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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재글 조원태 목사의 '요나서로 묻는 17개 질문' 바람 없는 고요의 시간 (뉴스앤조이) 2025-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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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112회   작성일Date 25-04-29 08:47

    본문

    요나서로 묻는 17개의 질문
    잠든 신자와 깨어나는 세계를 향한 질문

    요나는 도망쳤고, 하나님은 추적하셨다.《요나서로 묻는 17개의 질문》은 요나에게 던진 하나님의 물음을 오늘의 우리 삶으로 다시 불러낸다. “왜 피하는가, 왜 자려느냐, 왜 성내는가…” 이 연재는 도망치는 나, 그리고 끝까지 따라오시는 하나님을 깊이 만나게 될 것이다. - 조원태 목사 -

      왜 자려느냐? (요나 1:5-6) 

    그날 바다는 조용했다. 해면 아래로 묻힌 오래된 고백처럼, 파도도 바람도, 죄의식도 숨을 죽이고 있었다. 배 밑칸, 그 빛조차 닿지 않는 저층의 어둠. "요나는 배 밑층으로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든지라"(요나 1:5). 어둠을 향해 내려가는 그의 걸음. 닫힌 몸. 멈춘 기도는 닫힌 문이었다. 안으로 침잠하는, 다시는 열릴 수 없을 것 같은 마음의 입구. 그는 깊이 잠들었다. 몸도, 말도, 기도도 모두 닫힌 채.

    히브리어로 '잠들다'는 '야르담(יָרַדָם)'—의식의 문이 닫힌 상태, 살아 있으나 살아 있지 않은 시간. 요나는 스스로를 묻었다. 기억에서 밀려난 이름처럼, 존재를 감추었다. 누구의 손길도 닿지 않을 곳, 그가 원하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그는 잠들었다. 자는 자가 아니라, 잠들기로 선택한 자였다. 세상은 무너지고 있었고, 그는 등을 돌리고 누웠다. 잠은 피난이었다. 말 없는 항변이었고, 끝내 하나님에게 등을 보인 회피였다. 고요는 맹목이 되었고, 그 맹목은 미세하게 스스로를 삼키고 있었다.

    나에게도 그런 맹목의 시간이 있었다. 어린시절, 나는 가장 무서운 것이 문이었다. 고아원에 들어가는 내 키보다 훨씬 커다란, 두꺼운 나무문이었다. 검붉은 가로살이 음표처럼 박힌, 오래된 대문. 삐걱이는 소리마저 감정이 없는 문이었다. 그 문을 넘어가면 세상은 차가웠고, 바람은 줄어들었고, 시간은 느려졌다. 

    어린시절을 보낸 고아원 '정읍애육원' 문(필자의 방은 사진 정면의 왼쪽 방, 5호실)어린시절을 보낸 고아원 '정읍애육원' 문(필자의 방은 사진 정면의 왼쪽 방, 5호실)

    고아원 아이들은 그곳을 ‘공낙원’이라 불렀다. 공포의 낙원, 얼어붙은 정적 속에 웃음 대신 침묵이 깃든 이름이었다. 문 앞에 서면 어깨는 굳고, 발끝은 멈췄다. 나는 입을 다물었고, 심장은 작게 떨렸다. 돌아가는 길은 언제나 멀었다. 일부러 돌아갔고, 일부러 멀어졌다. 그 문을 하루라도 늦게 넘고 싶어서였다. 그 문 앞에서는 나라는 아이가 더 작아졌다.

    그 시절, 고아원의 문은 내게 하나의 풍랑이었다. 손잡이에 손을 얹기도 전에 심장이 작아졌고, 그 앞에 서면 숨이 멎었다. 뼛속까지 파고드는 냉기, 누군가 날 밀어 넣기라도 하면 그대로 사라질 것 같았다. 그 문은 나를 깊이 끌어내렸다. 아무 기도도 들리지 않는 저층, 감정이 동결된 방 아래 어둠.

     

    그 문은 내 영혼을 잠들게 했다.

    소리를 삼키고, 마음을 감추게 만들었다. 어느 지하로, 어느 더 깊은 침묵의 굴로 자꾸만 밀려 내려가게 했다. 그 문은 요나의 배 밑칸이었다. 누구도 부르지 않았고, 나도 응답하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고요를 흉내냈고, 존재를 접었다. 스스로를 가장하며, 아무도 묻지 않기를 바랐다.

    요나에게 그 잠은 성소였다. 고아원 대문처럼, 마음을 닫고 세상을 차단한 채 스스로 세운, 조용한 피난처였다. 말 대신 침묵으로, 엎드림 대신 숨음으로, 그는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경계선을 그었다. 그곳에서 그는 피로와 두려움, 무력감이 축적된 침묵의 제단 위에서, 그는 들키지 않기를 바랐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아무도 다가오지 않기를.

    그러나 그 밤은 길었다. 잠은 얼음장이었고, 침묵은 얇게 금이 가 있었다. 깨어질 때를 기다리며, 조용히 떨고 있었다.

    요나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깊은 잠 아래, 말 없는 설득이 서서히 스며든다. 누구도 그를 부르지 않았지만, 침묵이 파도처럼 다가왔다. 그의 잠은 흔들렸고, 닫힌 고요는 금이 갔다. 말은 없었지만, 파도가 속삭이고 있었다. 오래된 설득이, 물 아래의 진동처럼 반복되며 그를 깨우고 있었다.

    성경은 같은 한 절 안에 두 세계를 나란히 놓는다. 한쪽은 잠으로 내려간 요나, 다른 쪽은 각자의 신을 부르며 살아내려는 선원들. "요나는 배 밑층으로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든지라"(요나 1:5). 그리고 곧이어, "각기 자기의 신을 부르며"(요나 1:5). 같은 폭풍 속, 누군가는 하나님을 알고도 침묵했고, 누군가는 신의 이름조차 모르면서도 울부짖었다.

    멈춘 자와 깨어 있는 자. 무감각한 신앙과 본능적 기도의 대비. 어쩌면 구원의 방향은 늘 익숙한 쪽이 아니라, 눈을 뜨고 울부짖는 그들 쪽에 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배 밑으로 내려가 자신을 닫는다. 의도된 무감각, 선택된 침묵. 한 사람은 하나님을 알고도 침묵했고,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을 몰라도 살기 위해 울었다. 같은 파도, 다른 응답. 이름조차 모르는 신에게 던져진 그들의 울음은, 하나님을 알면서도 잠든 요나보다 더 뜨거웠다.

    우리는 누구인가. 잠든 예언자인가, 이름 모를 절규의 선원인가. 누군가는 눈을 떴지만 다시 감는다. 감은 눈으로 도망치고, 감은 눈으로 외면한다. 그러나 또 다른 누군가는 눈을 뜬다. 감히 외면하지 못한 채 절박하게 살아간다. 요나의 잠결은 지금 이곳에 깔린 안개다. 한 줄의 성경, 한 겹의 잠. 그 속에 오늘이 숨어 있다.

     

    선장의 입에서 울린 쿰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일어나 네 하나님께 구하라!"(요나 1:6)

    고요를 찢듯, 목소리가 닫힌 시간을 흔들었다. 그것은 꾸짖음이 아니었다. 어디선가 떠오른 울음처럼, 낯선 입술에서 흘러나온 진동이었다. 요나는 눈을 떴다. 하나님이 아니었다. 이방 선장이었다. 요나가 속하지 않은 사람, 요나가 예상하지 못한 입술.

    말은 없었지만, 요나의 내면 어딘가가 금이 갔다. 얼어붙은 고요에 균열이 생기고, 침묵이 밀려와 그의 잠을 흔들었다. 낯선 외침이, 믿는 자의 침묵을 깨뜨렸다.

    그 외침은 요나의 귀에 남았다. 잠을 뚫고 들어온 낯선 진동. 히브리어로 "일어나라"(요나 1:6)는 말, 쿰(קוּם).[1] 하나님이 처음 그에게 속삭였던 단어였다(요나 1:2). 밤처럼 조용한 목소리로, 요나를 세우던 말. 그런데 지금, 그 단어를 이방 선장이 대신 말하고 있다. 아이러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요나의 바깥에서 다시 울린다. 부활을 닮은 언어, 죽은 자를 다시 세우는 숨. 그러나 이번엔 하나님이 아니었다. 외부였다. 선장이었다. 그의 무신론적 손끝에서 흘러나온 하나님의 단어. 이 어긋남은 기적이었다.

    어디서 깨어야 하는가. 누구에게서 깨어야 하는가. 때로 하나님은 말하지 않으신다. 대신 세상이 속삭인다. 부서진 벽의 틈에서, 갇힌 아이의 눈에서, 침묵으로 메운 도시의 폐허에서. 그곳에서 들려온다. 쿰(קוּם).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붙잡아낸 구약의 거장, 월터 브루그만은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은 교회의 천장 아래가 아니라, 눌린 숨결 속에 계신다고. 눈물은 하나님의 언어가 되고, 절규는 하나님의 호흡이 된다고.[2] 그는 세상의 비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을 깨우는 방식이야말로 역설적 소명이라 말하며, “그들은 우연히 그들을 깨운다”고 했다. 그들이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오히려 더 깨어 있기 때문이다.[3]

    교회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흔들리는 대지 아래 여전히 잠든 채인가. 아니면 그 목소리에, 마침내 눈을 뜨고 있는가. 교회는 아직 배 밑에 있다. 깊은 잠. 그러나 세상은 부르고 있다. 일어나라. 쿰(קוּם). 흔들림은 심판이 아니다. 그것은 초대다. 이 밤의 가장 깊은 틈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속삭임이다.

    무너질까 두려워했다

    요나는 두려워했다. 은혜가 닿는 순간, 자기가 지탱해온 세계가 무너질까 두려웠다. 은혜는 무너뜨린다. 신념을, 질서를, 내가 붙들고 있던 멈춘 듯한 정의감을. 용서는 칼보다 조용했고, 자비는 논리보다 먼저 움직였다. 요나는 알았다. 니느웨가 회개하는 순간, 그가 지탱해온 확신은 붕괴할 것을. 그래서 그는 깨어 있었지만, 끝내 눈을 감았다.

    은혜는 깊다. 무너지는 건 악이 아니라, 나다. 자존심, 복수심, 오래된 경계선들이 안에서부터 무너진다. 믿는다 말하면서도 용서하지 못하고,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벽을 세우는 우리. 요나는 그 안에 있다. 아니, 지금 내 안에 있다. 무너지길 거부하는 고집의 틈 속에 숨어 있다.

    당신은 어떤가. 침묵 뒤에 숨은 채, 누군가를 정죄하고 있지는 않은가. 용서라는 이름을 입에 담지 못한 채, 오래된 상처를 쥔 채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비가 나에게서 흘러나오는 것이 두렵지는 않은가. 그 두려움 아래, 오래된 고집 아래, 들키고 싶지 않은 내 마음 한 귀퉁이에—요나가 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나도 있다.

    교회도 다르지 않다. 정의가 불편할 때면 평화를 말하고, 물러선다. 예언보다 균형을 택하고, 진실보다 유지되는 구조를 더 소중히 여긴다. 우리는 요나가 된다. 신념이라는 담요 아래 깊이 잠든 자들. 눈은 떴지만, 기도하지 않는다. 빛을 말하지만, 어둠 속에 머문다. 요나의 두려움은, 곧 우리의 두려움이다.

     

    깨워진 교회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잠에서 깬 요나는 말이 없었다. 눈을 떴지만, 입은 닫혔고, 빛은 돌아왔지만, 마음은 여전히 어두웠다. 그는 그저 바라보고 있었다. 깨어난 듯 보였지만, 아직 도착하지 못한 사람처럼. 각성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고, 그는 그 시작 앞에 조용히 주저앉아 있었다.

    진짜 각성은 눈을 뜨는 일이다. 응시하게 하고, 기도를 낳고, 책임을 부른다. 하지만 요나는 그 경계에 서 있었다. 빛 앞에서 물러섰고, 고요 안에 스스로를 감췄다. 

    교회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무너진 이웃들 앞에서 앉아만 있지는 않은가. 지워지는 얼굴들, 사라지는 공동체들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요나는 멈춰 있었다. 뜻이 꺾인 자리에 조용히 웅크렸고, 그 웅크림은 피난보다 깊었고, 기도보다 멀었다. 바깥은 여전히 바다였다. 격랑 위를 떠도는 오늘. 그 바다에서 우리는 얼마나 멀어졌는가.

    고요히 앉아 있던 교회. 예배당 안은 따뜻했고, 말끔했다. 그러나 그 벽 바깥에선 누군가 울고 있었다. 그 울음이 강단 아래까지 흘러왔는데도, 우리는 듣지 못했다. 아니, 듣지 않았다. 절망이 예배를 지나쳐 흐를 때도, 우리는 차분했고 경건했다. 그것이 외면이었다는 걸, 이제야 알겠다. 우리는 침묵했고, 그 침묵은 사랑이 아니라, 무관심이었다.

    자끄 엘륄은 말했다. “요나는 단순히 불순종한 자가 아니다. 그는 정의를 넘어 역사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순종하기에 불가능한 존재임을 증언하는 인물이다.”[5]

    그 말은 지금 우리를 겨눈다. 불순종이라기보다는, 너무 인간적인 두려움. 진실 앞에 멈춰 선 망설임. 순종하지 못한 게 아니라, 순종할 수 없었던 시간. 그러나 하나님은 그때도 침묵하지 않으셨다. 요나를 깨우셨듯, 지금도 우리를 부르신다. 아직도 부르신다.

    그래서 이제는, 누군가 울어야 한다. 예언자처럼. 그러나 더 작고 조용하게. 두려움이 발끝에 맴돌더라도, 눈을 감지 않고 일어서야 한다. 기도처럼 눈을 뜨고, 회개처럼 움직여야 한다.

    아무도 믿지 않아도, 믿는 자처럼. 침묵이 길어지면, 사랑도 기억을 잃는다. 회피는 관계를 병들게 하고, 고장은 심장을 멈추게 한다.

    경계에 선 우리는,한 줄기 울음으로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그 울음이, 희망이 될 것이다.

    희망은 가장 깊은 침묵의 틈에서 태어난다.

    그 무렵, 나에게도 쿰의 손길이 있었다. 고아원 문이 나를 가장 밑으로 끌어내렸다면, 민대근이라는 한 청년은 그 문 앞에 말없이 서 있었다.

    토요일마다, 같은 시간에, 같은 자리에서. 나는 그 청년이 오는 토요일을 기다렸다. 그는 내 이름을 부르지 않았고, 나는 그를 피하지 않았다. 햇살처럼 조용히, 그는 내 앞에 머물렀다.

    그는 내 손을 잡아 주었다. 그날의 손은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았다. 눈물로 무게를 잰다면, 따뜻한 온기가 한 그릇쯤 담긴 손이었다.

    우리는 함께 목욕탕으로 걸어갔다. 김 서린 유리문을 밀고 들어간 그곳, 따뜻한 물 안에서 나는 녹고 있었다. 등을 밀어주는 그의 손길은 떼보다 오래된 두려움을 벗겨내는 듯했다.

    나는 갑을탕이라는 그 이름을 아직도 기억한다. 누군가에게는 평범한 간판이었지만, 나에게는 생명을 불어넣은 문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다시 따뜻해질 수 있었다.

    우리는 식당으로 향했다. 국밥 한 그릇. 김이 피어 오를 때, 그는 말없이 그릇을 내밀었다. 말보다 먼저 내 마음이 받아 들었다. 숟가락보다 따뜻했던 눈빛, 국물보다 깊었던 기다림, 나는 조용히 그 마음을 떠먹었다.

     글에 소개되는 민대근 목사님을 2023년 한국에서 뵙고 이번에는 제가 식사를 사 드렸다. 글에 소개되는 민대근 목사님을 2023년 한국에서 뵙고 이번에는 제가 식사를 사 드렸다.

    좁은 골목을 돌아 작은 방으로 들어섰다. 그는 기타를 꺼냈고, 노래가 방을 천천히 채웠다. "사막에 샘이 넘쳐 흐르리라" 나는 그날, 노래보다 먼저 그의 마음을 들었다. 그 순간, 내 안에도 말라 있던 마음 하나에 샘 하나가 고이기 시작했다. 그 물은 아직 마르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나는 분에 넘치는 길을 건넜다. 영국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오래된 얼굴을 만났다. 

    민대근. 

    나처럼 목사가 되어, 나처럼 유학길에 올라, 나처럼 그 낯선 땅에 서 있었다. 우리는 말없이 서로를 알아보았다. 눈빛이 말보다 먼저 울었다. 고마움도, 놀라움도, 어릴 적 내 이름까지도 숨처럼 오갔다.

    그의 기다림은 내 생을 바꾸었다. 목욕탕의 따뜻한 물, 식탁 위의 김 서린 그릇, 기타 줄 사이를 지나간 노래 한 줄이 지금까지 내 삶을 붙들고 있었다.

    나는 그를 잊지 못했다. 그는 말없이 내 손을 잡았고, 말없이 나를 일으켜 세웠다. 그는 내 인생의 쿰이었다.

    나는 아주 낮은 곳까지 내려갔다. 기도도 울리지 않는 그 아래, 문 하나, 조용히 열렸다. 그 문은 어릴 적 나를 닫아놓던 문이 아니라, 누군가 조심스럽게 열어준 문이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다시 숨을 쉬기 시작했다. 내 영혼의 긴 악몽에서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그 청년의 손이, 나를 잠에서 깨웠다. 

    그리고 마음속에 켜둔 작은 불빛 하나, 그것으로 나는 다른 누군가의 울음을 향해 문이 되어 주기로 마음먹었다.

     

    희망은 그렇게,

    가장 깊은 침묵의 틈에서,

    조용히 다시 태어났다.


    그날의 베개

                                                                                                                              조원태 

    나는
    기도하는 척하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누가 나를 부르지 않기를
    무슨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고요라는 이름의 이불을 덮고
    세상으로부터 숨었다

    하루는
    그렇게 멀어졌고
    이름 없는 잠에
    나를 눕혔다

    그러다
    누군가 내 안에서
    작은 소리로 나를 불렀다

    귀가 아닌
    가슴이 먼저 반응했다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그 소리에
    나는 눈을 떴다

    베개는 젖어 있었고
    세상의 울음이
    내 꿈 속까지 흘러 들어와 있었다

    그제야 알았다
    기도는 입술보다
    먼저 눈을 여는 일이라는 걸

    나는 천천히
    하루를 향해 일어났다
    누군가의 아픔을 베고
    조용히 다시
    세상에 눕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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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 [1] 브루스 월키(Bruce K. Waltke)는 "쿰"이라는 히브리어 동사가 단지 육체의 일어섬을 넘어서 예언자로서의 존재 전반, 곧 그의 소명과 사명을 향한 전인격적 일어섬을 요구한다고 설명한다. 그는 이 단어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즉각적 응답을 암시하며, 창조적 권위가 담긴 명령이라고 말한다. Bruce K. Waltke, "An Old Testament Theology: An Exegetical, Canonical, and Thematic Approach," Zondervan, 2007, p. 880.

    [2] Walter Brueggemann, The Prophetic Imagination, Fortress Press, 1978, pp. 11–13. 브루그만은 본문에서 예언자는 억압된 현실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상상해내는 존재이며, 하나님은 고통받는 자들의 현실 속에서 스스로를 계시하신다고 설명한다. 교회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서 들려오는 절규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실재한다고 말한다.

    [3] 자끄 엘륄, 『요나의 심판과 구원』, 홍성사, 2021, 48쪽. “그들은 우연히 그들을 깨운다. 즉,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현실에서 발생한 일에 대하여 의식을 갖도록 강제한다.”

    [4] 팀 켈러, The Prodigal Prophet: Jonah and the Mystery of God's Mercy, Viking, 2018. “요나는 하나님의 은혜가 악인에게 임할 것을 두려워했다. 악보다 더 두려운 것은, 은혜였다.” (p. 102)

    [5] 자끄 엘륄, The Judgment of Jonah, Eerdmans, 1971. “요나는 불순종한 자가 아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감당할 수 없는 인간의 내면을 보여준다.” (p.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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