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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재글 조원태목사의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 파수, 대답이 더딜 때에도 서 있는 사람 (뉴스앤 조이) 9-24-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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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media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5회   작성일Date 26-09-24 11:40

    본문

    파수, 대답이 더딜 때에도 서 있는 사람

    조원태목사의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

    조원태 목사의 연재『요나서로 묻는 17개 질문』을 통해 독자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은 바 있습니다. 독자층에 깊은 질문을 던지며 신학적·목회적 통찰을 나누어 온 그의 글은 특히 삶의 언어로 성서를 풀어낸 점에서 많은 공감과 지지를 받았습니다.

    이번에는 성서 66권 각 책의 서문(Threshold, 문지방 텍스트)을 따라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새로운 연재『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로 다시 시작합니다.

    이 시리즈는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라는 주제로 출발합니다. 특정 책의 프롤로그 분석을 넘어, 성경 전체의 첫 문장을 따라 걸어가는 실험적 글쓰기로서 목회와 문학, 신학을 잇는 연재가 될 것입니다.

    연재의 서막을 여는 글은 프롤로그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소개되며, 이후 매주 성경의 서로 다른 현관을 열어갈 예정입니다.

    이 연재가 독자들의 시야를 넓히고 성서를 다시 ‘시작의 자리’에서 읽게 하는 영적 초대가 되리라 믿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성경의 전체적인 가르침이 다시금 생생하게 느껴지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 편집자 주 -

    하박국 1:1-4 
    1 선지자 하박국이 묵시로 받은 경고라 2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3 어찌하여 내게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눈으로 보게 하시나이까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4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정의가 굽게 행하여짐이니이다

    대답이 오지 않는 밤이 있다. 부를 만큼 불렀는데도 아무 소식이 없고, 귀를 기울일수록 자기 숨소리만 또렷해지는 밤. 하박국은 바로 그 밤의 문턱에서 입을 연다. “어느 때까지리이까?”

    그의 눈앞에는 외면할 수 없는 것들이 있었다.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강포는 먼 나라의 소문이 아니라 하루의 풍경이었다, 더 무서운 것은 사람들이 그 풍경에 조금씩 익숙해져 가는 일이었다.

    2025년부터 미국의 이민 단속이 거세지면서, 서류미비 이민자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일터와 거리, 집과 법원 주변에서 체포되고 구금되었다. 어린 자녀 앞에서 부모가 끌려가고, 가족이 갈라지고, 단속 과정에서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처음에는 많은 이들이 놀랐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숫자는 커졌고, 우리의 놀람은 오히려 작아졌다. 한 사람의 얼굴이 숫자가 되고, 한 가족의 생이별이 통계가 되는 동안 일상은 그대로 흘러간다. 어쩌면 하박국이 견디지 못한 것도 이런 익숙함이었을 것이다.

    법은 남아 있는데 누구를 지키고 있는가? 정의라는 말은 남아 있는데 누구의 삶에서 굽어지고 있는가? 하박국은 굽은 것을 곧다고 부르지 않는다. 현실을 감추지도 않고, 현실 때문에 하나님을 버리지도 않는다.

    하박국은 그 금 사이에 서 있다. 대답이 늦어도 묻고, 대답이 더 큰 물음을 낳아도 떠나지 않는다. 마침내 성루에 올라 아직 보이지 않는 쪽을 바라본다.

    하박국은 그렇게 세 장을 건넌다. 강포 앞에서 묻고, 성루에서 기다리고, 아무 열매도 없는 들판에서 끝내 노래한다. 세상이 먼저 달라진 것은 아니다. 끝까지 남아 있던 사람이 달라졌다.


    굽은 정의 앞에서

    하박국의 첫 네 절에는 이 짧은 책이 끝까지 품고 갈 물음이 이미 접혀 있다. 강포와 불의, 하나님의 침묵, 기다림과 믿음, 그리고 마지막의 노래까지. 책 전체의 균열은 이미 여기서 시작된다.

    그의 첫 질문은 자기 삶이 뜻대로 풀리지 않아서 나온 것이 아니다. 그가 견디지 못한 것은 세상이 잘못되어 가는데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일이었다.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하오니.”

    법은 남아 있었지만 사람을 지키지 못했다. 재판은 있었지만 정의는 나오지 않았고, 악인이 의인을 에워싸자 마침내 정의 자체가 휘었다. 저울은 그대로 걸려 있었다. 다만 이미 한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하박국이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악만이 아니었다. 하나님도 이 모든 것을 보고 계실 텐데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그는 묻는다.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 정의는 어디에 있는가?

    그 질문은 바로 앞의 나훔서가 바라본 심판보다 더 불편한 자리로 그를 데려간다. 폭력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또 다른 폭력의 제국을 들어 심판하신다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하나님의 첫 대답은 그를 안심시키지 않는다. 갈대아 사람들, 곧 바벨론이 온다. 하박국은 강포를 거두어 달라고 부르짖었는데, 하나님은 더 강한 제국을 일으키겠다고 하신다. 강포를 멈춰 달라는 기도 앞에 더 큰 강포가 대답처럼 다가온다. 대답이 질문보다 더 무겁다.

    하박국은 다시 묻는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어떻게 더 악한 자를 들어 악을 심판하실 수 있는가?(합 1:13) 하나님의 대답은 처음의 물음을 지우지 않는다. 오히려 더 깊은 곳으로 데려간다.

    그는 떠나지 않는다. 이해하지 못한 채 하나님 쪽에 몸을 남겨 둔다. 그 오래 남아 있음이 훗날 그를 성루에 세우고, 아무 열매 없는 들판에서도 노래하게 한다.

    오늘 우리는 너무 많은 불의를 너무 빨리 본다. 한 고통이 마음에 닿기도 전에 다음 고통이 밀려오고, 얼굴은 숫자가 되며 죽음은 자막이 된다. 하박국은 그 무감각 앞에서 멈춘다.

    본 것을 하나님 앞에 가져가고, 아픈 것을 아프다고 말한다. 이해되지 않는 것을 이해한 척하지 않는다.

    믿음은 눈을 감는 일이 아니다. 눈을 뜬 채, 떠나지 않는 일이다.


    성루에 남은 사람

    하박국 2장에 이르면 풍경은 단순해진다. 성 아래의 현실은 그대로이고, 멀리에는 제국의 그림자가 남아 있다. 달라진 것은 없다. 다만 한 사람이 성루에 올라가 서 있다.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합 2:1)

    그는 대답을 만들어 내지 않는다. 이해되지 않는 것을 이해했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다만 자리를 정하고, 아직 보이지 않는 쪽을 향해 몸을 둔다.

    기다림은 생각보다 몸에 가까운 일이다. 같은 자리에 오래 서서, 아무것도 오지 않는 지평선을 다시 바라보는 일. 희망보다 피로가 먼저 쌓여도, 끝내 그 자리를 떠나지 않는 일이다.

    바로 그때 한 문장이 들려온다.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4).

    하박국에게 믿음은 먼저 대답이 아니라 자세였다. 모든 것이 분명해진 뒤의 확신이 아니라, 아직 분명하지 않은데도 하나님 쪽으로 몸을 남겨 두는 일이었다.

    이 말은 훗날 바울의 로마서와 갈라디아서, 그리고 히브리서를 지나 기독교 신앙의 중요한 언어가 되었다. 그러나 하박국에게는 먼저 교리보다 삶의 말이었다. 모든 것이 풀린 뒤에 믿는 것이 아니라, 풀리지 않은 채로도 끝내 하나님 쪽에 남은 사람의 말이었다.

    ‘믿음’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에무나에는 신실함과 견고함의 뜻이 함께 배어 있다. 한순간 뜨겁게 확신하는 것보다, 오래 한 자리를 지키는 데 가까운 말이다. 제국의 속도가 하나님의 속도보다 빨라 보여도, 끝내 몸을 하나님 쪽에 남겨 두는 것. 하박국의 믿음은 그런 오래 남아 있음에 가까웠다.

    그래서 그의 질문은 믿음의 실패가 아니다. 질문을 지우지 않고 품은 채 성루에 남는 일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동안에도 눈을 떼지 않는 일이다.

    2장 후반에는 다섯 번의 ‘화 있을진저’가 이어진다. 빼앗아 쌓은 부와 폭력으로 세운 성읍, 사람을 수치스럽게 하는 권력과 우상이 차례로 심판 앞에 선다. 제국은 강하지만 영원하지 않고, 폭력은 빠르지만 마지막 말을 갖지는 못한다.

    그리고 2장은 뜻밖의 침묵으로 닫힌다.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땅은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합 2:20).

    1장은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이는 자리에서 시작되었다. 그런데 2장의 끝에서는 온 땅이 잠잠해진다. 제국의 소음과 인간의 말이 멎고, 하나님이 남는다.

    침묵의 주체가 바뀐다.

    우리 시대에도 그런 성루가 필요하다. 너무 빨리 판단하지 않는 자리, 누구의 편인지 말하기 전에 누가 울고 있는지 바라보는 자리, 답을 서두르지 않고 질문과 함께 오래 머무는 자리.

    대답은 늦어도, 믿음은 자리를 지킨다.

    하박국은 성루에 남는다.


    비록의 노래

    하박국 3장에 이르면 책의 소리가 달라진다. “어느 때까지리이까”라고 묻던 목소리가 이제 기도가 되고, 마침내 노래가 된다. 그러나 세상이 나아진 것은 아니다.

    무화과나무에는 열매가 없고, 포도나무는 비어 있다. 감람나무는 소출을 내지 못하고, 밭에는 먹을 것이 없다. 우리에는 양이 없고, 외양간에도 소가 없다.

    빈 가지. 빈 밭. 빈 우리.

    하박국은 그 빈자리를 다른 말로 덮지 않는다. 없는 것을 있다고 하지 않고, 황폐한 들판을 풍성하다고 부르지도 않는다. 믿음은 현실을 아름답게 바꾸어 부르는 일이 아니다.

    그때 한 단어가 남는다.

    “비록.”

    비록 아무것도 열리지 않고, 아무것도 거두지 못할지라도. 하박국은 빈손을 감추지 않은 채 하나님 앞에 선다. ‘비록’은 체념의 말이 아니라, 모든 것이 비어도 끝내 남겠다는 고백이다.

    처음의 물음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그 물음보다 더 깊은 곳에, 떠나지 않는 마음 하나가 생겼다. 하박국의 믿음은 묻고, 흔들리고, 오래 기다리는 동안 그렇게 깊어졌다.

    책의 마지막에서 하박국은 사슴의 발을 말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합 3:19).

    강포와 패역에 둘러싸여 서 있기도 버거웠던 사람이 이제 높은 곳을 걷는다. 황폐한 땅은 여전히 발아래 있다. 땅이 먼저 달라진 것은 아니다. 사람의 발이 달라졌다.

    하박국은 모든 의문이 풀렸다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빈 들판 한가운데에서 노래한다.

    처음에는 물음이 있었다.

    그다음에는 성루가 있었다.

    마지막에는 노래가 남았다.

    하박국을 덮고 나면 그것이 오래 남는다. 믿음은 모든 답을 얻은 뒤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 대답 없는 밤에도 자리를 떠나지 않고, 빈 들판에서도 하나님 쪽으로 몸을 돌리는 것.

    어쩌면 믿음은 그렇게 남는다.

    설명보다 오래,

    노래로.

     

    ※ 하박국은 오랫동안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2:4)는 말씀을 중심으로 읽혀 왔다. 최근 연구는 여기에 더해 폭력과 정의, 기다림과 믿음, 하나님께 끝까지 묻는 예언자의 목소리에 주목한다. 토머스 렌츠는 하박국을 불의한 시대에 정의와 믿음을 묻는 책으로, 대니얼 C. 티머는 인간의 폭력 속에서도 하나님의 정의와 회복을 바라보는 책으로 읽는다. 이렇게 보면 하박국 1장 1–4절의 질문은 단순한 탄식이 아니다. 굽은 정의를 하나님 앞에 가져가고, 성루에서 기다리며, 마침내 ‘비록’의 노래에 이르는 하박국 전체의 첫 호흡이다.

    하박국의 문장

    대답이 늦어도, 믿음은 자리를 지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