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글 조원태목사의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 아낌, 내가 미워하는 이를 하나님이 아끼실 때 (뉴스앤조이) 2026-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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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낌, 내가 미워하는 이를 하나님이 아끼실 때
조원태목사의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
이번에는 성서 66권 각 책의 서문(Threshold, 문지방 텍스트)을 따라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새로운 연재『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로 다시 시작합니다.
이 시리즈는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라는 주제로 출발합니다. 특정 책의 프롤로그 분석을 넘어, 성경 전체의 첫 문장을 따라 걸어가는 실험적 글쓰기로서 목회와 문학, 신학을 잇는 연재가 될 것입니다.
연재의 서막을 여는 글은 프롤로그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소개되며, 이후 매주 성경의 서로 다른 현관을 열어갈 예정입니다.
이 연재가 독자들의 시야를 넓히고 성서를 다시 ‘시작의 자리’에서 읽게 하는 영적 초대가 되리라 믿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성경의 전체적인 가르침이 다시금 생생하게 느껴지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 편집자 주 -
요나 1:1-3
1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2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 3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

욥바의 부두에는 소금기 밴 바람이 낮게 불었을 것이다. 햇볕에 달궈진 갑판에서는 송진 냄새가 올라오고, 젖은 밧줄은 손바닥에 차갑고 거칠었다. 짐을 나르는 발소리와 뱃사람들의 짧은 고함이 뒤엉켰고, 돛은 바람을 삼킬 때마다 둔한 소리를 내며 부풀었다. 물 위에서 부서진 햇빛이 배의 옆구리를 따라 흔들렸다.
그 소리와 냄새 사이로 한 남자가 배삯을 냈다. 동전이 손에서 손으로 건너갔다. 그는 배에 올랐다. 발을 디딜 때마다 갑판이 조금씩 기울었고, 몸은 그 움직임을 따라 흔들렸다. 등 뒤에는 육지가 있었다. 눈앞에는 바다가 있었다. 한 도시의 이름을 뒤에 두기 위해서였다.
다시스. 그러나 귀 안쪽에는 다른 이름이 남아 있었다. 니느웨.
요나는 그 이름에서 멀어지려고 바다 쪽으로 몸을 돌렸다. 배는 다시스를 향했고, 선체 아래에서는 검은 물이 낮게 부서졌다. 그런데 이야기는 니느웨를 놓아주지 않았다.
부두는 조금씩 작아졌다. 사람들의 고함도 바람 속에서 가늘어졌다. 육지는 수평선 아래로 천천히 낮아졌다. 다시스와 니느웨 사이에는 먼 거리가 있었다. 그러나 더 멀어진 것은 한 사람이 한 말씀에서 벗어나려 한 거리였다.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짧은 한 절 안에서 그 말이 두 번 되풀이된다.
육지는 멀어졌는데, 니느웨는 멀어지지 않았다.
요나서는 놀랄 만큼 평범한 예언서의 문장으로 시작한다.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예언자에게 말씀이 오고, 그는 그 말을 전한다. 오래 익숙한 순서다.
그런데 두 절 만에 그 순서가 어긋난다. 말씀이 왔고, 요나는 갔다. 가야 할 쪽이 아니라 반대편으로. 그러나 피한 말씀까지 멀어진 것은 아니었다.
3장에 이르면 처음과 거의 같은 문장이 다시 들린다.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로 요나에게 임하니라”(욘 3:1). 배 밑의 어둠과 물고기 뱃속을 지나 그는 다시 땅 위에 선다. 그리고 다시, 니느웨다. 한 번 피한 길이 그의 발앞에 놓인다.
요나서를 끝까지 읽고 처음으로 돌아오면 그 장면은 조금 달라 보인다. 욥바의 바람과 흔들리던 갑판 너머로 마지막 문장이 들려오는 듯하다.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욘 4:11).
첫 명령의 깊은 곳에는 이미 마지막 질문이 있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니느웨를 아끼고 있었다.
아래로 가는 길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라.”
하나님의 첫 동사는 ‘일어나다’이다. 그런데 다음 절에서도 같은 동사가 나온다. “요나가 …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히브리어 원문에서도 두 문장은 같은 동사 쿰(qûm)으로 이어진다. 그는 일어났다. 그러나 니느웨 쪽은 아니었다.
길을 찾고, 욥바까지 내려가고, 배삯을 치르고, 떠날 배에 오른다. 발은 쉬지 않았다. 항구의 돌바닥을 지나 갑판에 닿을 때까지 그는 계속 움직였다. 도피는 때로 이렇게 부지런하다. 몸은 앞으로 갔는데, 말씀에서는 멀어졌다.
요나는 욥바로 내려가고, 배 안쪽으로 다시 내려간다(욘 1:3, 5). 바다가 뒤집히는 동안에도 그는 가장 깊은 곳에서 잠든다. 마침내 물속으로 던져지고, 물고기 뱃속에서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다”고 말한다(욘 2:6).
말씀은 그에게 일어나라고 했는데, 그의 몸은 자꾸 아래로 향한다. 욥바에서 배 밑으로, 배 밑에서 바다로, 바다에서 더 깊은 어둠으로.
열왕기하에도 ‘아밋대의 아들 요나’가 나온다. 이스라엘의 영토 회복을 말했던 예언자다(왕하 14:25). 그런 그에게 하나님은 이제 자기 백성의 경계 밖에 있는 한 도시의 이름을 건넨다. 니느웨.
그 도시는 무죄하지 않았다. 첫 명령부터 하나님은 그곳의 “악독”이 자기 앞에 올라왔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니느웨의 폭력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곧장 도시를 무너뜨리지 않는다. 먼저 말을 보낸다. 그 말을 들고 갈 사람으로 요나를 부른다.
요나가 피하려 한 것은 어쩌면 니느웨보다 그 방향이었을지 모른다. 하나님이 시선을 두고 있는 곳. 자신은 차마 바라보고 싶지 않은 곳.
폭풍이 일자 문장도 거칠어진다. 1장에는 ‘던지다’라는 같은 히브리어 동사가 네 차례 되풀이된다. 하나님은 바다에 큰 바람을 던지고, 선원들은 배를 가볍게 하려고 짐을 던진다. 요나는 자신을 던지라고 말한다. 마침내 사람들의 손에서 그의 몸이 바다로 떨어진다(욘 1:4-5, 12, 15).
짐은 바다에 버려지고, 요나도 그 뒤를 따른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버리지 않는다.
그 사이 더 낯선 일이 벌어진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고 있는데, 하나님을 모르던 선원들은 그분을 두려워하기 시작한다. 요나는 배 밑에서 잠들어 있고, 이방인들은 살기 위해 부르짖는다.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는 사람은 멀어지고, 모르던 사람들은 폭풍 속에서 그분을 향한다.
첫 장이 끝나기도 전에 경계가 흔들린다. 가까움과 멂을 가르던 선도 함께 흔들린다.
그리고 큰 물고기가 나타난다. 요나의 몸이 검은 물속으로 가라앉고, 바다가 그 위를 덮었을 것이다. 그런데 더 깊은 어둠이 그를 삼킨다. 죽음처럼 보이는 곳에서 그는 살아남는다.
그 어둠 속에서 요나는 기도한다. 가장 낮은 곳까지 내려간 사람이 비로소 위를 향해 말을 건넨다. 하나님이 명하자 물고기는 그를 육지에 토해 낸다.
젖은 몸이 다시 땅에 닿는다. 그리고 말씀이 다시 온다.
원수의 얼굴
3장은 1장을 다시 시작한다.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로 요나에게 임하니라.” 처음과 거의 같다. 같은 하나님, 같은 니느웨. 이번에는 요나가 일어나 그 도시로 간다. 그의 발은 마침내 니느웨에 닿았다. 마음까지 닿은 것은 아니었다.
성 안에서 그가 외친 말은 히브리어로 다섯 단어뿐이다.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욘 3:4). 자비를 설명하지도, 회개의 길을 가르치지도 않는다. 그런데 사람들이 멈춘다. 먹던 것을 놓고, 왕은 왕복을 벗는다. 거친 베옷이 사람과 짐승의 몸을 덮는다. 폭력을 행하던 손을 거두라는 명령이 성 안을 돈다.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그치사 우리가 멸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그렇지 않을 줄을 누가 알겠느냐”(욘 3:9). 도시는 살아남는다. 그런데 예언자는 기뻐하지 않는다.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욘 4:1).
그제야 1장의 도피가 다른 얼굴을 드러낸다. 요나는 니느웨가 무서워 달아난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이 그 도시를 끝내지 않으실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떠났다.
그는 하나님을 몰랐던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욘 4:2).
그가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니느웨의 악보다, 그 악을 보고도 아직 끝내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이었다.
이스라엘이 오래 불러 온 아름다운 고백이 요나의 입에서는 원망이 된다. 하나님의 자비가 익숙한 경계 안에 머물 때에는 은혜였다. 그러나 그 자비가 니느웨에 닿자 그는 견디지 못했다.
그래서 요나를 쉽게 나무라기는 어렵다. 니느웨라는 이름에는 제국의 폭력과 오래된 두려움이 붙어 있다. 상처에는 시간이 남는다. 잃어버린 땅과 이름, 빼앗긴 날들은 화해라는 말 하나로 접히지 않는다.
요나서도 니느웨의 악을 지우지 않는다. 첫 명령부터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악을 보았다. 그런데 그 악이 한 사람과 한 도시의 마지막 이름이 되게 두지는 않는다.
앞선 오바댜의 목소리가 여기에서 희미하게 겹친다. 에돔의 폭력도, 형제의 재난을 기뻐한 일도 지워지지 않는다. 요나는 그 기억 곁에 또 하나의 물음을 놓는다.
원수는 끝까지 원수로만 남아야 하는가.
성경은 정의와 긍휼 사이의 긴장을 지우지 않는다. 요나는 그 사이에 서 있다.
니느웨가 살아남자 그는 죽고 싶다고 말한다.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욘 4:3). 도시 하나가 살아난 일이 한 사람에게는 견딜 수 없는 일이 되었다. 요나는 니느웨가 무너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도시는 그대로 남았다. 대신 흔들린 것은 그가 오래 붙들어 온 세계였다.
하나님은 설명하지 않는다. 한 가지를 묻는다.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요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남겨진 물음
요나는 성 밖으로 나간다. 니느웨 동쪽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성은 그대로 서 있다. 사람들의 움직임도 멈추지 않는다. 그는 멀리서 그 도시를 바라본다. 아직 끝나지 않은 일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그는 작은 초막을 짓는다. 하나님이 준비한 박넝쿨이 자라 머리 위로 잎을 펼친다. 한낮의 빛이 잎 사이에서 잘게 흔들리고, 뜨거웠던 머리와 어깨에 그늘이 내려앉는다. 그제야 요나는 “크게 기뻐한다”(욘 4:6).
살아남은 도시는 그의 기쁨이 되지 못했다.
그늘은 되었다.
다음 날 벌레가 박넝쿨을 갉아 먹는다. 해가 뜨고 뜨거운 동풍이 분다. 잎이 사라진 자리로 햇볕이 그대로 쏟아진다. 요나는 다시 죽기를 구한다. 하나님이 묻는다.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욘 4:9). 이번에는 요나가 대답한다.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그때 하나님은 사라진 박넝쿨과 살아남은 니느웨를 나란히 놓는다. “네가 …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욘 4:10). 그리고 묻는다.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같은 말이다. 요나는 박넝쿨을 아꼈고, 하나님은 니느웨를 아끼신다. 서로 다른 것은 마음이 아니라, 그 마음이 향하는 곳이었다.
요나가 아낀 것은 자기 머리 위의 그늘이었다. 하나님이 아끼는 것은 도시였다. 사람과 가축, 아직 오른쪽과 왼쪽도 분별하지 못하는 수많은 생명이었다. 작은 식물 하나가 사라진 것을 견디지 못하는 요나 앞에서, 하나님은 도시 하나가 사라지는 일을 묻는다.
그러고 보면 하나님은 처음부터 그곳을 보고 있었다. 니느웨의 악도, 그 안에 살아 있는 생명도. 그래서 무너뜨리기 전에 말을 보냈다.
요나도 그 아낌 밖에 있지 않았다. 폭풍과 물고기, 두 번째 말씀과 박넝쿨, 벌레와 바람까지 그의 곁을 지나간다. 도망친 사람을 하나님은 끝내 놓지 않는다.
니느웨를 살리시는 하나님은 요나도 버리지 않는다.
그래서 가장 먼 거리는 욥바에서 니느웨까지가 아니었을지 모른다. 요나의 마음에서 하나님의 마음까지. 그 거리가 더 멀다.
아낌이라는 말은 부드럽지만, 요나에게는 날카롭다. 내가 사랑하는 이를 하나님도 사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내가 미워하는 이를 하나님이 아끼실 때, 그 마음은 나를 불편한 자리로 데려간다.
요나서는 그 흔들림을 끝내 봉합하지 않는다. 마지막 장에는 화해도, 요나의 회개도 기록되지 않는다.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그리고 책이 끝난다. 요나의 대답도 없다. 대신 그가 서 있던 자리에 빈자리가 남는다.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처음 장면이 다시 보인다. 욥바의 부두. 다시스로 떠나는 배. 반대편의 니느웨. 그리고 한 사람에게 임한 말씀.
처음에는 하나님이 어디로 가라고 하시는 이야기처럼 보였다. 끝까지 읽고 돌아오면 조금 다르게 들린다. 하나님이 아끼는 곳으로 갈 수 있겠느냐는 이야기였다.
요나는 일어났다. 그러나 다른 방향으로 갔다. 책의 마지막에서도 그는 아직 질문 앞에 있다. 이번에는 배도, 도망갈 도시도 없다. 질문 하나만 남아 있다.
하나님이 아끼는 이를 내가 미워할 때, 나는 어디로 가는가.
※ 최근 요나 연구는 이 책을 단순한 불순종의 교훈보다 여러 긴장이 교차하는 이야기로 읽는다. 줄리아나 클라센스는 제국의 폭력과 공동체의 상처에 주목하고, 에런 혼콜은 요나서의 독특한 히브리어를 통해 그 형성 시기를 새롭게 검토한다. 이러한 연구들은 요나서를 큰 물고기의 이야기 너머, 제국의 기억과 타자의 얼굴, 하나님의 긍휼과 인간의 분노가 맞부딪치는 이야기로 다시 읽게 한다.
요나서의 문장
하나님의 긍휼은 내가 미워하는 이에게 닿을 때, 나를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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