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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스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사람들, 한국 교회에도 있다 (뉴스앤조이) 202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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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media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23회   작성일Date 25-03-04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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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욕우리교회는 매년 3.1절을 기념하여 예배를 드리며, 신앙과 민족의 독립이 하나였던 선열들의 뜻을 기리고 있다. 본문은 조원태 목사의 3.1절 기념 설교를 요약한 내용으로, 히브리서 11장에 등장하는 ‘믿음의 사람들’처럼 한국 교회 역사 속에서도 신앙과 애국을 함께 실천한 인물들을 조명한다. - 편집자 주 -



    히브리서 11장은 '믿음 장'으로 불린다. 믿음으로 살았던 16명의 이름이 기록되었다.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사라, 이삭, 야곱, 요셉, 모세, 라합 등 10명은 간략한 설명과 함께 등장하고,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사무엘은 이름만 언급된다. 저자는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시간이 부족하다”(히 11:32)라고 말하며, 믿음의 사람들은 훨씬 많음을 강조한다.

    그렇다면, 한국 교회에도 믿음의 사람들이 있었을까? 한국 교회의 역사에서 독립운동을 위해 헌신한 신앙인들을 우리는 시간이 부족할 정도로 말할 수 있을까? 히브리서 11장이 있다면, '꼬레아서' 11장도 가능하지 않을까?

    믿음으로 나라를 지킨 한국의 신앙인들

    히브리서 11장의 흐름처럼, 한국의 신앙인들도 세 그룹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신앙과 애국을 하나로 여겼던 사람들이다.

    둘째, 신앙교육을 통해 민족인재를 양성하며 독립운동을 이끈 사람들이다.

    셋째, 해외에서 임시정부와 독립운동을 주도한 사람들이다.

    손정도 목사는 "걸레 신앙"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자신을 걸레처럼 여기며 나라를 깨끗하게 하기 위해 헌신했다. 유관순 열사의 멘토였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헌장을 통과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유관순 열사는 정동제일교회에서 신앙과 애국이 하나라는 설교를 들은 후, 3.1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내 손톱이 빠져 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나라를 잃은 고통은 견딜 수 없습니다”라는 그녀의 외침은 히브리서 11장의 믿음과 다르지 않다.

    길선주 목사는 평양 대부흥운동을 주도하며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히 11:33)를 실천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주기철 목사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생애 마지막 6년을 감옥에서 보냈다. “설교는 내가 할 일이고, 체포는 당신이 할 일이다”라는 그의 말은 오늘날까지 깊은 울림을 준다.

    장준하 선생은 학도병으로 강제 징집되었으나 탈출해 충칭의 임시정부에 합류했다. 그가 걸은 6,000리의 길은 믿음의 길이었다. 김구 선생은 광복 후 “경찰서 열 곳 세운 것보다 교회 한 곳을 세우는 것이 낫다”고 말했다. 신앙이 민족을 변화시킨다는 확신이었다.

    이승훈 장로는 전 재산을 팔아 오산학교를 설립해 주기철, 한경직, 함석헌을 배출했다. 평양 산정현 교회의 장로로서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주도했다. 조만식 장로는 오산학교 교사로 부임해 민족교육에 힘썼다.

    김교신 선생은 ‘조선 김치 냄새 나는 기독교’를 강조했다. 그는 성서조선을 창간하며 민족과 신앙이 하나 되는 삶을 살았다.

    김약연 목사는 명동학교와 명동교회를 세워 윤동주, 문익환 등 민족 지도자를 길러냈다. 안중근 의사는 평신도 선교사로서 8년간 복음을 전하다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후 감옥에서 기도하며 생을 마감했다.

    김마리아 선생은 여성 독립운동을 위해 애국부인회를 조직했다. 뉴욕 신학대학에서 공부하며 해외에서도 독립운동을 펼쳤다. 안창호 선생은 도산이라는 호처럼 평생을 교육과 독립운동에 바쳤다. 그는 필라델피아와 샌프란시스코에서 한인 사회를 조직해 독립운동 자금을 모았다.

    전덕기 목사는 독립협회 창립회원으로서 을사늑약 반대운동을 이끌었고, 한석진 목사는 안창호와 이승훈을 신앙으로 이끈 인물이었다.

    이들은 결코 혼자가 아니었다. 유관순은 손정도의 영향을 받았고, 조만식은 주기철과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함께했다. 조만식은 이승훈의 오산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했다. 이승훈은 안창호의 연설을 듣고 오산학교를 설립했다. 안창호와 이승훈은 한석진 목사에게 신앙을 배웠다. 믿음의 사람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히브리서 11장은 보이지 않는 것을 실상으로 믿었던 사람들이었다. 한국의 신앙인들도 독립이라는 보이지 않는 꿈을 실상으로 믿고 걸었다.

    1938년 신사참배에 참여한 교회는 95%, 반대한 교회는 5%, 반대 설교를 한 목사는 1%였다. 독일에서 나치에 저항한 본회퍼, 니묄러, 바르트도 1%였다. 그러나 그 1%가 역사를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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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뉴욕우리교회 삼일절 기념 예배에서 기미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만세 삼창을 외치고 있다. @ 미주뉴스앤조이




    1919년 한국 기독교인은 전체 인구의 1.3%였다. 그들은 3.1운동을 주도하며 민족의 빛이 되었다. 112개 예배당이 파괴되고, 2,190명이 투옥되었으며, 52명이 순교했다. 그러나 그들이 있었기에 우리는 오늘의 신앙을 가질 수 있다.

    히브리서 11장처럼 한국에도 믿음의 장이 있다. 신앙과 애국이 하나였던 그들처럼, 오늘 우리는 어떤 믿음의 장을 써 내려갈 것인가? 우리 안에 믿음의 사람들을 찾아내고, 세우고, 연결하며, 세상을 바꾸는 믿음의 공동체를 만들 수 있을까?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손정도, 유관순, 길선주, 주기철, 장준하, 이기풍, 이승훈, 조만식, 김교신, 김약연, 안중근, 김구, 김마리아, 안창호, 전덕기, 한석진 외에

    이름 없는 믿음의 한국인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우리에게도 시간이 부족할 정도로, 믿음의 사람들을 말할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란다.