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글 조원태목사의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 잠잠, 너를 두고 하나님이 노래하신다 (뉴스앤조이) 2026-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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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잠, 너를 두고 하나님이 노래하신다
조원태목사의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
이번에는 성서 66권 각 책의 서문(Threshold, 문지방 텍스트)을 따라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새로운 연재『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로 다시 시작합니다.
이 시리즈는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라는 주제로 출발합니다. 특정 책의 프롤로그 분석을 넘어, 성경 전체의 첫 문장을 따라 걸어가는 실험적 글쓰기로서 목회와 문학, 신학을 잇는 연재가 될 것입니다.
연재의 서막을 여는 글은 프롤로그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소개되며, 이후 매주 성경의 서로 다른 현관을 열어갈 예정입니다.
이 연재가 독자들의 시야를 넓히고 성서를 다시 ‘시작의 자리’에서 읽게 하는 영적 초대가 되리라 믿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성경의 전체적인 가르침이 다시금 생생하게 느껴지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 편집자 주 -
스바냐 1:1-7
1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의 시대에 스바냐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스바냐는 히스기야의 현손이요 아마랴의 증손이요 그다랴의 손자요 구시의 아들이었더라 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땅 위에서 모든 것을 진멸하리라 ... 7 주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지어다 이는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므로 여호와께서 희생을 준비하고 그가 청할 자들을 구별하셨음이니라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 스바냐서는 네 세대의 시간을 거슬러 오른다. 구시, 그다랴, 아마랴, 히스기야. 이름에서 이름으로 이어진 생명이 스바냐에게 닿았다. 그 핏줄과 생명의 서사를 첫 절에 새겨 놓자마자, 온 땅을 향한 선고를 던진다.
“내가 땅 위에서 모든 것을 진멸하리라.”
방금까지 한 사람의 내력을 헤아리던 책이 온 땅의 생명을 거두겠다고 한다. 짐승과 새와 물고기, 우리가 미처 이름 붙이지 못한 생명들까지 그 선고 안에 든다. 이름을 기억하는 문장과 생명의 끝을 선언하는 문장 사이. 스바냐의 문지방은 발을 디디기 어려운 그 간격에 놓여 있다.
예언자가 바라보던 예루살렘의 밤을 떠올린다. 지붕에는 낮의 열기가 남아 있고, 별을 향해 피운 향의 쓴 냄새가 밤공기에 번진다. 멀지 않은 곳에는 여호와의 성전이 서 있다. 사람들은 그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몸을 돌려 다른 신에게도 맹세한다(습 1:5). 기도는 그치지 않는데, 마음은 한곳에 머물지 못한다.
성벽도 성전도 제자리에 있다. 겉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도시에서, 예언자는 이미 금이 간 삶을 본다. 하나님을 부르면서도 자신을 지켜 줄 힘은 다른 곳에서 찾는 사람들. 예배가 이어지는 동안에도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법에 익숙해진다. 스바냐에게 ‘임한 말씀’은 그 평온을 깨뜨린다.
왜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이들에게 모든 것을 거두겠다고 말씀하시는가?
창조의 뒷걸음
‘진멸하리라.’ 히브리어 아소프 아세프(אָסֹף אָסֵף)에는 ‘거두다’와 ‘끝내다’라는 뜻이 맞물려 있다. 비슷한 소리가 잇따르며 남김없음을 강조한다. 조금 허물고 고쳐 살겠다는 정도로는 이 말을 감당할 수 없다. 지금 발을 딛고 있는 세계 자체가 사라질 수 있다는 선고다.
사람과 짐승, 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가 차례로 불려 나온다(습 1:2–3). 창세기에서 생명이 세상을 채워 가던 순서를 거꾸로 밟는 듯하다. 사람에게서 짐승으로, 새에게서 물고기로. 창조가 뒷걸음질한다.
하늘은 남아도 날갯짓이 없고, 물은 흘러도 그 아래 움직이는 생명이 없다. 생명들이 사라진 뒤에도 남아 있을 하늘과 물을 생각하면, 그 ‘모든 것’에는 지금 숨 쉬는 우리도 들어 있다.
3절의 ‘멸절하리라’에는 ‘끊어 내다’라는 뜻의 카라트(כָּרַת)가 쓰인다. 그 말 곁에 첫 절의 이름들을 다시 놓아 본다. 네 세대를 이어 온 선이 끊어질 수 있다. 한 생명의 죽음에는 그가 물려받은 기억과 아직 건네지 못한 사랑도 걸려 있다. 사라지는 것은 눈앞의 한 몸인데, 그 몸을 통과하던 시간까지 함께 떨린다.
더 견디기 어려운 것은 그 끊어짐이 인간에게서 멈추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탐욕에 동의한 적 없는 생명들까지 같은 선고 아래 놓인다. 그들을 생각하면 이 말씀을 쉽게 설명할 수 없다. 인간의 죄는 인간의 울타리 안에서 끝나지 않는다. 우리가 버린 것이 물을 따라 흘러가듯, 우리가 저지른 일도 다른 생명의 몸에 이른다.
그렇다고 이 말씀을 오늘의 재난에 덧씌워 고통받는 이들의 죄를 찾아서는 안 된다. 무너진 집 앞에서 누군가를 정죄하는 말은 그에게 다시 떨어지는 돌이 된다.
예언 앞에서 먼저 물어야 할 것은 내 삶이다. 내 식탁까지 오는 동안 무엇이 소진되었는가? 내가 편리하게 사는 동안 누구의 땅이 메말랐는가? 스바냐의 텅 빈 하늘과 물은 우리가 보지 않으려 했던 삶의 뒤편을 드러낸다.
온 땅을 향하던 선고는 유다와 예루살렘으로 좁혀진다. 하나님이 그 주민들 위에 손을 펴신다(습 1:4).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도시도 그 손 아래 있다.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기억으로도 지금 무엇을 섬기며 사는가라는 물음을 피할 수 없다.
바알을 섬기는 이들, 지붕에서 별에게 절하는 이들, 여호와께 맹세하면서 말감에게도 맹세하는 이들이 불려 나온다(습 1:4–5). 한 입술에서 두 이름이 나온다. 삶이 흔들릴 때 자신을 지켜 줄 힘을 하나라도 더 붙들려는 마음. 그 안에서 하나님은 여러 안전장치 가운데 하나가 되어 간다.
하나님을 등지고 떠난 이들과 그분을 찾지도 구하지도 않는 이들이 같은 선고 아래 놓인다(습 1:6). 관계는 한 번의 배반으로 끊어지기도 하고, 오래 묻지 않는 시간 속에서 닳아 없어지기도 한다. 기도의 문장은 기억하지만 하루의 결정에 하나님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이름은 입술에 남아 있는데, 그 이름을 부르던 마음은 멀리 가 있다.
첫 절에 적힌 요시야의 이름이 여기서 다시 읽힌다. 개혁의 왕은 제단을 허물고 제도를 바꿀 수 있다. 그러나 한 사람이 속으로 섬기는 것까지 대신 내려놓아 줄 수는 없다. 돌로 쌓은 제단을 치운 자리에서도 두려움과 욕망은 다시 무릎 꿇을 곳을 찾는다.
돌로 쌓지 않은 제단도 있다. 손해가 두려워 약한 이의 사정을 외면할 때, 지위를 잃지 않으려고 옳지 않은 일 앞에서 입을 다물 때, 우리 안에도 제단이 놓인다. 거기에 신의 이름이 적혀 있지 않아도 삶은 그쪽으로 기운다. 무엇을 믿는지는 무엇을 잃지 않으려고 움직이는가에 드러난다.
심판의 말을 읽다가 다른 사람의 얼굴부터 떠올릴 때가 있다. 그러나 그 선고 앞에는 나도 서 있다. 남을 가리키던 손을 내리면, 나를 가려 주던 말들도 힘을 잃는다. 그때 다음 말씀이 들린다.
말이 멎는 자리
“주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지어다.”
첫말은 하스(הַס)다. ‘쉿.’ 짧은 숨소리 같은 말이다.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다. 심판하러 오시는 하나님 앞에서 입안에 고여 있던 말들이 멎는다.
하나님은 희생을 준비하시고 초대한 이들을 구별하신다(습 1:7). 제물을 바치던 이들이 이제 심판의 대상이 된다. 예배의 익숙한 자리가 뒤집힌다. 그동안 무엇을 드렸는지 말하려던 입술 앞에, 어떻게 살아왔는지가 놓인다.
여호와의 날은 하나님을 없는 분처럼 여기며 살아온 시간이 끝나는 날이다. 하나님은 복도 재앙도 내리지 않으실 것이라고 사람들은 속으로 생각했다(습 1:12). 그분이 계시든 말든 내일도 오늘과 같으리라는 믿음. 그 굳은 일상 속으로 하나님의 날이 들어온다.
사정이 있었다는 말, 모두 그렇게 산다는 말, 그래도 저 사람보다는 낫다는 말이 힘을 잃는다. 그 말들이 멎은 뒤에야 내가 한 일이 보인다. 어쩔 수 없었다고 덮어 둔 선택, 살기 위해서였다고 밀어 둔 타인의 상처.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것은 그 삶을 숨김없이 내어놓는 일이다.
내 사정을 길게 설명하던 입으로 남의 삶에는 쉽게 판결을 내린다. “너는 늘 그렇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기도 전에 익숙한 말이 먼저 나온다. 상대가 더는 설명하지 않으면, 내 말이 옳았다고 여긴다.
시몬 베유는 한 편지에서 주의를 기울이는 일을 “가장 드물고 순수한 형태의 관대함”이라고 썼다. 상대를 다 안다는 생각을 멈추고, 아직 듣지 못한 그의 사정이 있음을 인정하는 데서 그 관대함은 시작된다. 내 말이 잦아든 자리에 끝까지 듣지 않았던 목소리가 들어온다.
스바냐가 밝힌 침묵의 자리는 ‘주 여호와 앞’이다. 그 자리에 권력자의 이름을 넣는 순간 잠잠함은 복종을 강요하는 도구가 된다. 스바냐 자신이 폭력과 거짓으로 채운 집을 고발했다(습 1:9).
상처 입은 사람에게는 자기 고통을 말할 자리가 필요하다. 침묵을 배워야 할 쪽은 오히려 그 고통을 다 듣기도 전에 설명하고, 용서부터 요구해 온 사람일 수 있다.
침묵 뒤에는 길이 있다.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습 2:3). 첫 장의 ‘찾지 않음’에 이어, 이제 ‘찾으라’는 부름이 들린다. 내가 넓게 차지한 자리 때문에 누가 밀려났는지 살피고, 그에게 자리를 내어 주는 일이다. 잠잠함 속에서 들은 말씀이 몸의 움직임으로 이어진다.
이 부름은 이미 하나님의 규례를 지키는 겸손한 이들을 향한다. 그런데도 그 구절에는 ‘혹시’라는 말이 남아 있다.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겸손마저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 내미는 증서가 될 수 없다. 이제 빈손으로 하나님의 자비를 구한다.
아직 두려움은 가시지 않았다. 풀리지 않은 물음을 안고도 오래 묻지 않던 사람이 다시 하나님을 찾는다. 희망은 그렇게, 몸을 돌릴 만큼의 작은 힘으로 먼저 온다.
너로 말미암아
책의 끝자락에서는 다른 명령이 들린다. “노래할지어다”(습 3:14). 하나님은 거만한 자들을 거두어 내시고, 곤고하고 가난한 백성을 남겨 당신의 이름에 의지하게 하신다(습 3:11–12). 형벌을 거두시고 원수를 물리치신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계신다(습 3:15).
회복은 입술에도 일어난다. 여러 백성의 입술이 깨끗해지고, 남은 이들의 입에서 거짓이 사라진다(습 3:9, 13). 첫 장에서는 한 입술이 여호와와 다른 신의 이름을 함께 불렀다. 이제 하나님께 향하는 마음과 사람에게 건네는 말이 서로를 배반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주어진 약속은 먹고 눕는 일에까지 닿는다. 두렵게 할 사람이 없는 삶이다(습 3:13). 음식을 빼앗길까 서둘러 삼키지 않아도 되는 저녁. 문밖의 발소리에 놀라 몸을 일으키지 않아도 되는 밤. 오래 긴장했던 등이 마침내 바닥에 닿는다.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습 3:17).
하나님께 노래하라는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 이제 하나님의 노래를 듣는다. 돌아온 백성이 그 노래의 까닭이다. 같은 절에는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라는 말도 있다. 이 번역을 따라 읽으면, 처음에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잠잠했고 이제는 하나님이 사랑 안에서 잠잠하신다. 그리고 그 사랑을 기쁨의 노래로 들려주신다.
그 ‘너’는 상처 입은 시온이다. 흩어지고 수모를 겪은 공동체다. 하나님은 다리를 저는 이를 구하고 쫓겨난 이를 모으며, 수모를 겪던 이들이 다시 존중받게 하신다(습 3:19–20). 돌아오는 무리에는 걸음이 느린 사람도, 자신의 힘으로는 돌아올 수 없었던 사람도 있다. 하나님은 그들을 데려오겠다고 말씀하신다.
첫 절에 적힌 이름들이 여기서 다시 떠오른다. 한 사람의 내력을 기록하며 시작한 책이 마지막에는 흩어진 공동체의 명예가 회복될 날을 약속한다. 살아남은 이들에게는 함께 살아갈 이웃과 존중받을 자리가 주어진다.
그렇다고 마지막 노래가 첫 장의 두려움을 지우지는 않는다. 모든 것을 거두겠다는 선고를 회복을 위한 아름다운 과정이라고 서둘러 설명할 수는 없다. 생명들이 사라질 수 있다는 떨림은 끝까지 남는다.
내가 누리고 싶은 평온을 위해 여전히 문밖에 서 있어야 하는 사람은 없는가? 누구의 빈자리에 너무 오래 익숙해져 버렸는가? 쫓겨났던 이들을 바깥에 둔 채 부르는 노래로는 이 책의 마지막에 닿을 수 없다.
다시 첫 장의 지붕을 떠올린다. 밤이 깊어도 그 위의 불씨는 쉽게 꺼지지 않는다. 오래 의지해 온 것들을 놓으면 나까지 사라질 것 같아 손을 펴지 못한다. 그 두려움을 품은 채 하나님 앞에 선다. 변명하던 말을 멈추고, 움켜쥔 손을 조금씩 편다.
책의 마지막에는 빈손으로도 돌아갈 자리가 있다. 먼 길을 걸어온 발과 오래 웅크렸던 몸이 그곳에서 쉰다. 아직 자신의 삶을 기뻐할 수 없는 사람도 그 자리에 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을 두고 노래하신다.
※ 대니얼 C. 티머(2024)는 스바냐의 심판을 세계의 정화와 회복이라는 전망에서 읽고, 니컬러스 R. 워스(2025)는 1:2–3의 창조 역전을 인간의 행위와 생태 위기의 관계 속에서 살핀다. 3:17은 ‘사랑으로 새롭게 하시며’로도 번역되지만, 이 글은 ‘잠잠히 사랑하시며’를 따랐다. 1:7과 3:17에서 잠잠함을 나타내는 히브리어 어휘는 서로 다르며, 이 글에서 두 침묵을 잇는 것은 문학적 해석이다. 베유의 말은 1942년 4월 13일 조에 부스케에게 보낸 편지에서 옮겼다.
스바냐서의 문장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잠잠해지고, 하나님은 우리로 말미암아 노래하신다.
조원태 목사 / <뉴욕우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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