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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재글 조원태목사의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 먼저, 내 집을 세우는 동안 남겨 둔 폐허 (뉴스앤조이) 2026-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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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media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11회   작성일Date 26-10-10 12:56

    본문

    먼저, 내 집을 세우는 동안 남겨 둔 폐허

    •  

    조원태목사의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

    조원태 목사의 연재『요나서로 묻는 17개 질문』을 통해 독자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은 바 있습니다. 독자층에 깊은 질문을 던지며 신학적·목회적 통찰을 나누어 온 그의 글은 특히 삶의 언어로 성서를 풀어낸 점에서 많은 공감과 지지를 받았습니다.

    이번에는 성서 66권 각 책의 서문(Threshold, 문지방 텍스트)을 따라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새로운 연재『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로 다시 시작합니다.

    이 시리즈는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라는 주제로 출발합니다. 특정 책의 프롤로그 분석을 넘어, 성경 전체의 첫 문장을 따라 걸어가는 실험적 글쓰기로서 목회와 문학, 신학을 잇는 연재가 될 것입니다.

    연재의 서막을 여는 글은 프롤로그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소개되며, 이후 매주 성경의 서로 다른 현관을 열어갈 예정입니다.

    이 연재가 독자들의 시야를 넓히고 성서를 다시 ‘시작의 자리’에서 읽게 하는 영적 초대가 되리라 믿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성경의 전체적인 가르침이 다시금 생생하게 느껴지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 편집자 주 -

    학개 1:1-8
    1 다리오 왕 제이년 여섯째 달 곧 그 달 초하루에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로 말미암아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 4 이 성전이 황폐하였거늘 너희가 이 때에 판벽한 집에 거주하는 것이 옳으냐 5 그러므로 이제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니 너희는 너희의 행위를 살필지니라 .... 8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성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비가 내리는 밤, 손본 지붕 아래는 젖지 않는다. 처마 끝에서 물방울이 떨어지고, 젖은 옷에서는 흙냄새가 오른다. 두 손으로 따뜻한 그릇을 감싸면 손끝의 냉기가 서서히 풀린다. 문을 닫는 순간 빗소리도 멀어진다.

    길 건너 무너진 집은 그대로인데, 문 안에서는 그 집을 생각하는 시간이 짧아진다.

    자기 지붕을 고친 일이 잘못은 아니다. 누구나 몸을 누일 마른 자리가 필요하다. 다만 내 집이 따뜻해지는 동안, 바깥에는 오래 비를 맞는 자리가 남는다. 내 삶을 세우는 동안, 무엇을 계속 ‘아직’이라 말하며 미루어 두었는가?

    각자의 집은 조금씩 제 모습을 찾아가는데, 하나님의 집은 황폐한 채 남아 있다. 손은 부지런했다. 다만 닿는 곳이 달랐다. 어떤 집에는 손이 닿았고, 어떤 폐허에는 닿지 않았다.

    이 책이 묻는 것은 단지 무엇을 지을 것인가가 아니다. 무엇을 먼저 돌볼 것인가? 그 질문과 함께, 오래 미뤄 둔 시간에 날짜가 찍히기 시작한다.


    아직이라는 시간

    학개서는 날짜부터 적는다. “다리오 왕 제이년 여섯째 달 곧 그 달 초하루.” 기원전 520년이다. 고향 땅으로 돌아왔지만 그들의 시간은 여전히 페르시아 왕의 이름 아래 흐르고 있었다. 귀환은 이루어졌으나, 잃어버린 세계가 모두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바로 그 미완의 귀환 한복판에 하나님의 말씀이 도착한다.

    첫 절에는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나란히 등장한다. 행정을 맡은 자리와 예배를 맡은 자리가 함께 불린다. 성전의 황폐함은 어느 한 사람에게 맡겨 두고 비켜설 일이 아니었다. 말씀은 두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시작한다.

    백성에게도 이유가 있었다.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1:2). 돌아온 땅에서 다시 먹고살 길을 마련하는 일은 절박했을 것이다. 씨를 뿌리고 집을 고치며 하루를 이어 가야 했다. 그들에게 ‘아직’은 처음부터 핑계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언자는 그 ‘아직’ 앞에서 질문을 거두지 않는다. 하나님의 집을 지을 때는 아직 오지 않았는데, 자기 집을 돌볼 때는 어떻게 이미 와 있었는가?

    “이 성전이 황폐하였거늘 너희가 이 때에 판벽한 집에 거주하는 것이 옳으냐”(1:4). ‘판벽한’은 나무로 덮거나 마감한 상태를 가리킨다. 이것이 곧 호화로운 저택을 뜻하는지는 단정하기 어렵다. 분명한 것은 두 집에 쏟은 관심의 차이다. 자기 집은 손보았고, 하나님의 집은 황폐한 채 남아 있었다.

    ‘아직’은 때로 신중한 말이다. 힘이 모자랄 때 서두르지 않는 지혜이기도 하다. 그러나 오래 되풀이되면 외면에 이유를 붙여 주는 말이 된다. 처음에는 형편이 나아지기를 기다렸을 것이다. 그러다 기다리는 데 익숙해진다. 오래 미뤄 둔 일은 마침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처럼 느껴진다.

    문제는 시간이 없었다는 데 있지 않았다. 그들이 모든 일을 미룬 것도 아니었다. 자기 집을 위해서는 움직였다. 하나님의 집만 늘 나중이었다. 무엇을 먼저 돌보고 무엇을 오래 기다리게 하는지에 삶의 순서가 드러났다.

    그들에게 성전은 실제로 다시 세워야 할 집이었다. 그곳에서 백성은 하나님께 예배하며 자신들이 누구에게 속한 사람들인지 함께 기억해야 했다. 성전을 방치한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공동의 삶에서 뒤로 미루는 일이었다. 저마다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분주했지만, 함께 하나님 앞에 서는 자리는 비어 있었다.

    그러므로 이 책의 재건은 돌과 나무에만 머물지 않는다. 집을 다시 세우는 동안 삶의 순서도 다시 놓여야 한다. 하나님께 드릴 자리, 함께 감당할 책임, 나의 안락만으로 채워지지 않는 삶의 중심이 건축의 한복판에서 되살아난다.


    부지런함이 향한 곳

    “너희는 너희의 행위를 살필지니라”(1:5). 히브리어 표현을 가깝게 옮기면 ‘너희의 길에 마음을 두라’는 뜻이다. 여기서 ‘마음’은 감정만이 아니라 생각하고 판단하는 자리이고, ‘길’은 지금까지 걸어온 삶을 가리킨다.

    이 말은 잠시 자신을 돌아보라는 권유보다 깊다. 무엇을 중요하다고 말해 왔는지가 아니라, 실제로 무엇을 향해 걸어왔는지를 살피라는 요청이다. 무엇을 소중히 여겼는지는 다짐보다 발걸음에 더 선명하게 남는다.

    이어지는 하루는 고단하다. 많이 뿌려도 거둘 것은 적고, 먹어도 배부르지 않으며, 옷을 여며도 몸은 따뜻해지지 않는다. 품삯은 구멍 난 전대에 넣은 듯 사라진다(1:6). 게을러서 생긴 궁핍이 아니다. 손은 쉬지 않았는데 삶은 좀처럼 채워지지 않는다. 땀과 결실 사이가 자꾸 벌어진다.

    예언자는 그 메마름을 하나님의 집이 황폐한 채 남아 있는 현실과 떼어 놓지 않는다. 하늘이 이슬을 그치고 땅이 소산을 거두는 것까지 하나님의 심판으로 읽는다(1:9–11).

    그렇다고 오늘의 가난과 재난을 개인의 믿음 부족으로 돌릴 수는 없다. 이 말씀의 화살은 고통받는 한 사람보다, 무엇을 먼저 돌볼 것인가를 함께 선택해 온 공동체를 향한다.

    그 방향은 9절에서 더욱 또렷해진다. “너희는 각각 자기의 집을 짓기 위하여 빨랐음이라.” 그들은 부지런했다. 다만 그 부지런함이 자기 집 문턱에서 멈췄다. 얼마나 애썼는가보다 그 애씀으로 무엇을 돌보았는가가 문제였다. 열심히 살았다는 사실만으로 삶의 방향까지 옳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너희의 행위를 살필지니라”는 요청은 7절에서 되풀이되고, 곧 행동을 요구한다. 산에 올라가라. 나무를 가져오라. 집을 지으라(1:8). 자신이 걸어온 길에 마음을 두는 일은 마침내 발과 손의 방향을 바꾸는 데까지 나아간다. 각자의 집으로 향하던 몸이 이제 함께 예배할 집을 향한다.

    하나님은 그렇게 세워지는 집을 기뻐하고 그곳에서 영광을 얻겠다고 하신다. 건축의 목적은 백성의 번영을 보장하는 데 있지 않다. 하나님께 드릴 자리를 공동의 삶 한가운데 다시 세우는 데 있다. 성전을 지으면 더 잘살게 된다는 식으로 읽는 순간, 하나님의 집마저 자기 삶을 위한 수단이 된다.

    고대의 성전과 오늘의 예배당을 곧바로 포개어 읽을 수도 없다. 이 말씀을 오늘의 건축을 정당화하는 문장으로 바꾸기 전에 먼저 물어야 한다. 우리의 예배와 공동의 삶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더 나은 공간을 마련하면서도 그 안팎의 사람들을 놓친다면, 건물은 새로워져도 삶의 순서는 달라지지 않는다.

    우리도 자기 집을 돌보며 산다. 새는 곳을 막고, 아이가 공부할 자리를 마련하고, 노후를 위해 조금씩 모은다. 그 수고는 소중하다. 다만 내 가족의 필요에는 금세 움직이면서도, 함께 감당해야 할 일 앞에서는 형편을 먼저 헤아릴 때가 있다. 언젠가 찾아가겠다고 한 이웃의 문 앞에는 계절이 몇 번이나 바뀐다.

    이 책의 질문은 그 미뤄진 자리까지 따라온다. 우리가 서둘러 온 길 옆에 누가 남아 있는가? 나의 안정을 돌보느라 분주한 동안, 함께 돌보아야 할 자리는 얼마나 오래 비어 있었는가?

    아무도 일부러 허물지 않았어도 모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면 공동의 자리는 황폐해진다.


    돌보다 먼저 깨어나는 것

    첫 장의 후반에서 흐름이 달라진다. 총독과 대제사장, 남은 백성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경외한다(1:12). 첫 절에 적힌 두 지도자의 이름 곁으로 이제 백성이 선다. 그리고 짧은 약속이 주어진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1:13).

    이 약속은 백성의 응답 뒤에, 공사의 시작 앞에 놓여 있다. 성전이 완성되어야 비로소 하나님의 함께하심이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집은 여전히 황폐하고 해야 할 일도 남아 있지만, 그들은 이미 함께하신다는 말씀을 듣는다. 재건은 완공 뒤에 받을 보상을 향한 노동이 아니라, 이미 함께하시는 분의 약속에 응답해 손을 움직이는 일이다.

    그러자 하나님이 지도자들과 남은 백성의 영을 일으키신다(1:14). ‘감동시키다’로 옮긴 말은 잠든 것을 깨우고 멈춘 것을 다시 움직이게 하는 힘을 품고 있다. 오래 멈춰 있던 몸들이 일어난다. 손에 나무가 들리고, 발이 폐허 쪽으로 향한다.

    돌이 제자리를 찾기 전에 사람이 먼저 깨어난다.

    첫 장은 다시 날짜로 닫힌다. 다리오 왕 제이년 여섯째 달 이십사일(1:15). 첫 말씀이 임한 초하루에서 스물사흘이 지난 날이다. 말씀을 받은 날짜로 시작한 장이 마침내 손을 댄 날짜로 끝난다. ‘아직’이라는 말에 갇혀 있던 일에 비로소 날짜가 생겼다. 달력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같은 달력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달라졌다.

    그러나 손을 댔다고 낙심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 2장에 이르면 옛 성전의 영광을 기억하는 이들의 눈에 지금의 모습은 보잘것없어 보인다(2:3). 예언자는 그 간극을 감추지 않는다. 오히려 초라함을 아는 사람들에게 굳세게 일하라고 말하며, 다시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들려준다(2:4–5). 과거의 영광이 오늘의 작은 수고를 하찮게 만들지 못하도록 붙드는 것이다.

    다가올 영광에는 평강의 약속이 따른다(2:9). 그러나 성전이 세워진다고 삶까지 저절로 거룩해지는 것은 아니다. 이어지는 거룩함과 부정함의 문답은 거룩은 접촉만으로 옮겨 가지 않지만 부정은 번질 수 있음을 보여 준다(2:10–14). 건물을 세우는 일과 하나님 앞에서 삶을 바로 세우는 일은 서로 대신할 수 없다. 성전은 다시 세워져야 하지만, 그 안에 서는 사람의 삶도 함께 새로워져야 한다.

    책의 마지막에서 시야는 나라들의 권세와 스룹바벨의 미래로 넓어진다. 하나님은 그를 자신의 인장처럼 삼겠다고 약속하신다(2:20–23). 인장은 주인의 권위와 선택을 나타내는 표다. 제국 아래 총독으로 살아가는 한 사람에게 하나님은 자신의 선택을 선언하신다. 다리오 왕의 연호로 시작된 이 책의 시간이 마지막에는 제국의 시간 너머, 하나님이 이루실 미래를 향해 열린다.

    이 짧은 책은 성전의 완공을 보고하며 끝나지 않는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약속을 남긴다. 마지막에 우리 앞에 남는 것은 완성된 건물보다,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믿으며 다시 손을 움직이는 사람들이다.

    우리에게도 다시 세울 수 없는 집과 이전으로 돌려놓을 수 없는 관계가 있다. 모든 것을 회복할 수 있다는 말은 어떤 상처 앞에서는 너무 가볍다. 잃은 것을 애도해야 할 때도 있고, 돌아오지 않을 것을 받아들여야 할 때도 있다. 그래도 오늘 돌볼 사람과 오래 비워 둔 자리는 남아 있다.

    그 자리로 돌아가는 사람에게 먼저 주어지는 것은 완성된 설계도가 아니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다 갖추어진 뒤에야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들 수 있는 나무가 있고, 곁에서 함께 들어 줄 손이 있다. 우리 삶에도 말씀을 들은 날과 손을 대는 날 사이가 있다. 알고 있으면서 미뤄 둔 시간, 마음에 두고도 찾아가지 못한 시간.

    그러다 어느 날, 몸을 일으킨다. 미뤄 둔 자리로 간다. 손을 뻗는다. 나무 하나가 옮겨지고, 마른 먼지가 일어난다. 한 사람의 손 곁으로 다른 손이 온다.

    폐허는 아직 폐허다.

    그러나 사람은 이미 일어서 있다.

     

    ※ 학개 연구는 성전 재건 자체를 넘어, 페르시아기 유다 공동체의 사회경제적 형편과 정체성, 성전과 하나님의 임재, 그리고 열두 소예언서 안에서 이 책이 차지하는 자리까지 함께 살핀다. 캐럴·에릭 마이어스는 학개와 스가랴 1–8을 페르시아 통치 아래 공동체가 종교적 삶과 정체성을 다시 세워 가는 역사·사회적 맥락에서 읽었고, 존 R. 바커는 당시의 사회경제적 상황, 성전과 하나님의 임재, 그리고 열두 소예언서와의 관계를 학개서의 주요 쟁점으로 짚는다. 그렇게 보면 학개서는 단순한 건축 독려가 아니라, 무너진 뒤 무엇을 삶의 중심에 다시 둘 것인가를 묻는 예언서다.

    학개서의 문장

    삶의 중심은 가장 먼저 손이 가는 곳에서 드러난다.

    조원태 목사 / <뉴욕우리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