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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재글 조원태목사의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 반문, 사랑은 아직 할 말이 있다 (뉴스앤조이) 2026-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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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media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2회   작성일Date 26-10-22 14:23

    본문

    반문, 사랑은 아직 할 말이 있다

    •  

    조원태목사의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

    조원태 목사의 연재『요나서로 묻는 17개 질문』을 통해 독자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은 바 있습니다. 독자층에 깊은 질문을 던지며 신학적·목회적 통찰을 나누어 온 그의 글은 특히 삶의 언어로 성서를 풀어낸 점에서 많은 공감과 지지를 받았습니다.

    이번에는 성서 66권 각 책의 서문(Threshold, 문지방 텍스트)을 따라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새로운 연재『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로 다시 시작합니다.

    이 시리즈는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라는 주제로 출발합니다. 특정 책의 프롤로그 분석을 넘어, 성경 전체의 첫 문장을 따라 걸어가는 실험적 글쓰기로서 목회와 문학, 신학을 잇는 연재가 될 것입니다.

    연재의 서막을 여는 글은 프롤로그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소개되며, 이후 매주 성경의 서로 다른 현관을 열어갈 예정입니다.

    이 연재가 독자들의 시야를 넓히고 성서를 다시 ‘시작의 자리’에서 읽게 하는 영적 초대가 되리라 믿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성경의 전체적인 가르침이 다시금 생생하게 느껴지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 편집자 주 -

    말라기 1:1-5
    1 여호와께서 말라기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경고라. 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 5 너희는 눈으로 보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지역 밖에서도 크시다 하리라

    성전은 이미 다시 서 있었다. 아침이면 문이 열리고, 제단에서는 연기가 올랐다. 제물의 발굽이 마당의 돌을 밟았고, 짐승의 울음이 벽에 부딪혀 짧게 돌아왔다. 눈에 보이는 것들은 제법 회복되어 있었다.

    그러나 성전 밖의 삶은 달랐다. 제국은 그대로였고, 제단에 불이 올라도 살림은 나아지지 않았다. 밭에서는 해마다 같은 걱정이 돋아났다. 기다렸던 정의는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기다림이 길어지면 말도 낡는다. 한때 붙들었던 약속이 어느 날 낯설게 들린다. 분명 들었던 말인데, 이제는 그 말을 믿었던 자신까지 멀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때 하나님이 먼저 말한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백성은 되묻는다. “어떻게?”

    말라기는 그 짧은 틈에서 시작한다. 한쪽은 사랑을 말하고, 다른 쪽은 그 사랑의 흔적을 요구한다. 오래된 언약은 남아 있지만, 눈앞의 삶에서는 그 흔적을 읽어 내기 어렵다.

    그런데 그들은 떠나지 않았다. 여전히 성전 문을 드나들고, 제물을 올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 몸은 오랜 순서를 기억했다. 다만 마음이 그 뒤를 따라오지 못했다. 떠나지 않았는데도 거리는 생겨났다. 예배는 이어졌다. 오래된 말을 잊지는 않았지만, 그 말을 믿고 기다리는 일은 점점 어려워졌다.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습니까?”

    그 질문은 말라기 네 장을 지나간다. 제단에 놓인 제물, 떼인 품삯, 서로에게 돌아서야 할 마음이 차례로 드러난다. 사랑을 의심하는 사람들과, 그 의심 앞에서도 말을 거두지 않는 하나님. 그 사이가 말라기의 문지방이다.


    경고의 첫마디

    첫 절은 이 책을 ‘경고’라 부른다. 그런데 경고의 첫마디는 책망이 아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책망보다 먼저 관계가 놓인다. 말라기의 매서움은 사랑이 사라졌기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다. 관계가 아직 끝나지 않았기에 들려오는 목소리다. 이 순서를 놓치면 말라기에는 꾸지람만 남는다.

    하나님이 말할 때마다 백성은 되묻는다.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했습니까? 정의의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우리가 어떻게 돌아가야 합니까?(말 1:6; 2:17; 3:7). 말라기는 그 반문들을 지우지 않는다. 물음과 응답이 오갈수록 그들 사이에 벌어진 거리가 드러난다.

    그러나 모든 질문이 같은 곳에서 나오지는 않는다. 어떤 물음은 책임을 피하려는 마음에서 나오고, 어떤 물음은 오래 견딘 상처에서 나온다. 어제의 위로로 오늘을 버티지 못해 다시 묻는 사람도 있다. 질문만 보고 믿음을 재단하면, 먼저 사라지는 것은 질문하는 사람의 얼굴이다.

    하나님의 첫 대답은 뜻밖에도 두 형제의 이름을 부른다. 야곱과 에서. 그 이름 뒤에는 이스라엘과 에돔의 역사가 놓여 있다.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다”는 선언 곁에 에돔의 황폐한 산지가 펼쳐진다(말 1:2–4). 다른 민족의 무너짐이 사랑의 증거처럼 놓이는 데에는 불편함이 남는다.

    여기서 야곱과 에서는 개인에 대한 감정의 언어로만 읽기보다, 두 형제에게서 이어진 두 공동체의 역사와 언약의 관계 속에서 읽어야 한다. 예언자는 그 엇갈린 역사 속에서도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이 거두어지지 않았음을 말한다.

    백성은 지금을 내민다. 하나님은 지나온 시간을 펼친다. 훗날 “나는 여호와라 변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는 말씀도 그 기억에 닿아 있다(말 3:6).

    모든 상실을 사랑의 증거로 바꿀 수는 없다. 살아남았다는 사실만으로 더 사랑받았다고 말할 수도 없다. 말라기가 붙드는 것은 고난을 면하게 해 주는 편애가 아니라, 무너진 시간에도 끊어지지 않은 언약이다. 사랑을 따져 묻는 백성을 하나님은 여전히 ‘너희’라고 부른다.

    첫 논쟁의 끝에서 시선은 이스라엘의 경계 밖으로 향한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지역 밖에서도 크시다”(말 1:5). 에돔의 폐허를 지나 도착한 고백이기에 쉽게 읽히지는 않는다. 그 폐허의 불편함은 남는다. 그러나 하나님을 어느 한 민족의 소유로 가둘 수 없다는 사실도 남는다.

    더 오래 남는 것은 그 뒤에도 대화가 이어진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백성의 반문 앞에서 침묵하지 않는다. 드러내고, 꾸짖고, 다시 돌아오라고 부른다. 말라기의 희망은 질문이 사라지는 데 있지 않다. 질문 뒤에도 목소리가 끊어지지 않는 데 있다.

    우리에게도 기도를 마치고 한동안 고개를 들지 못하는 날이 있다. 찬송의 가사는 또렷한데, 마지막 음이 사라지고 나면 무엇을 믿고 기다려야 할지 아득하다. 말라기의 반문은 그런 날 우리의 입술에도 남는다.

    나는 지금 어떤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가? 내 생각과 다른 목소리가 들려와도 그 앞에 머물 수 있을까?


    제단 위의 계산

    대화는 곧 제단으로 옮겨 간다. 불은 꺼지지 않았고, 제물도 끊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 불 앞에 눈먼 짐승과 저는 짐승, 병든 짐승이 놓였다(말 1:8). 예배는 계속되었다. 다만 가장 좋은 것을 고르던 손이 어느새 남는 것을 고르고 있었다.

    떼 가운데 온전한 짐승이 있었는데도 흠 있는 것을 바쳤다(말 1:14). 예언자는 묻는다. 그것을 총독에게도 내놓겠느냐고(말 1:8). 사람 앞에서는 꺼릴 것을 하나님 앞에서는 내밀었다. 제물은 그 손이 누구를 귀하게 여기는지 말하고 있었다.

    소홀함은 천천히 습관이 된다. 처음에는 작은 예외였을 것이다. 한 번쯤은 괜찮겠지 하며 아끼는 것을 남겨 둔다. 그러다 어느 날 아끼는 것은 남겨 두고 남은 것을 건네는 일이 자연스러워진다. 말라기의 제단에는 그런 시간이 쌓여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차라리 누군가 성전 문을 닫아 주기를 바라신다(말 1:10). 불은 여전히 타고 있었다. 그러나 불이 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예배가 살아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예언자가 문제 삼는 것은 마음이 메마른 날의 예배가 아니다. 메마른 날에도 자리를 지키는 믿음은 있다. 문제는 귀하게 여겨야 할 이를 더 이상 귀하게 여기지 않으면서도 예배가 아무 일 없이 계속되는 데 있다.

    그 소홀함은 성전 밖에서도 모습을 드러낸다. 품꾼의 삯을 떼고, 과부와 고아를 억누르며, 나그네를 밀어내는 손이 있다(말 3:5). 제단에 무엇을 올렸는지 묻던 예언자는 이제 이웃에게서 무엇을 빼앗았는지 묻는다. 제물을 바치는 손과 다른 사람의 몫을 움켜쥔 손은 결국 같은 손이다.

    십일조를 말하는 자리에서도 첫마디는 “내게로 돌아오라”이다. 창고에 양식을 들이라는 요청과 하늘의 문을 열겠다는 약속은 그 뒤에 나온다(말 3:7–10). 이 순서를 거꾸로 읽으면 십일조는 거래가 된다. 얼마를 드렸고 얼마나 돌아올지 셈하게 된다. 그러나 이 말씀은 곡식을 헤아리기 전에 멀어진 관계를 돌아보게 한다.

    이제 백성의 입에서도 다른 계산이 시작된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는가”(말 3:14–15). 책의 첫머리에서는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습니까?”라는 질문이 들렸다. 여기서는 섬겨서 무엇이 남았느냐는 물음이 들린다. 사랑의 흔적을 찾던 질문이 어느새 유익을 헤아리는 질문이 되었다.

    그러나 그 물음을 탐욕으로만 읽을 수는 없다. 악한 사람이 잘되고 교만한 사람이 복되다 불리는 세상을 오래 바라본 피로도 그 안에 있다(말 3:15). 말라기는 그 항의까지 지우지 않는다.

    그 곁에 다른 장면이 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서로 말을 건넨다. 무슨 말을 나누었는지는 기록되지 않았다. 다만 하나님이 귀를 기울여 들으셨고, 그들을 위한 기억의 책이 하나님 앞에 기록되었다고 한다(말 3:16). 유익을 따지는 목소리 곁에서, 여전히 서로에게 말을 건네는 사람들이 있었다.

    같은 시대의 두 장면이다. 한쪽에서는 “내게 무엇이 돌아옵니까?”라는 물음이 들리고, 다른 쪽에서는 서로 건네는 말이 들린다. 손익의 장부 곁에 기억의 책이 놓인다.


    마음이 돌아오는 길

    ‘말라기’는 히브리어로 ‘나의 사자’라는 뜻이다. 사람의 이름인지, 맡은 일을 가리키는 말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책의 뒤편에서 그 말이 다시 들린다.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말 3:1). 이름처럼 들리던 말이 이제 누군가의 도착을 기다리게 한다.

    누군가 온다. 그러나 그를 맞는 자리에 불이 놓여 있다. 은을 정련하는 불이다. 그 불 앞에서 숨겨진 것이 드러나고, 레위 자손도 정결하게 되어야 한다(말 3:2–3). 정의를 기다리는 사람 역시 자신이 그 정의 밖에 서 있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책의 마지막에는 두 이름이 차례로 남는다. 모세와 엘리야. 모세의 율법을 기억하라는 말 뒤에 엘리야를 보내겠다는 약속이 놓인다(말 4:4–5). 하나는 이미 받은 말씀을 돌아보게 하고, 다른 하나는 아직 오지 않은 날을 기다리게 한다. 그 사이에 오늘의 삶이 놓인다.

    엘리야에게 맡겨진 것은 마음을 돌리는 일이다.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자녀의 마음을 아버지에게로(말 4:6). 어느 한쪽만 돌아서서는 좁혀지지 않는 거리다. 등을 보이던 사람이 다시 얼굴을 향하고, 끊겼던 말이 두 사람 사이를 건너간다.

    말라기는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서 어긋난 말로 시작했다. 끝에 이르러 그 어긋남은 아버지와 자녀 사이의 거리로 드러난다. 하나님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사람은 서로에게 돌아서야 한다. 성전도 제단도 제자리에 있다. 움직여야 할 것은 마음이다.

    그러나 말라기는 그 마음이 돌아선 장면을 보여 주지 않는다. 마지막에 남는 것은 화해의 풍경이 아니라 경고다. 마음을 돌리지 않으면 땅을 저주로 치겠다는 말씀(말 4:6). 아직 길은 열려 있지만, 돌아섰다는 소식은 없다.

    개신교 성경에서는 말라기 다음에 신약이 놓인다. 누가복음은 훗날 엘리야의 약속을 세례 요한의 사명과 연결해 읽는다(눅 1:17). 그러나 말라기 안에서는 아직 엘리야가 오지 않았다. 누군가 온다는 약속과 마음을 돌리라는 요청만 남겨 둔 채 책은 끝난다.

    그 기다림의 문턱에서 처음의 질문이 다시 들린다.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그 물음을 쉽게 나무랄 수는 없다. 사랑을 믿기 어려운 날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라기는 질문하는 사람의 손도 비춘다. 제단에 무엇을 올렸는지, 누구의 몫을 붙들었는지, 누구에게서 마음을 거두었는지.

    사랑의 증거를 찾던 시선은 제단을 지나 이웃에게, 마침내 아버지와 자녀의 얼굴에 이른다. 처음의 질문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 곁에 또 하나의 물음이 놓인다.

    나는 누구에게 돌아서야 하는가?

    말라기는 그 대답을 대신 적지 않는다.

    하나님은 아직 말을 거두지 않았다.

     

    ※ 말라기는 오래전부터 선언―반문―응답이 반복되는 논쟁적 대화 형식으로 읽혀 왔다. 최근 연구는 이러한 대화들이 책 전체를 어떻게 연결하는지, 성전 재건 이후 페르시아 시대 유다에서 예배와 제사장의 책임, 이웃에 대한 불의, 하나님의 정의가 어떻게 얽혀 있는지 살핀다. 또한 학개·스가랴와의 관계, 열두 소예언서의 맺음말에 놓인 모세와 엘리야, 유대교와 기독교에서 달리 읽혀 온 결말도 중요한 연구 주제다. 이러한 관점에서 말라기는 책망의 모음이 아니라, 흔들린 언약 관계와 공동체의 삶을 함께 묻는 책으로 읽힌다.

    말라기서의 문장

    사랑은 의심을 지우지 않고, 돌아올 길을 남긴다.

    조원태 목사 / <뉴욕우리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