Volf, Exclusion and Embrace: A Theological Exploration of Identity, Otherness, and Reconciliation (Nashville: Abingdon Press, 1996), p. 28.
[4] Jack M. Sasson, Jonah: A New Translation with Introduction, Commentary, and Interpretation (The Anchor Yale Bible;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90), p. 115.
조원태 목사 / <뉴욕우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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