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글 조원태 목사의 '요나서로 묻는 17개 질문' - 고백 이전의 침묵 (뉴스앤조이) 2025-5-11
페이지 정보

본문
요나서로 묻는 17개의 질문
왜 그것이 딜레마인가? (요나 1:10)

요나는 속을 찌르는 바늘처럼 서 있었다. 미세한 떨림이 몸을 휘감았다. 아무도 다가서지 않았다. 선원들은 신의 이름을 흩뿌리며 짐을 던졌다. 짐들은 물 아래로 사라졌고, 절망은 말없이 번져갔다. 요나의 침묵과 선원들의 혼란 사이, 바다는 어딘가 기이하게 잠잠했지만, 그것은 진실이 드러나기 직전의 정적이었다. 그때, 세상을 찢듯, 질문 하나가 떨어졌다.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하였느냐." (요나 1:10)
제비는 요나를 겨누었다. 요나는 알았다. 이 풍랑이, 이 어둠이, 이 무너짐이, 자신의 것임을. 목구멍 끝에서 말이 끓어올랐다. 입을 열면, 자신이 부서질 것이었다. 침묵하면, 모두가 함께 가라앉을 것이었다. 요나는 그 얇은 금 위에 발을 딛고 서 있었다. 이미 균열은 그의 안에 번지고 있었다. 요나는 직감했다. 하나님의 얼굴을 피한 대가를.
그러나 선원들은 몰랐다. 바람을 탓했고, 파도를 탓했고, 짐을 탓했다. 오직 요나만이 알았다. 이 풍랑이, 이 어둠이, 자신의 죄 때문임을. "자기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함인 줄을 그들에게 말하였으므로 무리가 알고" (요나 1:10)
그런데,
"무리가 알고" (요나 1:10) — 요나의 말 한마디가 파도처럼 선원들의 가슴에 번졌다. 그제야 바람과 파도가 단순한 현상이 아님을 깨달았다. 요나가 알고 있었던 죄의 무게를, 그들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요나가 피하려 했던 고백이, 그들 안에도 균열을 냈다. 요나의 침묵이 찢어진 순간, 선원들의 무지 역시 찢겼다. 진실은 그렇게, 물결처럼 가슴을 적시고 흘러들었다.
파도 소리에 묻힌 진실은 요나의 침묵 속에 잠겨 있었다. 고백이 터지기 전까지, 파도는 단지 소음이었고, 진실은 익사한 언어처럼 바다에 가라앉아 있었다. 그러나 "자기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함인 줄을 그들에게 말하였으므로" (요나 1:10), 그제야 선원들은 깨달았다. 파도가 그토록 매서웠던 이유를. 고백은 바다를 가른 것이 아니라, 진실을 뚫고 나왔다. 그제야 세상이 무너진 이유를, 그들도 알게 되었다.
아는 자는 안다. 이 풍랑이, 이 어둠이, 자신의 죄에서 비롯되었음을. 모르는 자는 모른다. 제비를 뽑아도, 짐을 던져도, 어디서 무너졌는지, 누구 때문인지, 끝내 알지 못한다. 회개의 자리까지 가는 길을 모른다. 죄를 직시하는 것, 침묵을 열어 스스로를 찌르는 것. 너의 내면을 향해 묻는다. 지금, 너는 어디에 서 있는가. 무너진 세계 끝에서, 너는 무엇을 붙잡을 것인가. 숨을 삼키며, 요나는 그 어둠을 걸었다.
죄를 삼키는 순간
니느웨는 먼 도시였다. 바다 건너 어딘가, 손 닿지 않는 곳. 그들의 죄악은, 요나와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 요나는 자신 안에서 저주를 느꼈다. 들이쉴 때마다, 죄가 독초처럼 폐 깊숙이 뿌리내렸다. 온몸은 짓눌렸고, 메마른 떨림이 실금처럼 번져갔다. 속은 조여들었고, 찢어질 듯한 감각이 피부를 스쳤다.
요나는 눈을 감았다. 도망칠 수 없는 저주가 숨결 사이로 스며들었다. 폐 깊숙이 내려앉은 어둠, 속에서 조여드는 무게, 사라지는 힘줄과 흐릿해지는 뼈마디의 감각들. 무너짐은 내부에서 일어났다. 고백은 아직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지만, 이미 내면은 꺾이고 있었다. 그 순간, 요나는 자신의 안에 금이 간 이름을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그 이름은 무너진 신음으로만 발음될 수 있었다.
고백은, 떨리는 숨결 끝에서 터져나온 울음이었다. 남의 죄는 바람처럼 흩날리지만, 내 죄는 납덩이처럼 복부 한가운데 내려앉는다. 타인의 파멸은 뉴스 화면 속 장면 같지만, 내 파멸은 지금, 이 좁은 가슴 안을 무너뜨리는 현실이었다. 심판은 신화가 아니었다. 그것은 갈비뼈 틈을 타고 뿌리내리며, 심장 안쪽에서 꿈틀거렸다. 요나는 직감했다. 들이쉴 때마다 죄가 폐를 스쳐 지나가듯 번졌고, 내쉴 때마다 죄의 무게가 살결을 따라 흘러내렸다. 목 안에서 떨리는 말은 고요를 찢고 나오려 했지만, 그의 내면은 아직 부서질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떨림은 멈출 수 없었다.
요나는 스스로를 가리켰다.
"나는 히브리 사람이오. 나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을 경외하노라." (요나 1:9)
고백은 무딘 송곳처럼 밀려왔다. 한 번에 뚫는 것이 아니라, 살결과 뼈 사이를 가로질러 심연까지 침투했다. 요나는 무너졌다. 그러나 그 무너짐 안에서 숨을 삼켰다. 그리고 다시, 말을 삼켰다. 모든 고백은 두려움에서 시작된다. 입을 여는 순간, 내부가 찢기고, 삶이 다시 구성될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자유라는 형벌
아이들이 아주 어렸을 때였다. 어느 밤, 아내와 다툼이 일었다. 날선 말이 오갔고, 그 말들이 방 안을 돌아다녔다. 그 작은 네 명의 아이들은 거실 한편에 모여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눈빛 안에 담긴 놀람과 두려움이 나를 향해 흘러들었다. 그 침묵이, 내 안에 파문을 일으켰다. 언성이 오갔고, 그 네 아이들은 거실 한편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 눈빛을 기억한다. 아이의 눈이 묻던 질문이, 내 속을 떠돌았다. 나는 말을 잃었다. 고백은 늦었고, 침묵은 깊었다. 요나처럼, 나도 등을 돌리고 있었다. 말하지 않음으로, 모든 것이 지나가길 바라고 있었다.
그날 밤, 나는 입을 열어야만 했다. 말하지 않으면, 아이들의 눈빛 속에 스르르 금이 갈 것 같았다. 말하면, 아버지로서의 껍질이 부서질 것 같았다. 어느 쪽도 쉬운 선택은 아니었다. 그러나 누군가는 먼저 무너져야 했다. 나는 아이들에게 돌아갔다. 한 사람씩 불렀고, 한 사람씩 말했다. 미안하다고. 어른이 먼저 무너져야 할 때가 있다는 것을, 그날 배웠다.
말하라는 명령은 없었다. 침묵할 자유도, 고백할 자유도 내 몫이었다. 그러나 그 자유는 가볍지 않았다. 그것은 누군가를 살릴 수도, 무너뜨릴 수도 있는, 칼날 같은 결정이었다. 그러나 그 자유는 누군가를 살릴 수도, 무너뜨릴 수도 있는 무거운 책임이었다. 지금, 당신의 내면에도 그런 순간이 있지 않은가. 입을 열지 못한 기억. 말하지 않아 멀어졌던 마음들.
하나님은 명령도, 협박도 없었다. 바람과 물과 어둠을 부리면서도, 요나의 입을 억지로 열지 않으셨다. 그분은 말없이 기다리셨다. 입을 닫은 자를 향해, 입을 열기를 바라시며. 침묵할 자유도, 고백할 자유도 요나 몫이었다. 고백은 진실을 꺼내는 일이 아니라, 자신을 해체하는 일이었다.
20세기 기술 문명 비판과 실천적 신앙을 선도한 자끄 엘륄은 인간의 자유를 단순한 선물이 아닌, 선택의 짐으로 보았다. 선택은 무겁고, 책임은 깊었다.[1] 20세기 실존주의 철학의 거장인 장폴 사르트르는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자유를 피할 수 없는 존재라고 설명했다. 자유는 권리가 아닌, 도망칠 수 없는 책임이었다.[2] 숨을 삼키며 앞을 바라보는 요나처럼, 우리는 자유 앞에 홀로 선다. 20세기 대표적 신학자인 폴 틸리히는 말했다. 인간이 자유를 가질 때 필연적으로 '존재론적 불안'에 직면한다고 말했다.[3] 현대 신학에서 '포용의 신학'을 대표하는 미로슬라브 볼프는 자유를 자기 해방이 아니라, 타자를 껴안는 일로 해석한다.[4] 요나는 깨달았다. 자신 하나 살겠다고 도망치는 자유는 결국 누구도 살리지 못한다는 것을. 진짜 자유는, 누군가를 위해 스스로를 비우고 무너지는 용기라는 것을. 회피의 권리가 아니라, 껴안음의 책임이라는 것을.
풍랑의 원인을 자신 때문이라 고백하는 일. 그것은 요나에게 두려운 딜레마였다. 죄를 인정하고 배를 살릴 것인가. 죄를 감추고 모두를 침몰시킬 것인가. 무엇을 택해도, 자신은 무너질 것이었다. 요나는 피하려 했다. 배 밑층까지 내려가 잠을 청하며 도망쳤다. 그러나 제비는 요나를 가리켰고, 질문은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 얕은 어둠 속에서, 숨을 죽이고 있어도 진실은 문을 두드렸다. 외면하려 했던 그 순간, 선택은 요나의 몫이 되었다.
체크메이트. 외통수.
요나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침묵은 모든 생명을 바다 밑으로 끌어내릴 것이었고, 고백은 오직 자신 하나를 심연 속으로 던질 것이었다. 그는 칼날 위에 맨발로 선 자처럼 후자를 택했다. 요나는 날카로운 진실의 칼날 위를 천천히 걸었다. 바다는 그를 삼키지 않았다. 대신,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길을 열어주었다. 지금도 우리는 그런 순간을 맞이한다. 말할 수 있었으나 끝내 침묵했던, 진실 한마디로 구할 수 있었던 그때를. 우리는 자주 최악을 택한다. 함께 가라앉으면서도 그것을 차악이라 믿으며 위안한다. 그러나 이미 안다. 무너져야 할 것은 세상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었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은 자유는, 결국 모두를 함께 침몰시키는 형벌이다.
흔들리는 배 위에서
내 조국은 70년 넘게 흔들리는 바다 위에 남북으로 갈라져 떠 있다. 두루미는 경계 없이 산과 강을 넘지만, 사람은 그 금을 넘지 못한다. 이데올로기의 바다는 여전히 거칠고, 우리는 고백하지 않는 파도 속에 갇혀 있다. 서로의 탓을 쌓으며 만든 알리바이는 분단의 골짜기를 더 깊게 팠다.
그러나 지금, 미세한 떨림이 전해진다. 남북 평화의 꿈을 품고 창립된 국경선평화학교는 6월 6일, [코리아 평화의 날]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제주도에서 출발할 한 척의 작은 배는 바람을 의지해 항해할 것이다. 그들은 남북 경계선, 임진강을 향해 516km의 물결을 가른다. 평화의 배 이름은 요나의 고래(Jonah's Whale)다. '요나(יונה)'는 히브리어로 비둘기를 뜻한다. 그 배가 가르는 물결마다, 화해와 회복의 길이 열릴 것이다. 이데올로기의 풍랑을 가르고자, 그들은 나아간다. 한민족의 숨겨진 고백을 싣고, 얼어붙은 침묵을 깨뜨리며.
요나처럼, 그들은 물러서지 않는다. 냉전의 침묵을 넘어서기 위해, 보이지 않는 경계를 부순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을 이끌었다. 그들은 금지된 물결 위로 천천히, 그러나 흔들림 없이 나아간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탄 그 배가, 지금도 같은 바람 속에서 숨죽이며 흔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임진강은 남북을 가로지르며 흐른다. 그 강물은 소리 없이 흔들렸고, 그 위에 덧씌워진 이념의 얼음은 금이 가 있었다. 바람이 불면 찰랑이며 부서질 듯했지만, 그 얼음은 깨지지 않았다. 70년 동안 얼어붙은 진실이었다.
하나님은 니느웨를 향해 말씀하셨다. 그 도시는 요나가 떠난 곳처럼 멀리 있었고, 요나는 그곳을 피하려 했다. 그러나 피할 수 없는 진실이 있었다.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요나 1:2)
남의 죄는 가볍고, 남의 심판은 멀리 보였다. 그러나 풍랑 한가운데서, 요나는 알게 되었다. 저주는 결코 남의 일이 아니었다. 심판은 타인을 향한 선언이 아니라, 먼저 자신에게 새겨져야 할 자백이었다. 니느웨를 향하기 전, 요나는 자신이 먼저 무너져야 했다. 죄를 외치기 전, 그 무게를 자신의 가슴에 새겨야 했다. 정죄의 칼을 들기 전에, 그 칼끝은 먼저 자신의 심장을 향해야 했다. 죄를 멀리서만 외칠 수는 없다. 내 안에서 울려야, 비로소 진실이 된다.
평화의 배 요나의 고래호는 516km의 바람길을 따라 남북분단의 죄를 통렬하게 자백하며, 니느웨를 향해 나아갔다. 강을 건널 때마다, 우리가 외면했던 죄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나누어진 땅을 슬퍼하지 않았던 무심함. 고백하지 않았던 이념의 벽들. 요나처럼, 우리는 배를 살리기 위해 파도 속에 몸을 던지는 심정으로 그 강을 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보내실 평화의 큰 물고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그것은 삼킴이 아니라, 구원의 품일 것이다.
우리는 21세기의 요나들이다. 말하지 않는 자유 속에 잠겨, 흔들리는 바다 위에 떠 있다. 시스템을 탓하고, 구조를 탓하고, 과거를 탓한다. 가난, 폭력, 불평등, 혐오. 모든 것이 죄를 대신할 알리바이가 되었다. 그러나 바다가 흔들리는 이유를 안다. 그것은 나 때문이다.
내 조국의 바다도 흔들리고 있다. 말하지 않은 진실들이 금이 간 얼음처럼 덮여 있다. 침묵은 외통수가 되었고, 그 위에 한국교회가 떠 있다. 요나처럼 외면할 것인가, 아니면 고백하고 무너질 것인가. 그 앞에 놓인 자유는 선택이 아니라, 무게다.
나는 보았다. 바람만을 의지해 금지된 물결 위를 넘는 요나선을. 평화는 말이 아니라 항해였다. 민족주의의 벽을 넘고, 침묵의 얼음을 가르는 조용한 고백이었다.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이제, 대답할 차례다.
우리는 디지털 바벨탑을 쌓았다. 넘지 않는 선, 진심 없는 응답, 쏟아지는 정보 속에 길을 잃었다. 모든 걸 아는 듯 보이지만, 자신의 내면은 모른다. 아는 것을 말하지 않고, 보는 것을 외면하며, 다가가지 않는다.
정치가, 언론이, 교회가, 개인이, 가족이, 사회가.
모두 알고 있다. 그러나 입을 닫는다.
고백은 말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을 해체하는 일이다. 안에서부터 부서지는 일이다. 그러나 자유는 선택이 아니었다. 그것은 책임이었다. 말하지 않는 자유는 모두를 침몰시킨다. 하나님은 여전히 아무 말 없이, 단 하나의 말씀만 던지셨다. 그 말씀 앞에서, 우리는 묻힌 진실처럼 흔들린다.
허사가 아닌 인내
선원들은 배를 살리려 몸부림쳤다. 날선 파도는 배 옆구리를 때렸고, 거센 바람은 돛을 갈기갈기 찢었다. 사람들은 짐을 던졌고, 돛을 감았으며, 물을 퍼냈다. 누군가는 기도했고, 누군가는 절규했다. 선장은 하늘을 향해 목이 터져라 외쳤고, 어린 선원은 배 밑바닥에 몸을 웅크린 채 떨었다. 하지만 바다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파도는 이빨을 드러냈고, 선체는 금이 간 듯 삐걱였다. 희망은 젖은 나무 틈 사이로 흘러내렸다. 모든 시도는 파도에 삼켜질 듯 아득했다.
그러나 요나가 고백했을 때,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들의 무수한 몸부림은 헛되지 않았다. 그 모든 노력이, 단 한 사람의 고백을 기다리는 시간 벌기였다는 것을. 요나가 진실을 입에 올리기까지, 하나님은 그들을 기다리셨다. 침묵으로, 바람으로, 흔들림으로 기다리셨다. 멸망으로 곤두박질치는 이 작은 배 위에, 하나님은 인내하셨다. 파선을 막은 것은 기적이 아니라, 인내였다.
우리도 안다. 지금도 우리는 흔들리는 배 위에 있다. 분단된 민족의 경계에서, 서로를 외면한 채 같은 배를 타고 있는 한국교회의 갑판 위에서. 말하지 않으면 모두가 가라앉는 줄 알면서도, 우리는 침묵을 택한다.
그러나 냉전의 마지막 잔재인 한반도, 그 얼어붙은 물결 위에서 흘린 모든 눈물과 모든 기도가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마치 선원들의 무수한 몸부림이 단 한 사람, 요나의 고백을 기다리는 시간 벌기였던 것처럼, 한반도 위에서 흘린 수많은 노력과 기도도 그저 흘러간 것이 아니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 하나님은 기다리셨다. 침묵으로, 바람으로, 흔들림으로. 늦은 고백조차, 헛된 사랑조차, 하나님 앞에서는 허사가 아니라 인내였다. 예수는 죽었고, 사흘 만에 살아났다. 우리가 포기한 그 자리, 하나님은 아직 포기하지 않으신다. 고백은 마지막이 아니라, 시작이다.
심장을 건너는 길
조원태
검은 바다 위
숨 하나가 무겁다
나는 천천히,
나를 건넌다
두려움을 넘어,
고백의 칼날 위를
걸어간다
그때, 바다가 열렸다
우리는 다시 선다
바람이 불고
파도가 잦아들었다
....................
각주)1. Jacques Ellul, The Judgment and Salvation of Jonah (Grand Rapids: Eerdmans, 1971), pp. 34–35.
2. Jean-Paul Sartre, Being and Nothingness, trans. Hazel E. Barnes (New York: Washington Square Press, 1956), p. 553.
3. Paul Tillich, The Courage to Be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52), p. 64.
4. Miroslav Volf, Exclusion and Embrace (Nashville: Abingdon Press, 1996), p. 55.
조원태 목사 / <뉴욕우리교회>
페이스북(으)로 기사보내기 트위터(으)로 기사보내기 URL복사(으)로 기사보내기 이메일(으)로 기사보내기 다른 공유 찾기 기사스크랩하기페이스북(으)로 기사보내기 트위터(으)로 기사보내기 URL복사(으)로 기사보내기 이메일(으)로 기사보내기- 이전글2025년 5월 11일 25.05.11
- 다음글"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고, 영혼의 회복을 경험하는 특별한 시간!" (뉴스앤조이) 2025-5-11 25.0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