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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재글 조원태목사의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 어찌, 폐허가 입을 열 때 (뉴스앤조이) 2026-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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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media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2회   작성일Date 26-07-18 18:18

    본문

    어찌, 폐허가 입을 열 때

    조원태목사의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

    조원태 목사의 연재『요나서로 묻는 17개 질문』을 통해 독자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은 바 있습니다. 독자층에 깊은 질문을 던지며 신학적·목회적 통찰을 나누어 온 그의 글은 특히 삶의 언어로 성서를 풀어낸 점에서 많은 공감과 지지를 받았습니다.

    이번에는 성서 66권 각 책의 서문(Threshold, 문지방 텍스트)을 따라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새로운 연재『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로 다시 시작합니다.

    이 시리즈는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라는 주제로 출발합니다. 특정 책의 프롤로그 분석을 넘어, 성경 전체의 첫 문장을 따라 걸어가는 실험적 글쓰기로서 목회와 문학, 신학을 잇는 연재가 될 것입니다.

    연재의 서막을 여는 글은 프롤로그 “문지방에서 시작되는 큰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소개되며, 이후 매주 성경의 서로 다른 현관을 열어갈 예정입니다.

    이 연재가 독자들의 시야를 넓히고 성서를 다시 ‘시작의 자리’에서 읽게 하는 영적 초대가 되리라 믿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성경의 전체적인 가르침이 다시금 생생하게 느껴지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 편집자 주 -

    예레미야애가 1:1-2
    1 슬프다 이 성이여 전에는 사람들이 많더니 이제는 어찌 그리 적막하게 앉았는고 전에는 열국 중에 크던 자가 이제는 과부 같이 되었고 전에는 열방 중에 공주였던 자가 이제는 강제 노동을 하는 자가 되었도다 2 밤에는 슬피 우니 눈물이 뺨에 흐름이여 사랑하던 자들 중에 그에게 위로하는 자가 없고 친구들도 다 배반하여 원수들이 되었도다

    아침이 왔는데, 도시는 깨어나지 않았다.

    성문을 여는 쇳소리도, 장터를 깨우던 상인의 목소리도, 성전으로 오르던 순례자의 노래도 들리지 않았다. 햇빛은 예루살렘의 무너진 지붕 위에 여느 날처럼 내려앉았지만, 그 빛을 맞이할 얼굴들은 사라지고 없었다. 골목에는 불탄 나무 냄새가 배어 있었고, 돌무더기 사이로 먼지만 식지 않은 재처럼 흩날렸다.

    한때 사람들로 가득했던 도성은 장례가 끝난 집에 홀로 남은 사람처럼 주저앉아 있다. 열방의 공주라 불리던 예루살렘은 과부가 되었고, 수많은 이가 드나들던 도시는 울어 줄 이조차 없는 폐허가 되었다.

    그 깊은 침묵을 깨뜨리며 한마디가 새어 나온다.

    “어찌.”

    히브리어 성경에서 이 책은 첫 단어를 따라 ‘에이카’(אֵיכָה), 곧 “어찌”라고 불린다. 이는 유대교 전통에서 예레미야애가를 가리키는 이름이기도 하다. 우리말 제목 ‘애가’는 바로 그 “어찌”에서 터져 나온 슬픔의 노래를 뜻한다.

    이것은 까닭을 알아내려는 질문이 아니다. 사건과 마음 사이에 갑자기 벌어진 균열이며, 설명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터져 나온 영혼의 첫 숨이다. ‘왜’가 머리에서 시작되기 쉽다면, ‘어찌’는 가슴과 무릎과 눈물샘에서 먼저 나온다. 어찌 사람이 많던 성읍이 홀로 남았는가. 어찌 하나님의 도성이 이토록 무너졌는가.

    예레미야서가 불길이 닥치기 전의 책이라면, 예레미야애가는 불길이 지나간 뒤의 책이다. 예레미야서에는 아직 돌아오라는 호소가 있었고, 듣지 않는 백성을 향해 끝내 거두지 않으신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다. 그러나 애가의 문지방에 이르면 그 음성마저 재가 되어 내려앉는다. 남은 것은 타 버린 성문의 냄새와 밤새 마르지 않는 눈물, 쉽게 해명되지 않는 고통이다.

    그 물음에서 애가의 다섯 시가 흘러나온다. 홀로 남은 예루살렘의 울음에서 시작해(1장), 무너뜨리신 하나님을 향한 탄식(2장), 고난 속에서 가까스로 붙드는 인자와 긍휼(3장), 잿빛으로 변한 시온의 영광(4장)을 지나, 마침내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라는 간구(5장)에 이른다. 애가는 폐허를 해설하는 기록이 아니라, 무너진 공동체가 하나님 앞에서 끝내 말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내쉰 다섯 갈래의 숨이다.

    애가는 예루살렘을 한 여인처럼 울게 한다. 도시는 성벽이 아니라, 밥 짓던 손과 아이를 재우던 노래, 함께 살아온 기억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애가는 폐허에 얼굴과 목소리를 돌려주어 재난이 숫자로만 남지 않게 한다. 무너진 것은 건물이 아니라, 사람들이 함께 살아온 세계였다.

    그렇기에 “어찌”는 단순한 비탄이 아니다. 사랑했던 세계가 무너졌기에 터져 나온 탄식이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는 흔적이다. 믿음은 모든 답을 가진 상태가 아니라, 답을 잃은 자리에서도 하나님께 말을 거는 일이다.

    “어찌”는 무너진 자가 되찾은 목소리다. 제국이 성벽을 허물고 사람을 침묵시켜도, 애가는 폐허에서 다시 말한다. 탄식은 고통이 마지막 진실이 되는 것을 거부하는 영혼의 저항이다.

    예레미야애가는 고난을 미화하거나 회복을 서두르지 않는다. 먼저 폐허 곁에 앉아 사라진 얼굴과 무너진 삶을 바라보고, 그 울음을 품은 채 하나님께 나아간다. 눈물은 믿음의 실패가 아니라 진실이 하나님께 흐르는 길이다. 절망 속에서도 “어찌”라고 부를 수 있다면, 하나님과의 관계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도시가 앉았다

    "슬프다 이 성이여... 이제는 어찌 그리 적막하게 앉았는고"(1절)

    애가는 도시가 무너졌다고만 말하지 않는다. 감당할 수 없는 상실 앞에 두 다리의 힘이 풀린 사람처럼, 도시는 “적막하게 앉았다.” 여기서 ‘앉음’은 패배의 자세이자, 잃어버린 세계 곁에 머무는 애도의 자세다.

    애가의 예루살렘은 돌무더기로 남지 않는다. 밤새 눈물이 뺨을 적시고, 사랑하던 이들에게서조차 위로받지 못하는 한 존재로 그려진다(2절). 도시에 얼굴과 목소리가 생기자, 폐허 속에서 지워질 뻔한 수많은 삶도 다시 말하기 시작한다.

    도시는 사람의 체온과 세월이 겹겹이 쌓여 이루어진다. 집이 불타면 잠자리뿐 아니라 그 안에 밴 웃음과 냄새와 추억이 사라지고, 성문이 무너지면 사람들이 서로를 맞이하고 배웅하던 길도 끊어진다. 도시의 멸망은 사람들이 함께 살아온 세계가 무너지는 일이기에, 재난은 숫자로만 헤아릴 수 없다.

    오늘 우리는 재난을 숫자로 먼저 만난다. 숫자는 참사의 규모를 보여 주지만, 그 뒤의 얼굴과 이름은 쉽게 지워진다. 애가는 한 도시의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로, 통계 속에 묻힌 삶을 다시 불러낸다.

    본문은 폭력이 작동하는 방식을 드러낸다. 사람이 많던 곳을 적막하게 만들고, 존귀하던 이를 홀로 남겨 두며, 자유로운 사람을 강제 노동자로 바꾼다. 폭력은 사람을 고립시키고 이름과 존엄을 지운다. 제국이 끝내 허물려는 것은 성벽보다 인간의 얼굴이다.

    그러나 예레미야애가는 바벨론의 승리가 아니라 무너진 도시의 울음을 성경에 남긴다. 역사가 힘 있는 자들의 언어로 기록되기 쉬울 때, 애가는 지워질 이들의 눈물과 증언을 하나님 앞에 붙든다. 상처 입은 이의 눈으로 역사를 다시 읽게 하는 것, 이것이 애가의 문학적 힘이자 신학적 깊이다.

    애가는 슬픔도 예배의 언어가 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예배는 언제나 곧게 선 몸과 힘찬 찬양으로만 드려지지 않는다. 더는 자신을 지탱할 수 없음을 숨기지 않는 눈물과 탄식도 하나님 앞에 드리는 고백이다. 때로 신앙은 다시 일어서는 힘보다, 무너진 자리에서 하나님을 향해 정직하게 우는 데서 더 선명해진다.

    도시는 무너졌지만 침묵하지 않았다. 제국은 성벽과 삶을 허물었지만, 슬픔까지 지우지는 못했다. 탄식은 패배의 신음이 아니라, 고통이 역사의 끝이 되는 것을 거부하는 영혼의 저항이다.

    “적막하게 앉았다”는 말에는 절망만 담겨 있지 않다. 도시는 눈물로 잃어버린 세계를 증언하며 하나님께 말을 건다. 참된 위로는 무너진 이를 서둘러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슬픔 곁에 함께 앉아 주는 일이다.

    위로하는 자가 없었다

    애가 1장의 슬픔을 가장 깊게 만드는 말은 “위로하는 자가 없고”이다. 사랑하던 이들마저 등을 돌리고, 곁을 지켜야 할 사람들은 사라졌다. 상처는 사건의 크기만으로 깊어지지 않는다. 그것을 홀로 견뎌야 할 때, 슬픔은 고립으로 굳어진다. 때로 재난보다 더 잔인한 것은 아무도 곁에 없다는 사실이다. 애가는 그 적막을 안다.

    오늘 우리는 전쟁과 재난, 추방과 혐오의 현장을 실시간으로 본다. 그러나 많이 본다고 깊이 보는 것은 아니며, 빨리 안다고 오래 아파하는 것도 아니다. 애가의 첫 두 절은 정보의 속도에 익숙한 우리를 멈춰 세운다. 우리는 지금 누구의 슬픔을 지나치고 있으며, 누구의 곁에 앉아야 하는가?

    애가는 슬픔의 바깥에서 섣불리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상처가 훗날 화석이 되더라도, 지금 피 흘리는 이 앞에서 그 아름다움을 말하는 것은 잔인하다. 애가는 고통을 서둘러 해석하지 않고, 먼저 그 한복판에 머물러 충분히 운다.

    그 정직함이 예레미야애가의 믿음이다. 성경은 상처를 신앙의 말로 덮거나, 괜찮지 않은데 괜찮다고 고백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무너진 것은 무너졌다고, 아픈 것은 아프다고 하나님 앞에 말하게 한다. 기도는 그 정직한 고백에서 시작된다.

    그러므로 기도는 언제나 잘 정돈된 경건의 문장으로 시작하지 않는다. 때로는 하나님의 이름조차 제대로 부르지 못한 채 터져 나오는 “어찌”라는 탄식으로 시작한다. 애가는 그 울음과 떨림을 기도의 바깥으로 밀어내지 않는다. 하나님을 향해 터뜨린 탄식도 이미 기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애가가 책임의 질문을 피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죄가 많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곤고하게 하셨음이라”(5절)는 말씀은 신중하게 읽어야 한다. 이를 타인의 고통에 함부로 적용하면, 피해자에게 죄를 덧씌우는 또 하나의 폭력이 된다. 식민 지배와 전쟁, 참사와 난민의 고통을 인과응보로 단정하는 순간, 신학은 위로가 아니라 가해가 된다.

    그러나 이 말씀을 지워 버릴 수도 없다. 애가 안에서 들려오는 회개의 목소리는 고난당한 이를 정죄하는 판결이 아니라, 폐허 속 공동체가 자신의 역사를 하나님 앞에서 돌아보는 고백이다. 우리는 어떤 불의를 묵인했고, 누구의 눈물을 지나쳤는가?

    책임자를 밝히는 일은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 공동체가 회복되지는 않는다. 왜 위험 신호를 지나쳤는지, 왜 약한 이들의 목소리는 늘 뒤늦게 들렸는지를 물어야 한다. 애가는 우리를 그 질문 앞에 세운다. 이러한 회개는 자학이나 체념이 아니다. 고통을 낳은 구조와 그 안에서 누려 온 자신의 안락함을 함께 돌아보고, 같은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맞서는 일이다.

    애통은 약한 감정이 아니라, 악을 악으로 느끼는 내면의 감각이다. 울 수 있다는 것은 아직 사랑이 남아 있다는 증거이며, 불의를 아파할 수 있다는 것은 양심이 살아 있다는 증거다.

    참된 위로는 고통을 서둘러 설명하거나 매듭지으려 하지 않는다. 예레미야애가는 무너진 이의 곁을 떠나지 않고 함께 머문다. 위로는 정답을 건네는 말보다, 고통받는 이를 끝까지 혼자 두지 않는 동행에 더 가깝다.

    영광이 떠난 자리

    “딸 시온의 모든 영광이 떠나감이여”(6절).

    떠난 것은 왕조의 위엄만이 아니다. 예배의 기쁨과 공동체의 자긍심,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누리던 삶의 질서까지 무너졌다. 시온이라는 이름은 남았지만, 공동체를 붙들던 중심은 비었고 지도자들마저 꼴을 찾지 못한 사슴처럼 달아났다. 성벽과 함께 백성을 하나로 묶던 신뢰와 방향도 사라졌다.

    그러나 애가는 그 빈자리에서 또 다른 영광을 드러낸다. 무너진 뒤에도 하나님께 말을 거는 인간의 존엄이다. 성전은 폐허가 되었지만, 눈물 젖은 두루마리는 남았다. 폐허 이후의 영광은 고통 속에서도 목소리와 존엄을 잃지 않는 데 있다.

    예레미야애가는 다섯 편의 시로 이루어지며, 그중 네 편은 히브리 알파벳 순서를 따른다. 세계는 무너졌지만, 시는 언어의 질서를 놓지 않는다. 이는 고통을 꾸미기 위한 형식이 아니라, 슬픔이 휩쓸리지 않도록 세운 최소한의 난간이다. 장례의 절차가 죽음을 되돌리지는 못해도 남은 이가 슬픔을 견디게 하듯, 알파벳은 울음이 지나갈 길을 낸다.

    공동체는 그 길을 따라 고통을 말과 기억으로 옮긴다. 말이 된다고 상처가 사라지지는 않지만, 이름 없는 고통처럼 사람을 안에서부터 허물지는 않는다. 애가는 함께 읽고, 울고, 기억하게 하는 언어의 예배다. 성경은 창조의 빛과 출애굽의 해방뿐 아니라, 시온이 무너진 날의 울음도 보존한다.

    우리는 무너짐의 시간보다 회복의 이야기에 더 익숙하다. 그러나 애가는 아직 일어서지 못한 사람 곁에 머문다. 폐허를 해석하기 전에 그 안의 사람을 바라보고, 비극을 교훈으로 바꾸기 전에 그의 울음을 끝까지 듣게 한다.

    예레미야애가의 하나님은 한마디로 설명되지 않는다. 시인들은 하나님을 심판하시는 분으로, 때로는 침묵하시는 분으로 경험한다. 믿음은 하나님을 모두 이해하는 일이 아니라, 그분이 낯설게 느껴지는 날에도 말을 멈추지 않는 일이다.

    애가 3장에 이르면 마침내 소망의 문장이 들린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애 3:22). 그러나 이는 앞선 눈물을 지우는 낙관이 아니다. 고초와 재난, 쑥과 담즙을 기억하면서도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붙드는 믿음이다. 애가의 소망은 망각이 아니라, 기억에 삼켜지지 않게 하는 은혜에서 나온다.

    그 소망은 화려하지 않다. 단번의 역전을 약속하지 않고, 다만 긍휼이 아침마다 새롭다고 말한다. 모든 질문에 대한 해답이 아니라, 오늘을 다시 견디게 하는 자비이며 아직 진멸되지 않았다는 생명의 징표다. 그래서 애가의 소망은 작지만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그 희망은 마지막 장에서도 완결되지 않는다. 애가 5장은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애 5:21)라고 간구하면서도 버림받음의 두려움을 남긴다. 하나님은 때로 성급한 마침표 대신 정직한 쉼표를 허락하신다. 애가는 해피엔딩으로 독자를 안심시키지 않고, 끝나지 않은 기도를 손에 쥐여 준다.

    그러므로 애가의 문지방은 우리를 서둘러 소망으로 이끌지 않고, 폐허 앞에 오래 세운다. 누구의 울음을 성급히 위로했는가? 어떤 상처를 설명으로 덮었는가? 때로 믿어 온 세계가 무너진 뒤에야, 이전에는 들리지 않던 타인의 울음이 비로소 들린다.

    예레미야애가를 읽는다는 것은 절망에 머무는 일이 아니다. 슬픔을 지나치지 않고, 위로를 값싸게 만들지 않으며, 폐허 속에서도 사람의 얼굴과 이름을 끝까지 기억하는 훈련이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잃어버린 질문을 되찾는 일이다. “어찌 이렇게 되었는가?” 이 물음을 놓지 않는 사람은 아직 하나님과의 관계를 포기하지 않았으며, 역사와 공동체에 대한 책임에서도 물러서지 않은 사람이다.

    예루살렘은 폐허에 앉아 울었고, 성경은 그 눈물 위에 한 권의 책을 세웠다. 그 책은 무너진 성전과 불탄 성문보다 오래 남아, 사라진 이들의 이름을 지키는 기도가 되었다.

     그러므로 소망을 말하기 전에, 폐허의 울음을 끝까지 들어야 한다. 적막한 성문과 밤새 우는 도시 앞에 멈추어 물어야 한다. 내가 외면한 폐허는 어디인가? 내 안에서 아직 울고 있는 도시는 무엇인가? 오늘 나는 누구의 “어찌” 곁에 앉을 것인가?
     

    ※ 예레미야애가는 전통적으로 ‘눈물의 예언자’ 예레미야가 예루살렘 멸망을 두고 부른 장송곡이자, 심판과 성전 상실, 공동체적 회개의 책으로 읽혀 왔다. 현대 연구는 여기에 시적 구조와 고대 도시 애가의 전통, 트라우마 생존자의 증언, 딸 시온의 항변, 기억과 공동체 정체성, 제국 폭력 이후의 생존 문제를 함께 주목한다. 이런 흐름에서 애가 1장 1–2절은 단순한 서두가 아니다. ‘어찌’라는 탄식과 적막한 도시, 밤새 흐르는 눈물과 위로자 없는 고립 속에, 폐허 이후 공동체가 처음 붙든 언어가 응축되어 있다. 이 문지방은 오늘의 독자에게도 상처를 설명하기 전에 먼저 듣고, 비극을 통계로 정리하기 전에, 그 안에서 지워진 한 사람의 삶을 바라보라고 요청한다.

    예레미야애가의 한 문장

    폐허가 끝내 하나님을 부르는 동안,

    절망은 역사의 마지막 문장이 되지 못한다.

     조원태 목사 / <뉴욕우리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